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몬드비치, 빛이 부서지는 해변

by 성세윤

다음 행선지는 링로드 남부 일정 중 가장 기대가 컸던 요쿨살론과 다이아몬드 비치였다. 요쿨살론은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빙하 석호이고, 빙산에서 떨어져 나온 얼음덩어리들이 호수를 건너 해안으로 흘러가 닿는 곳이 바로 다이아몬드 비치다. 표면적만 18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호수 위로 빽빽히 떠다니는 유빙, 그리고 검은 모래사장을 따라 밀려온 얼음덩이의 풍경은 내가 인터넷에서 보았던 아이슬란드 이미지 중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장면이었다.

무엇보다도 꼭 눈으로 보고 싶었던 건 검은 해변 위에 흩뿌려진 얼음 조각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얼음덩어리 하나하나가 마치 보석처럼 빛을 머금고 있는 그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래서 다른 일정들이 대부분 즉흥적이었다면, 이곳만큼은 계획적으로 접근했다. 이틀을 온전히 비워두었고, 얼음동굴 투어도 미리 예약해 두었다. 일출, 일몰, 그리고 야경까지 각각 두 번씩 마주할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내가 꿈꾸던 장면들을 빠짐없이 담을 수 있으리란 기대가 컸다.

가는 내내 날씨도 점점 맑아졌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빛이 따뜻했고 마음속 기대는 그 빛만큼 밝게 부풀어 올랐다.





다이아몬드 비치에 도착한 건 정오쯤이었다. 예보에선 하루 종일 흐리다 했지만 의외로 날은 맑았다. 해는 하늘 한가운데서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고, 강렬한 햇살이 검은 모래사장을 똑바로 내려찍고 있었다. 역시 아이슬란드의 날씨는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예측불가였다.

검은 해변 위, 다이아몬드처럼 흩어진 얼음 조각들은 명불허전이었다. 거센 파도 소리와 함께 부서져 들어오는 물살과 그 위로 표류하던 유빙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해변은 바다의 거친 숨결을 받아 다채로운 형상으로 다듬어진 얼음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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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고 거친 모래와 차갑고 투명한 얼음의 대비는 선명했다. 하지만 내게 더 극적으로 다가온 건 얼음들 사이의 대비였다.

커다란 얼음덩이들은 푸른빛을 띠며 단단하고 묵직했다. 마치 빙하의 심장에서 막 떨어져 나온 듯 위엄을 품었고, 태양이 비출수록 보석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파도가 밀어 닥치면 수분을 머금고 더욱 투명하게 내부의 결정을 드러냈지만 꿈쩍도 않고 자리를 지켰다.

반면 작고 여린 얼음들도 있었다. 그들은 북극 해변의 잔혹함에 저항하듯 숨을 쉬었지만, 결국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 햇살에 닳아 무너지며 푸른 빛을 잃고, 파도에 흔들리다 이내 바다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바다 위 윤슬처럼 반짝이며 마지막 빛으로 저항했다.

북극의 긴 밤을 견디고 수천 년의 압력을 버텨낸 존재들과, 반딧불이처럼 덧없이 사라지는 존재들이 같은 해변 위에서 나란히 빛났다. 크고 단단하건, 작고 연약하건, 결국 이 해변에서 모두 파도와 햇살에 몸을 녹이며 사라져 간다. 하지만 그 사라짐은 결코 헛되지 않다. 모두 자기 빛으로 생을 마감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지금 내 생명을 녹여가며 빛을 내고 있는 걸까? 내 삶은 반짝이고 있을까? 나 역시 인류라는 거대한 빛무리의 일부로 세상을 밝히는 한 조각이어야 하지 않을까?

빛나는 해변 풍경에 대한 감탄과 함께, 내 자신에 대한 다짐이 불쑥 튀어나왔다.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압도적인 풍경에 시작부터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 정도라면 일몰이나 일출의 풍경은 얼마나 더 감동적일까? 시간은 오후 두 시. 일몰까지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물론 그 사이 아이슬란드의 날씨가 어떤 변덕을 부릴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채 말이다.





차에서 잠시 눈을 붙였을 뿐인데, 세상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는 어느새 구름 뒤로 숨어버렸고,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던 해변은 얼음조각들의 공동묘지로 변해 있었다. 파도는 장송곡처럼 낮게 울렸고, 차가운 바람이 해변 위를 맴돌았다.

