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잃어버린 낙원
몸이 고장 났어도 이미 가기로 한 여행을 취소할 순 없었다. 여행 취소로 생길 아내의 힐난과 연서의 성화는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지만 기왕 시작한 거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었다. 단순히 유명 행선지를 골라 나열하는 식의 접근은 식상했다. 웃음을 되찾기 위해선 보다 예술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난 우선 고당도 과일을 선별하듯 감동의 농도가 진할 만한 목적지를 골랐다. 마운틴뷰 다운타운이나 피셔맨스 워프 같은 곳이 일 순위로 떠올랐고, 연서가 가고 싶어 하던 앨커트래즈나 스탠퍼드 캠퍼스도 목록에 포함됐다. 그러곤 하얀 캔버스에 꼭짓점을 찍듯 구글맵에 행선지를 찍고 오일러가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문제를 풀 듯 최적의 경로를 그려 봤다. 경로는 분석적으로만 접근해선 안 됐다. 경로를 따라 하나의 스토리가 펼쳐져야 했다. 10일간 우리 가족의 웃음을 되찾게 해 줄 마법 같은 스토리가 말이다.
웃음이란 허를 찌르며 긴장을 무너뜨리는 한 방이다. 기대에 어긋나거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터진다. 어두운 산길에서 부스럭 소리에 잔뜩 긴장하다 다람쥐 소리인 걸 깨닫고 나오는 너털웃음이나 말끔히 정장을 빼입고 가던 신사가 갑자기 다리를 접질리며 몸이 꼬이는 걸 목격할 때 나오는 폭소처럼 말이다. 여기에 모순이 있었다. 웃음을 주려면 예상치 못한 상황, 그러니까 돌발상황이 생겨야 하는데 아내의 성질을 건들지 않으려면 돌발변수의 가능성을 최대한 차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순을 극복하려면 자로 잰 듯 완벽히 연출된 균형이 필요했다. 아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긴장만 줘야 했고, 긴장이 한계선에 근접하는 시점과 긴장을 터트리는 시점을 정확히 맞춰야 했다. <백 투 더 퓨처>에서 시계탑에 낙뢰가 내리꽂히는 시점에 드로리안이 전기선을 통과해야 하듯 타이밍이 정확히 일치했을 때만 우린 짜릿한 전율을 느끼며 과거의 추억을 안고 현재로 귀환할 수 있었다.
시나리오는 준비됐다. 아내는 이 여행을 연서를 위한 여행 내지는 우리 가족을 위한 여행이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난 철저히 아내를 위해 여행을 연출할 계획이었다. 가장 먼저 웃음을 되찾아야 하는 건 아내였고, 그래야 나와 연서도 웃을 수 있다. 연서는 당연히 중요하지만 우리 부부 사이 웃음꽃이 피어야 연서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적 여정은 연서가 가고 싶어 하는 앨커트래즈나 연서에게 도움이 될 스탠퍼드 방문이 중심이 되는 듯하면서도 아내가 마들렌 향기를 떠올리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는 곳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돼야 했다. 돌아다니며 피곤함을 느낄 때나 연서만 생각한다며 약간의 서운함을 느낄 때 아내가 좋아했던 10불짜리 치킨 샤와르마 캄보가 일품인 디쉬앤대쉬에 간다 거나, 15분 하이킹으로 실리콘밸리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헌터스 포인트 언덕에 올라 추억 샘을 자극해 주는 거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난 펜대를 잡고 일필휘지로 일정표를 써 내려갔다.
샌프란시스코 여행 일정
첫째 날은 전초전이다.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가게 될 첫 목적지는 가로수길을 연상시키는 산타나 로우. 일렬로 늘어선 팜트리와 유럽식으로 낮고 아기자기한 건물이 즐비한 길을 따라가면 끝자락에 웨스트필드 몰이라는 커다란 복합쇼핑센터도 있다. 한가로운 주말엔 이곳에 들러 상점가를 거닐곤 했다. 딱히 필요한 것도 없으면서 크레이트앤배럴에 들어가 가구와 소품들 보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새로 나온 브레빌 에스프레소 머신을 만지작거리거나 아카시아 나뭇결을 매끈하게 살려 낸 원목 장식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진열대에 비친 모든 사물과 지나치는 사람들, 그리고 화단을 가득 메운 야생화마저 눈길을 끌었다. 첫째 날은 그렇게 추억의 청취만 살짝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거다.
