22. 영업전략: 파이프라인 관리 (1)

by 성세윤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가 거의 마무리되어 한가롭던 어느 날 이주완 대표가 나를 호출했다. 이주완 대표는 인턴 때 내 최종 인터뷰를 한 후 수시로 날 불렀다. 간단한 리서치나 보고서 작성을 부탁하며 업무나 커리어 관련 조언을 주곤 했다.


그날도 이주완 대표는 늘 그랬듯 손수 드립커피를 내리며 날 환대했다. 드리퍼 필터 위로 손수 간 원두를 넣고 주둥이가 긴 드립커피 전용 주전자로 원을 그리며 물을 부으니 커피 향을 머금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이 대표는 뭉뚝한 코를 내밀어 커피 내음을 한번 들이키고는 입을 열었다.


“요즘 어때요? 여전히 잘하고 계신가요?”


“네. 잘 가르쳐 주신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요, 많이 배워야 해요. 저도 컨설팅을 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알고 있는 거라곤 제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밖에 없죠. 컨설턴트라면 그래야 해요. 특히 제너럴리스트라면 더욱 그렇죠. 그래야 빨리 흡수하고 통찰력 있는 결론을 낼 수 있어요.


컨설턴트는 지식 만으론 클라이언트를 이길 수 없답니다. 생각해 보세요. 세윤 씨가 아무리 많은 프로젝트를 경험한다고 해도 한 가지 일을 수십 년 동안 한 클라이언트보다 많이 알 수 있을 까요? 저희가 해야 하는 건 최대한 빨리 그들의 지식을 흡수하고, 흡수한 지식을 또 다른 클라이언트로부터 흡수한 지식과 합쳐 인사이트를 도출하는 거랍니다. 컨설턴트는 아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말하면서 알아가야 하는 거죠.”


이 대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서버에 내려진 커피를 내 잔에 따랐다. 깊은 커피 향이 진하게 풍겨왔다.


“저는 커피를 내릴 때 주로 표백 필터를 쓴답니다. 천연 펄프로 된 필터를 쓰면 펄프 냄새가 원두 맛을 왜곡시키거든요. 원두마다 미묘하게 다른 맛과 향을 느끼기 위해 펄프 본연의 특성을 의도적으로 없앤 표백 필터를 쓰는 거죠.


전 컨설턴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프로젝트에 들어갈 때마다 매번 의도적으로 자신을 무지의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무지의 지’라고나 할까요? 그래야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클라이언트의 상황을 이해하고 클라이언트 입장에서 인사이트를 제시할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최대한 빠르고 정확히 상대의 지식을 흡수하는 겁니다. 그게 컨설턴트의 역할이죠. 그러니까 세윤 씨에게 중요한 건 알고 있는 걸 전달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걸 질문하는 거예요. 그렇게 항상 배우는 자세로 임한다면 성 대리님도 곧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뜨끔했다. 이주완 대표는 커피 향처럼 부드럽기만 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 맛은 진한 에스프레소처럼 썼고 정신을 번뜩 각성시켰다. 사실 그간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시나브로 허식과 자만이 쌓였다. 클라이언트와 논의할 때 조금이라도 논점이 흐려지거나 장황해지면 바로 이맛살을 구기며 말을 끊기 일쑤였고 그들의 경험이나 지식은 습관적으로 폄하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이 대표의 책상을 향했다. 이 대표 책상 위에는 정보 통신 분야 논문과 저널이 탑을 이루며 쌓여 있었고, 빽빽이 주석을 달아 놓은 보고서 옆으로는 몽똑히 닳아 버린 연필 몇 자루와 지우개 가루가 너저분히 흩뿌려 있었다.


“실은 프로젝트가 하나 있어서 불렀어요. 제 지인이 시큐테크라는 업체 대표이사로 있는데 골칫거리가 하나 생겼다면서 프로젝트를 의뢰했죠. 내막을 들어보니 공식으로 발주할 규모의 프로젝트는 아니고 해서 제가 주니어 컨설턴트 한 명만 할당해 아르바이트로 진행하겠다고 제안했답니다. 그걸 성 대리님이 리딩해보면 어떨까요?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제가 직접 프로젝트를 리딩하라고요?”


“맞아요. 하지만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 제 지인 분 프로젝트니만큼 저도 직접 지원할 거니까요. 세윤 씨는 그저 배우는 자세로 임해주시면 됩니다.”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언젠가 나 혼자 프로젝트를 해야 할 날이 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너무도 급작스런 제안에 그저 아연할 따름이었다. 뭐, 그렇다고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그렇게 하겠다며 대표실에서 나가려는데 이주완 대표가 내 등에 대고 말했다.


“아, 그리고 그거 아세요? 어센트에 특별히 진급 기준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 프로젝트를 혼자 리딩한다면 과장 자격은 충분히 갖춘 거예요. 다른 대표들도 반박하지 못할 겁니다. 2년을 조기진급 한다고 해도 말이죠.”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봤고, 이주완 대표는 열심히 해보라는 듯 커피잔을 올리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컨설팅 직급 체계는 일반 회사와 달랐다. 고객사를 상대하는 업무 특성상 직급은 일반 회사 대비 한 단계씩 높았고 진급도 빨랐다. 어센트의 경우 애널리스트로 불리는 신입사원은 대리 직급이었고, 거기서 3년에 한 번꼴로 컨설턴트 (과장), 시니어 컨설턴트 (차장), 매니저 (부장), 시니어 매니저 (이사), 디렉터 (상무)로 진급했다.


과장이나 차장으로 조기진급하는 케이스는 더러 있었지만 그래봐야 1년 빨리 진급하는 경우였다. 이제 입사한 지 1년 갓 넘은 내가 과장으로 진급한다면 파격적인 승격이었다. 6개월 간 인턴생활과 입사지연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번뜩, 이주완 대표의 제안이 내게 뭘 시사하는지 깨달았다. 승격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과장이 되면 MBA 프로그램 지원 자격이 생긴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직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었다. 우선 프로젝트에 집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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