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맛있게 먹어줄 거예요.”
“친구들이 맛있게 먹어줄 거예요.”
동글동글 귀여웠던 아이가 오랜만에 떠올랐다. 나를 당황스럽게 했던 말도 함께. 다음 주 이사를 앞두고, 우리 집 물건들을 당근마켓에 하나씩 내놓고 있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는 게 귀찮지만 돌아오는 길의 쏠쏠한 용돈은 반갑다. 또 팔 것이 없나 온 집안을 뒤지다 몇 년 전에 그림책 수업에서 만들었던 서툰 그림책을 발견했다. 제목은 『꿈은 감자』
내 꿈은 ‘ ’입니다. 저는 제 꿈을 위해서 ‘ ’을 꾸준히 할 것입니다.
다른 3학년 아이들은 빈칸을 그럴듯하게 채워왔다. 구독자 100만 유튜버도 있고, 야구 선수도 있다. 장래희망 단골손님인 의사, 변호사도 물론 있다. 구독자 100만 유튜버가 되기 위해서 이틀에 한 번씩 영상 올리기. 의사가 되기 위해 매일 공부를 열심히 하기. 그래, 그래. 맞는 말이지. 슥슥 수행평가지를 무심하게 넘기다가 내 꿈은 ‘감자’라고 쓴 것을 발견했다.
도덕 수업이었다. 내 꿈을 위해 일주일 동안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수행평가인데, 감자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한단 말인가. 수행평가지의 주인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포슬포슬 동그랗고 뽀얀 감자 같은 아이였다. 눈만 마주쳐도 내 입꼬리가 먼저 올라갔다.
“꿈이 감자야?”
“네.”
“감자가 돼서 뭐 하게?”
“친구들이 맛있게 먹어줄 거예요.”
“오오……. 그렇구나!”
이미 웃고 있었는데, 그 대답에 한참을 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감자가 되는 건 어려우니까 농부로 하자, 집에서 감자나 식물 기르는 걸로 하자, 하고 학습지를 고쳐줬다. 내 글씨가 새로 적힌 학습지를 들고 아이는 자리로 돌아갔다.
당황스럽고 귀여웠던 그 대화는 집에서도, 그 아이와 헤어진 뒤에도 문득문득 생각났다. 자꾸 아쉽고 미안했다. 내가 너무 낭만 없이 쉽게 아이 생각을 고쳐버린 것 같아서. 좀 더 물어볼 걸, 무슨 얘기인지 더 들어 볼걸.
그런 마음으로 만들었던 그림책이었다. 같이 감자로 맛있는 걸 만들어 먹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 무슨 마음이었을까? 내가 농부로 김새게 만들기 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림책을 만들고 나서 꿈이나 장래희망을 묻는 일이 조심스러워졌다. 꿈 혹은 장래희망이라는 말속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 꿈, 장래희망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없다거나, 모른다는 아이들이 많다. 대신 좋아하는 것을 물어보면 다르다. 나는 예상하지도 못한 것들이 아이들 입에서 술술 나온다. 마치 질문받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지난 금요일 미술 시간에는 나만의 책가도 만들기를 했다. 조선시대의 책가도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나를 상징하는 것들로 내 책꽂이를 표현해 보는 수업이었다. 한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두 시간이 되어도 아이들은 책꽂이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족사진과 반려동물 용품도 보이고, 좋아하는 스펀지밥 캐릭터로 가득 채운 책꽂이도 있다. 좋아하는 게임의 마크, 피아노와 야구 배트, 파릇파릇한 식물들…….
책가도 채우기에 빠져 있는 아이들은 즐거워 보였다. 친구들과 얘기하다 “아 맞다, 그것도 있지.” 하고 새로 더 그려 넣기도 하고, 더 좋아하는 것을 그리려고 원래 있던 것을 지우기도 한다. 내년에도 같은 활동을 하면 아마 이 책가도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들을 이것저것 해보고, 싫증 나면 그만두기도 하고. 그런 설왕설래 속에서 어쩌면 꿈과 비슷한 것들이 조금씩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포슬포슬 감자가 꿈이었던 아이는 지금쯤 고등학생이 되었을 것 같다. 꿈이 감자였던 걸 기억하고 있을까? 그때 못한 이야기를 다시 나눠보고 싶다. 이번에는 감자를 내 마음대로 바꿔버리지 말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가만히 듣고 싶다. 감자 말고 또 요즘 좋아하는 것, 관심 있는 것,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한 아이의 세상은 좁은 꿈에 들어가기엔 넓고 또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