둘째 날은 트로이의 목마 같은 날이다. 메인 일정은 아웃렛으로 잡았지만 아웃렛은 페이크다. 맥거핀 효과를 위한 일종의 장치라고나 할까? 아내는 이번 여행에 아웃렛을 가자고 했다. 연서 폴로셔츠와 크록스 신발 따위를 싸게 사기 위해서겠지만 본인도 아이쇼핑 정도는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려면 프라다나 아르마니 같은 명품매장을 갖춘 리버모어 아웃렛이 제격이다. 하지만 난 산호세 인근에 있는 그레이트 몰 아웃렛으로 갈 예정이다. 아내는 다소 실망하겠지만 우리가 실제로 살 만한 브랜드는 다 있어 문제없다. 쇼핑은 이른 오후쯤이면 끝날 테고 점심은 인앤아웃에서 간단히 해결한다. 호텔에 돌아와 약간의 아쉬움을 느낄 때쯤 서니베일 일대와 마운틴뷰 다운타운에서 진짜 일정이 시작된다.
서니베일은 우리가 실리콘밸리에서 처음 정착했던 곳이다. 우린 20평이 채 안 되는 원 베드룸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비좁은 아파트에서 티격태격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은 즐겁기만 했다. 뭘 해도 큐피드가 뇌간에 화살을 쏘아 대며 도파민이 흘러넘치게 하니 미소와 황홀감이 멈추질 않았다. 퇴근 후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동네 한 바퀴를 돌 때면 한가로운 일상의 풍경마저 어떤 고결한 정신에 의해 승화되고 릴케나 셸리의 시가 삶으로 들어온 듯 벅찬 감동을 줬다. 그런 감동이 자연스레 얼굴에 미소를 만들었고 우린 문득 서로의 얼굴에 그려진 미소를 보며 손깍지를 꽉 끼고 입을 맞추곤 했다. 세상엔 우리 둘뿐이었고 우린 새하얀 캔버스에 스케치를 하고 색을 입혀 우리만의 세상을 그려 갔다. 그 그림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거다! 저녁 식사를 위해 마운틴뷰 다운타운에 갈 때 난 모른 척 우회하며 그 아파트 단지를 지나갈 계획이었다. 우연히 눈에 띈 단지를 보며 옛 생각이 난 듯 스르르 차를 댈 생각이다. 아내와 함께 라벤더 가득 핀 그 길가를 걸으면 그때의 입맞춤이 절로 떠오르지 않을까?
그러곤 마운틴뷰 다운타운이 있는 카스트로 거리를 향한다. 주차하고 중심부를 향해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면 처음 눈에 띄는 건 ‘카스칼’이다. 씨푸드 파에야가 일품인 스페인 음식점이다. 연서를 낳고 뭐 하나 먹고 싶다고 한 적 없던 아내가 문득 해산물이 먹고 싶다고 했을 때 왔던 곳이 카스칼이었다. 아내와 번갈아 교대하며 밤새 연서를 돌보다 하는 첫 외식이기도 했다. 우린 너무 힘들어 밥만 먹었지만 그때 그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카스칼은 옐프에서 예약 창이 열리자마자 6시 반으로 예약해 두었다.
셋째 날 흐름도 둘째 날과 비슷하다. 오전에는 쿠퍼티노 애플 본사에 있는 애플 스토어를 가고 마운틴뷰 구글 본사 캠퍼스에 들러 알록달록한 구글 자전거도 한번 타 볼 참이었다. 그러곤 팔로알토로 향한다. 연서를 위해 스탠퍼드 캠퍼스를 보여 주고 책방도 들를 예정이었다. 캠퍼스 주위를 돌아보며 스티브 잡스가 자주 가던 프레슈 요거트 집에서 그릭 요거트를 먹고 마크 저커버그와 마주쳤던 소공동 순두붓집 얘기를 늘어놓으면 연서는 얼마나 신기해할까! 하지만 마무리는 역시나 아내가 베이 에어리어에서 가장 좋아하던 스탠퍼드 몰로 할 예정이다. 그렇게 셋째 날이 마무리된다. 시나리오 도입부는 끝났다.
