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샌프란시스코로
“우리 어디로 가? 2시간이나 남았는데.”
아내는 공항에 너무 일찍 왔다는 듯 심통스레 말했다.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서두른 건 본인이었으면서 말이다. 단순히 있을 곳을 찾자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비즈니스라면 라운지라도 갔을 거라고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비즈니스로 알아보긴 했었다. 우선 보너스 항공권을 찾아봤다. 왕복 12만 5천 마일. 출장을 다니며 아름아름 쌓아 놓은 마일리지가 50만 마일이었다. 비행기로 생색은 좀 낼 수 있겠구나 하고 기분이 좋아지려는 찰나 ’잔여석 0석‘이 눈에 들어왔다. 비즈니스 보너스 항공권은 연말까지 모조리 만석이었다. 현금으로 사야 하나 하고 비행기 요금을 검색한 순간 입이 떡하니 벌어질 뻔했다. 가격은 왕복 500만원. 3명 가족 항공권이 아니라 1명 가격이었다. 결국 왕복 7만 마일로 일반석을 샀다. 어차피 여행을 가는 게 중요한 거지 내 돈으로 비즈니스석을 산다는 건 가당치 않았다.
”비즈니스 3명이면 천오백이야. 차라리 그 돈 아껴서 호텔 좋은 데로 하고 맛있는 거 먹자.“
난 멋쩍은 마음에 그리 말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위기를 넘겼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
아내가 다시 물었다. 비즈니스는 아니었지만 라운지에 못 갈 이유는 없었다. 항공사 멤버십 덕에 나와 동행인 1명까지는 무료였고 한 명이 더 들어가려면 4천 마일을 공제해야 했지만 말이다. 마일당 50원이라 치면 2만 원이 넘는 거다. 이렇게라도 막는 게 어딘가 하고 생각하며 라운지 체크인을 마친 순간 생각지 못한 복병을 만났다.
“연서 엄마?”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선글라스로 얼굴을 반쯤 뒤덮은 여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지욱이 엄마. 학부모 모임 때마다 음식값을 계산하는 사람이 있다고 아내가 말했다. 집에 돈을 쟁여 놓고 살고 여행을 자주 가는데 검소하게 퍼스트 클래스가 아니라 비즈니스만 타고 다닌다고 했다. 아내는 살갑게 인사를 나눴고 연서는 지욱이와 시크하게 아는 척을 하고는 아내 옆에 섰다. 수다 떠는 두 여자 너머로 지욱이 아빠가 보였다. 날렵한 무채색 트레이닝복 차림에 포인트를 준 듯한 화려한 발렌시아가 운동화, 단정히 그루밍한 수염까지 소위 말하는 ‘올드머니’의 부골스러운 위압감이 느껴졌다. ’패밀리 비즈니스‘를 하면서 수억 대 법인차를 몰고 무슨 일을 하는지 오전 10시건 오후 2시건 학부모 모임에는 꼬박꼬박 아빠가 직접 참석한다고 했다. 연서와 같은 학원을 다녀도 기사가 데려다주기 때문에 직접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그는 나를 알아봤는지 예의 바른 미소를 띠며 눈으로 인사했고 나도 별생각 없이 인사만 받고 빈자리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문득 한 시간 후 상황이 떠오르며 머리가 쭈뼛 솟아올랐다. 함께 라운지에 있을 때만 해도 우린 동급이지만 결국 운명은 갈린다. 비행기에 오를 때 우린 방향을 틀어 이코노미석 입구로 가야 할 테고 그런 우릴 보며 지욱이네 식구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뻔하다. 설상가상으로 연서까지 우린 왜 입구가 다르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젠장, 라운지를 나가선 최대한 피하는 수밖에 없다.
지잉, 지잉, 지잉.
라운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는데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하마터면 전화해 드리는 걸 깜빡 할 뻔했다. 오늘 출국이라고 일주일 전에 얘기 드렸는데 그걸 기억하시고 연락하셨나 보다.
”네. 오늘 출국이에요. 괜찮아요. 미국에 한두 번 가는 것도 아니고. 근데 목소리는 왜 그러세요? 감기예요? 요즘 감기 유행이라 조심 좀 하시라니까. 네, 갔다 와서 연락드릴게요.“
”어머님이셔?“
연서와 함께 자리로 찾아온 아내가 전화하는 날 보며 바꿔 달라는 듯 물었다. 난 끊으려던 참이라 손짓으로 그냥 앉으라고 했다.
