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마지막 통지표를 나눠주며 하고 싶은 말
언젠가 뇌과학 책에서, 하루 동안 뇌에 쌓인 노폐물이 밤사이 수면을 통해 사라진다는 글을 읽었다. 뇌 안 어디에 쌓였다가 어디로 사라지는지는 몰라도, 나는 몇 번이나 푹 자고 일어난 아침에 그 말이 진짜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퇴근하고 나면 학교 일을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퇴근하고 나서도 붙잡고 고민해 봐야 답은 떠오르지 않고 괴로울 뿐이다. 다음 날 아침 노폐물이 씻겨나간 맑은 정신으로 컴퓨터 앞에 앉으면 혹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결국 해결될 일들은 해결된다. 그래도 예외적으로 퇴근 후 학교 일을 떠올릴 때가 있다면 달릴 때다. 나만의 비과학적인 추측이지만 달릴 때는 뇌의 노폐물이 잠깐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뛰다 보면 안개 낀 머리를 비집고 좋은 해결책이 나오기도 한다.
달릴 때 고민하는 것은 책상에 앉아서, 침대에 누워서 고민하는 것과 다르다. 헉헉거리면서 뛰다 보면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날아간다. 감정들에 쌓여서 보이지 않았던 괜찮은 아이디어가 드러난다. 내일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통지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등학교 마지막 통지표를 받는 6학년 우리 반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고민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한 해를 잘 보냈다고, 수고했다고 뻔한 말을 하면서 통지표를 나눠주자니 마음이 답답했다. 졸업을 앞두고 날뛰는 아이들에게 하루, 한 시간이 멀다 하고 화만 냈는데 갑자기 훈훈한 마무리를 하려니 나부터가 어색했다. 그러다 떠올랐다. 대상주 홍라가.
대상주 홍라. 무슨 암호 같은 이 두 단어는, 6학년 2학기 국어 마지막 차시의 제재글 제목이다. 『나는 비단길로 간다』라는 책의 초반 한 장이 여섯 페이지의 제재글로 엮여있는데 이 제재글이 참 묘하다. 발해의 무역상을 다룬 역사소설이라 짧은 여섯 페이지에 어려운 말이 많이 나온다. 우선 대상주 홍라라는 제목부터 난감하다. 큰 상단의 주인, 즉 대상주 역할을 하게 된 홍라라는 열세 살 여자아이가 그려지지 않는 아리송한 제목부터 아이들은 글을 읽을 전의를 잃었다. 게다가 여섯 페이지 제재글에는 기승전결이 없다. ‘기’만 있을 뿐이다. 홍라는 금씨 상단의 대상주인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교역을 떠났다가, 풍랑을 만나 어머니를 잃는다. 이 일로 비단 천오백 필의 큰 빚을 얻게 되고 어머니를 이어 상단의 대상주가 된다. 대상주 홍라는 어린 나이지만 장안으로 가서 물건을 팔 계획을 세우고 함께 떠날 동료를 모은다. 쿵쿵쿵쿵, 떨리는 가슴으로 이 모험을 시작을 하려는 순간에 제재글은 끝난다.
어려운 단어의 뜻을 헤쳐가면 읽었는데 어이없는 순간에 끝나는 글. 교과서 집필진이 제재글을 참 이상한 걸 골랐다 싶었는데 아이들이 써온 독서감상문을 읽고 대상주 홍라가 졸업 직전, 바로 이 타이밍에 등장한 이유를 알았다. 본인의 경험과 비교해서 독서감상문을 썼는데 홍라처럼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서 성공을 경험했던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일본 여행에서 기지를 발휘해 길을 찾은 아이, 야구공 송구 연습을 익숙해질 때까지 한 아이. 그렇다면 초등학교 졸업식을 이틀, 중학교 입학식을 두 달 남긴 지금은 그런 크고 작은 도전을 발판 삼아 용기 있게 더 큰 도전을 하기 딱 좋은 때가 아닐 수 없다.
남들 다 가는 중학교일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중학교는 교복을 입어야 하고 어려운 시험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미지의 세계일 것이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지금 용기보다 더 필요한 게 무엇일까. 낯선 것도 부딪히다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니 새로운 상황, 사람에 당황스럽더라도 용기 가지고 도전해 보라는 말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뛰다 보니.
다 뛰고 나서 헬스장 밖으로 나왔는데 1월 밤의 공기가 그렇게 차가웠다. 피부로부터 냉정이 정해지고 나니 요새 내가 예민하긴 했다는 것을 인정할 이성도 돌아오고. 너희를 가르친 건 처음이라 선생님도 헤매고 후회하는 순간이 있었으니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할 여유도 생기고. 집에 오니 예전에 유튜브 영상으로 봤던 이옥섭 영화감독의 말도 생각난다. 너무 미운 것들은 사랑해 버리라는. 나를 정말 고민하게 했던 한 해, 아이들. 미워하는 감정을 갖고 앞으로 남은 이틀을 마무리하면 결국 괴로운 건 나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을 갖고 있는 나. 너무 미우니 나와 한 해를 함께 한 이 아이들을 사랑해버리고 더 큰 도전을 하게 잘 보내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