시나리오 도입부가 밀당을 통해 긴장감과 기대감을 고조시키는 단계였다면 이제 중반부를 거쳐 클라이맥스를 준비할 차례다. 그게 넷째 날이다. 넷째 날엔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점심을 먹고 차가 막히기 전 일찌감치 출발하면 오후 2, 3시쯤 도착할 거다. 101번 고속도로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올라가다 공항 근처 뉴 잉글랜드 랍스터 마켓에서 점심을 해결할까 생각 중이다. 랍스터 챠우더와 랍스터 롤 세트가 점심으론 딱이다. 아, 랍스터 챠우더를 빅 사이즈로 업그레이드하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체크인하고 짐을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초저녁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 가벼운 차림으로 피어39까지 산책하고 저녁을 먹을 예정이었다. 감정은 점점 고조된다. 청상한 바닷바람이 은은한 바다 냄새를 나르고 까치놀을 배경으로 울긋불긋 피어나는 야경을 보면 감상에 젖어들 수밖에 없다. 해산물 냄새가 나면 피셔맨스 워프, 진한 코코아 파우더 향이면 샌프란시스코 초콜릿 가게, 시큼한 발효 빵 냄새가 나면 부딘 비스트로를 지나고 있을 거다. 우리가 자주 갔던 이탈리아 골동품 가게에 들러 상아로 만든 체스 조각이나 실물만큼이나 큰 청동 말 조각상도 보고, 옆에 있는 아트 갤러리에서 무라카미 다카시나 도리 르빈스타인의 알록달록한 조형물 작품도 본다. 모른 척 아내 어깨에 손을 올리면 추위를 잘 타는 아내는 서늘한 바닷바람을 탓하며 내 품에 쏙 들어올 거다. 밤은 활기차면서도 아늑하고 고향에 온 것처럼 포근하다. 그렇게 밤과 함께 여행의 유희도 무르익는다.
그러곤 다섯째 날. 준비는 끝났다. 이제 클라이맥스를 향해 질주할 타이밍이다. 왜 5일차에 벌써 클라이맥스냐고 묻는다면 그건 스토리텔링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모름지기 플롯이란 시간의 흐름과는 다르다. 플롯은 의식의 흐름이고 거기엔 회상이나 상상 같은 새로운 시간 축이 끼어들고 사건의 중요성에 따라 시간지연 현상 같은 게 경험되기도 한다. 이번 여행에선 초반에 감정적 농도가 짙은 여행지가 많아 그만큼 느리게 시간을 경험하도록 디자인됐다. 초반에 행복했던 옛 추억과 현실을 되돌아볼 사건을 집중시켜 그 사이에서 긴장을 지속적으로 고조시키려는 의도다. 긴장은 5일 차에 클라이맥스에 달하고 그 후론 긴장이 풀어지며 긴 여운을 남기듯 나머지 여정을 마치게 된다. 긴장이 풀어지면 더 이상 스토리는 존재하지 않고 행복만 경험하게 된다. 그게 의도된 시나리오였다.
클라이막스를 연출하기에 뮤어 우즈 국립공원만큼 적합한 장소는 없었다. 아내와 내가 처음 뮤어 우즈에 갔던 건 미국 결혼식 날이었다. 결혼식이라고 하지만 이미 한국에서 본식을 마치고 미국에 온 터라 혼인신고만 하면 됐다. 산타클라라 카운티 법원에 서류를 제출하고 증인 앞에서 혼인 선서 절차를 진행했다. 반바지에 폴로 티를 걸치고 가벼운 스니커즈 차림으로 결혼식을 하자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스크루지 분위기가 나던 판사는 형식적으로 절차를 진행했고, 증인으로 당일 법원에서 중개해 준 할머니는 증인석에 앉아 우릴 지켜봤다. 목화 향이 풍기는 진회색 망토를 걸치고는 ‘좋을 때다’라고 온화한 눈빛으로 말해 줬다. 조잡한 조화로 장식한 아치형 정자 앞에서 결혼사진까지 찍은 우리는 곧장 신혼여행에 나섰다. 그때 행선지가 뮤어 우즈 국립공원이었다.