”끊은 거야? 난 전화 안 드려도 돼?“
”어, 내가 통화했으니까 괜찮아.“
”얘기는 잘 드린 거지? 우리만 가는 거니까 갔다 와서 전화해 드리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이런 것까지 눈치를 봐야 하니, 정말.“
”눈치 볼 게 뭐 있어? 연서 여기저기 보여 주러 가는 건데.”
“그런다고 눈치가 안 보여? 어머님 그런 걸로 은근히 압박 주시는 거 몰라?”
“압박은 무슨 압박이야.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되지.”
“당신이야 어머님 귀한 아드님이시니까 모르시겠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돋아 있다고.”
“여하튼 얘기 드렸으니까 전화할 필요 없어.”
아내는 입을 삐쭉 내밀고는 연서와 먹을 걸 가지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아내가 가져온 건 고작 바나나 2개였다. 2만 원이나 주고 들어왔는데 고작 바나나 2개라니.
“뭘 그렇게 봐?”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욱이네가 있던 자리를 힐끔 쳐다보는 날 보며 아내가 물었다. 비행기 보딩은 시작됐고 지욱이네는 자리에 없었다. 한 10분 정도 있다가 게이트로 가면 마주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화장실에 한번 갔다 오면 딱 맞을 타이밍이었다.
“아니, 그냥.”
“지욱이네는 LA로 가. 아마 벌써 갔을 걸.”
“아, 그래? 근데 그 말을 왜 해?”
“지욱이네 있나 보는 것 같아서.”
“내가 왜?”
“아님 됐고. 같이 안 가는 게 다행이지.”
난 ’보딩 시작했어‘라고 말하며 서둘러 짐을 챙겼다. 다행이었다. 최소한 비행하는 내내 비즈니스석에서 편하게 가고 있을 누군가와 나 자신을 비교하며 불행해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제리 맥과이어>에서 도로시가 한 말이 맞다. 비즈니스석은 음식만 다른 게 아니다. 삶의 질이 다른 거다. 몇백만 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걸 여행 한 번에 턱 하니 쓸 수 있다는 건 다른 생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상대성에도 정도라는 게 있다. 예를 들어 대기업 월급과 중소기업 월급에 차이가 있을 거고, 부장 월급과 과장 월급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 임원이 된다해도 여전히 월급쟁이는 월급쟁이일 뿐이다. 내 돈으로 가는 가족여행에 이코노미석이 아니라 비즈니스석을 영화표 사듯 살 수 있으려면 본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건물이 있거나, 주식이 있거나, 월급쟁이로는 평생 모아도 벌 수 없는 돈이 있어야 그렇게 살 수 있다. 이번 생에 그런 삶을 누리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 회사에서 승승장구하고 상무에 부사장까지 된다 해도 말이다. 현실을 들춰 보면 위로 올라가기는커녕 제 자리에 서 있는 것도 힘들다.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월급이 끊기는 순간 우리 가족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는 자이언티의 <양화대교> 가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륙 때 낮아진 기압에 잠깐 눈을 붙였다 떠 보니 연서는 아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 있었다. 아내는 표정을 잔뜩 찡그린 채 조붓이 팔짱을 끼고 모니터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어폰도 꽂지 않고 말이다. 한 번씩 긴 한숨을 내뱉었고 눈을 찡그리며 연서가 기댄 어깨로 고개를 돌리곤 했다. 옴칠 닭살이 돋았다. ‘나 엄마 옆에 앉을래’라고 창가에 자리 잡은 연서가 말했더라도 아내에게 복도 쪽에 앉으라고 권했어야 했다. 찰나의 안일함이 이런 위기상황을 초래할 줄이야.
“자리 바꿀까?”
내가 묻자 아내는 그제야 내가 눈을 떴다는 걸 인지했는지 고개를 홱 돌려 나를 쏘아봤다. 짓부릅뜬 눈에는 그걸 왜 인제야 물어보냐는 원망이 가득했다. 중간 자리로 옮겨 앉아 움찔거리는 연서를 토닥거리는 사이 아내의 울음기 섞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폭발 직전의 활화산을 억지로 눌러 놓은 듯한 숨소리였다. 아내는 한 번씩 발작하듯 몸을 뒤틀다가 부산한 손동작으로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러곤 자리 밑에 놓인 가방을 휘적거렸다. 주황색 통에서 알약 두 알을 꺼낸 아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는 그런 아내를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연서는 눈을 찡그렸다 폈다 하며 몸을 뒤척였다. 돈이 들더라도 그냥 비즈니스석을 끊을 걸 그랬다. 앞뒤로 좌석이 빡빡히 막혀 있고 연서와 나까지 세 명이 따닥따닥 붙어 앉은 이코노미석이 아내에겐 무리였던 것 같다.
아내는, 공황장애를 앓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