예보를 보니, 햇살은커녕 곧 비나 눈이 내릴 거라고 했다.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며칠째 새벽부터 쉴 새 없이 움직였고, 그만큼 피로도 깊었다. 이렇게 날씨를 핑계 삼아 하루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 내일 아침부터는 다시 맑다고 하니, 큰 아쉬움도 없었다.

해가 기운 오후, 회픈에 도착하니 하늘은 짙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밀려오는 피로에 저녁은 간단히 때우고는 바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바깥의 바람 소리가 멀게 들렸다. 파도처럼 출렁이던 하루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새벽 6시. 고대하던 다이아몬드비치의 일출을 보기 위해 일찌감치 숙소를 나섰다. 밤새 눈이 내렸는지 세상은 온통 하얗게 덮여 있었다. 주차장에는 눈이 발목까지 차올랐고, 자동차 윈드실드에도 손가락 마디만큼의 눈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


이대로 운전이 가능할까. 며칠째 눈길 사고 얘기를 접했던 터라 겁이 덜컥 났지만 일단 차를 몰아 나가 보기로 했다. 다행히 도로 상태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자나가며 보니 새벽부터 제설차량이 길을 정비하고 있었고, 금속 스터드가 내장된 타이어 덕분인지 미끄러짐 없이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라 두 손으로 핸들을 꼭 쥔 채 잔뜩 긴장한 상태로 차를 몰았다.

절반쯤 달렸을 무렵, 여명이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붉은 기운은 장막 뒤에서 맴돌 뿐 본격적으로 떠오를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낮게 깔린 먹구름이 하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차를 세우고 예보를 확인해보니, 회픈에서 출발한 구름이 다이아몬드비치 방향으로 나와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젠장. 그래도 구름이 하늘 전체를 덮은 건 아니었기에 작은 희망을 품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내 이동 속도가 구름보다 빨랐던 걸까. 다이아몬드 비치에 도착했을 때 동쪽 하늘은 아직 열려 있었다. 안개 구름에 가려 붉은 빛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금빛으로 산란되던 햇살은 해변의 얼음조각 위로 스치듯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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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구름은 금세 나를 따라잡았고, 금빛은 시시각각 옅어지더니 순식간에 구름 속으로 빨려들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기다린 다이아몬드 비치의 일출이, 그토록 바라던 장면이 이렇게 사라지는 걸까. 마법처럼 구름이 걷히길 바랐지만 해변은 점점 더 고요해졌고 차가운 아침 바람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그때, 이마에 차가운 물기가 닿았다. 하나 둘, 하얀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절망감이 스미려던 찰나 출발 전 기억이 떠올랐다. 몽롱한 상태로 짐을 싸다가 문득 물건 하나가 시야에 잡혔었다. 눈 사진을 찍어보겠다며 사두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고독스 플래시였다. 가져가봤자 꺼내지도 않겠지? 차라리 햇반 두 개를 더 챙길까 고민하다가 마지막 순간 캐리어에 던져 넣었다. 나는 곧장 차로 달려가 플래시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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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하늘을 거의 뒤덮었고 눈발은 점점 거세졌지만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얀 눈송이가 푸른 빙하와 검은 모래사장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얼음은 순백의 왕관을 쓴 듯 위엄 있는 자태로 서 있었고, 바다는 조용히 설경의 무대를 배경 삼아 물러나 있었다. 아이슬란드 해변가에서 눈사진을 찍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빙하와 해변이 어우러진 설경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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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잃은 대신, 눈의 마법이 해변을 덮었다. 햇살 아래 반짝이던 얼음들은 눈옷을 입고 오히려 더욱 고고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얼음의 차가움은 눈의 형태를 단단히 붙잡아 두었고, 순수한 결정의 모양을 그대로 간직한 눈송이들은 얼음 위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얼음의 결을 따라 자수를 놓은 듯 화려한 패턴을 만들면서도 조형물처럼 입체적인 질감을 드러냈다. 빛의 부재 속에서도 얼음은 오히려 더 또렷하게, 깊은 푸른빛을 띠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렇게 해변은 온전한 겨울 풍경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래서 삶이란 살아볼 만한 것이다. 모든 걸 놓아버리는 순간, 놀라움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것은 기쁨이 되고, 웃음이 되어, 다시 한 걸음 내딛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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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비치: Diamond Be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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