결혼식은 별 볼 일 없었지만 뮤어 우즈에선 나름 이벤트를 준비했다. 뮤어 우즈엔 커다란 세쿼이아 나무줄기 단면에 타임라인을 만들어 놓은 조형물이 있다. 나이테를 따라 901년 나무의 탄생부터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 1776년 미국 독립, 1901년 벌목에 이르기까지 1,000년간 연대기를 수록한 조형물이다. 조형물은 뮤어 우즈 방문객 센터에 전시되어 많은 이들에게 주목받는데, 아무도 모르는 건 파운더스 그로브에서 카노피 뷰 트레일을 따라 산을 오르고 다시 오른쪽 샛길로 빠져 미로 같은 자드락길을 지나면 나무를 벌목하기 전 둥치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조형물의 데칼코마니 형제처럼 1,000개의 나이테를 가진 나무 둥치는 양치류와 이끼로 뒤덮인 표토를 뚫고 땅속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다.
난 우리가 결혼 전 함께 했던 10년을 1,000개 테두리에 맞춰 타임라인으로 만들었다. 가장 바깥쪽 나이테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소개팅 자리가 있고, 그 후로 3년간 오빠 동생으로 만났던 추억이 있다. 사귄 후로 아내가 미국 유학을 할 때 난 한국에 있었고, 내가 MBA를 할 때는 아내가 한국에 있었다. 미국은 오른쪽, 한국은 왼쪽으로 표시해 놓으면 우린 어떤 시구처럼 컴퍼스의 양 끝이 되어 나선의 원을 그리며 떨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나이테 정중앙에 도달한 그날 우린 하나의 점이 된다. 나는 이 스토리를 얘기하기 위해 10개의 팻말을 준비했다. 아내와 함께 그 나무 둥치에 간 나는 팻말을 나이테에 붙여 가며 지난 10년간 우리 얘기를 펼쳐 보였다. 아내는 커다란 나무 둥치 위의 나이테와 팻말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며 나무가 꼭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뿌리를 통해 깊이를 알 수 없는 땅속 깊은 곳까지 연결되는 것 같다며 신기해했다.
뮤어 우즈를 다시 찾은 건 정확히 3년 후였다. 연서는 태어난 지 3개월이 됐고 아내는 줄곧 떠나고 싶다는 말을 하며 연서와 함께 한국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돌아가기 전 미국 결혼기념일을 맞이해 무언가 이벤트를 해주고 싶었다. 연서가 태어난 후로 우린 번갈아 가며 밤새 우유를 덥히고 우는 연서를 달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쩌면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게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친 기억만 안고 아내를 보낼 순 없었다. 회사 동료 집에서 일하던 보모에게 연서를 맡기고 우린 연서가 태어난 후 처음 둘이 함께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아내는 가는 내내 연서 얘기를 꺼내며 불안해했지만, 막상 뮤어 우즈 숲에 들어서자 마법처럼 기분이 풀어졌다. 그날따라 눈에 띄는 등산객도 없어 온 숲이 우릴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했다. 우린 3년 만에 나무둥치를 다시 찾았다. 나는 나이테 중앙을 짚으며 여기가 오늘이라고, 연서가 태어난 해, 우리가 가족이 된 기념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이테를 따라가며 앞으로 10년간 펼쳐질 우리 가족 이야기를 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포근하고 따뜻한, ‘그 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던 것 같다.
이야기는 우리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어니스에서 저녁 식사를 할 때도 계속됐다. 아내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얘기를 들어 줬고 이따금 벨벳 커튼이 드리워진 창밖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바닐라 크렘 브륄레와 초콜릿과 캐러멜 향미 가득한 카페오레로 디저트까지 여유롭게 마무리한 우리는 맥키트릭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지금은 화재로 소실됐지만 빅토리안 스타일의 화려하고 낭만적인 정취가 있는 호텔이었다. 창밖으론 샌프란시스코 베이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고 시원한 바람과 바닷냄새가 창 틈새로 스며들었다. 저녁과 곁들인 와인 때문인지, 포근히 달아오른 황금빛 백열전구 때문인지, 아내 얼굴은 붉게 상기됐다. 연서가 태어난 후 처음이었다. 지난 3개월 간 우리 마음을 걸어 잠갔던 빗장은 날아갔고 얼음장 같던 냉기는 농밀한 열기로 피어나 우릴 감싸안았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최음제에 취한 듯 서로를 마주 봤다. 그러곤 화려히 밤을 불태우며 운우지락을 즐겼다.
내 기억 속 그날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눈 날이다. 그 후로 동침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날 이후 아내는 왠지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했다. 떠먹여 주는 밥도 먹기 싫다며 투정부리는 아이처럼 가만히 있거나 죄악을 목격한 수녀가 성호를 긋듯 거부감을 표했다. 그래서 그런지 잠자리는 억지스러운 이벤트가 되어 버렸다. 어쩌면 그날의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끔, 난 그녈 보면서도 예전의 그녀가 그리울 때가 있다. 뮤어 우즈에 간다면 그때 그 감정들이 새록새록 살아나진 않을까?
눈을 감고 상상해 봤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백미터가 넘게 자란 거목은 다시 봐도 가슴 벅찬 장관이다. 울울창창한 레드우드 숲을 처음 보는 연서는 두 눈을 번쩍 뜨고 시선을 떼지 못할 것이다. 레드우드는 태평양에서 밀려든 안개를 흠뻑 들이마시곤 청쾌한 숲의 향을 내쉰다. 촉촉이 젖은 땅에서는 이끼 냄새와 흙내가 풍기고 그 사이사이 앵두 같은 월계수 열매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숨을 쉬기만 해도 정수리 혈관까지 시원하게 샤워하는 기분이다. 우린 레드우드 둥치를 찾아간다. 그러곤 손을 마주 잡고 나이테 위로 올린다. 동그란 나이테를 따라 마법처럼 시간이 되돌아간다. 우린 촉촉해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연서는 그런 우릴 신기한 듯 쳐다본다. 드라마를 보며 숨을 죽인 채 ‘키스해, 키스해’라고 소리 없이 응원하듯 몰입해 있다. 우리가 살며시 입을 맞추면, 연서는 박수와 함께 꺅 소리를 지른다. 난 반사적으로 그녀를 끌어당기고 그녀는 나에게 안긴다. 가장 사랑하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의 추억이 물밀듯 밀려온다. 우린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가 뜨겁고 깊게 키스한다.
그게 시나리오의 클라이맥스였다.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순간 이번 여행의 목적은 달성된다. 그러곤 ‘그 후로 영원히’로 이어지는 동화처럼 여행의 나머지 4일간의 여정이 마무리된다.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활보하고, 연서가 가고 싶어 하던 앨커트래즈도 간다. 수려한 경관이 시시각각 펼쳐지는 1번 국도를 따라 하프문베이로 드라이브를 하고 나파밸리와 소살리토까지 가게 되면 여행은 끝난다. 마지막 밤이 되면 연서는 집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쓸 거고 아내와 난 그런 연서를 보며 흐믓한 미소를 짓고는 서로를 마주 보며 입맞춤할 거다. 계획은 완벽했다.
“여행 일정은 다 짠 거야?”
아내의 쪼뼛한 목소리가 달콤한 몽상을 작파했다. 당연히 일정은 다 짰다. 웬만한 일정 같으면 이것저것 물어보며 정하겠지만 이번 일정은 그럴 필요도 없이 완벽했다. 아내는 영화관 프리미엄 석에 앉은 듯 의자에 기대 온전히 스토리를 즐기기만 하면 됐다. 아내는 내가 이 일정을 기획하려고 얼마나 많은 요소를 분석했는지 알기는 할까? 뭐, 상관은 없었다. 이걸로 아내와 연서가 즐거워할 수 있다면, 아내가 잃어버린 미소를 찾고 그 모습을 보며 내가 행복해할 수 있다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어, 대략.”
“난 어디든 가도 상관없어. 연서가 앨커트래즈 보고 싶다 그랬으니까 거긴 꼭 가고. 우리가 같이 여행가는 게 중요한 거지 어딜 꼭 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제발 힘들게만 하지 말아줘.”
“힘들게 돌아다니진 않을 거야. 많이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산호세하고 샌프란 가는 거니까.”
“그래, 이번엔 정말 한번 믿어 볼게.”
은근히 비꼬는 듯한 말투에 오기가 생겼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진짜 보여 주겠다. 제대로 한 번 감동시켜 주겠어. 눈물이 펑펑 쏟아지도록 말이야. 어떤 여행을 상상하건 믿지 못할 경험을 하게 해 주겠어, 그렇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