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화성인, 독일인은 금성인
독일의 역사와 에피소드
150년의 짧은 역사, 하지만 왜 세계는 독일의 역사에 주목하는가?
중세시대 과연 독일은 존재했을까?
독일의 지역 균형발전은 중세부터 이루어졌다
비스마르크와 독일의 탄생
좌우가 분간되지 않는 독일의 정치
독일을 멸망으로 이끈 인물, 히틀러
독일의 유대인 박해 어디서 기원한 것인가
손자끼리의 전쟁 1차 세계대전
소련은 독일이 만들었다?
라인강의 기적은 소련의 작품?
예정된 참사, 2차 세계대전
독일인도 잘 모르는 독일의 귀족사회
터키와 독일, 왜 독일에 터키인이 많을까?
베를린, 유럽의 수도 세계도시로 부활하나?
독일과 프랑스, 불구대천의 원수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로
독일의 통일은 준비된 통일일까
두려움의 대명사, 나치, 부활의 기회를 맞이하나?
공포의 독일에서 희망의 독일로
생존과 공존을 위한 선택 EU 삐걱거린다
실질적 독일의 역사는 150년, 하지만 세계는 왜 독일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가?
독일의 역사를 천여 년 전 신성로마제국의 건국에 맞추는 역사학자들도 있으나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형태가 나타난 것은 1871년 1월 1일 빌헬름 독일 초대 황제와 비스마르크 수상이 독일제국을 건국한 날을 우리가 아는 독일의 건국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하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Deutsches Reich(독일제국)이라는 국가명은 1871년, 25개 독일에 흩어져 있는 독립국가들의 제후들이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모여 통일독일을 선포하면서 탄생한 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독일 개국이 프랑스 파리에서.. 왜? 의문이 생긴다. 독일제국의 탄생을 왜 프랑스 파리 근교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선포하였을까? 당시 프랑스에서 독일 제후국 연합에 궁전을 임대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당시 프로이센의 실세인 비스마르크 수상과 독일제국 초대 황제인 빌헬름 1세는 무력으로 프랑스 파리를 점령하고 독일의 24개 국왕들과 제후들을 베르사유 궁전에 집결시켜 독일의 통일을 선포한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의 동서독 통일을 독일인들은 그런 이유에서 통일(Vereinigung)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재통일(Wiedervereinigung)이란 단어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독일제국의 건립은 유럽의 맹주로 군림하던 프랑스의 자존심에 씻기지 않는 상처를 주어 1차 세계대전의 시한폭탄 역할을 했다는 점도 기억하여야 한다.
세계 여러 나라들은 비교적 짧은 독일의 150년 역사에 대하여 관심이 높다. 이유는 2천만 명이 사망한 1차 세계대전, 6천만 명이 사망한 2차 세계대전의 주역을 맡은 나라가 독일이기 때문이며, 그 외에도 독일이 자랑하는 문장가인 괴테, 쉴러, 헤르만 헤세, 귄터 그라스,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막스, 헤겔, 독일 철학의 선구자인 프로이트, 주옥같은 클래식 작곡가와 음악가인 베토벤, 바그너, 헨델, 브람스, 모차르트 기독교의 탄생을 알린 마틴 루터 모두 독일어를 모국어로 쓰던 사람들이기에 많은 한국인들이 독일 문화에 관심을 가진다.
또한 이제는 미국에 추월당했지만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노벨상 수상자 최다 배출 국가가 독일이었고, 내연기관, 자동차, 컬러 TV, MP3플레이어, 상대성이론, 디젤엔진, 휘발유 엔진, 군사용 미사일, 제트기 등 현대에도 사용되는 많은 기술들이 독일 과학자들에 의하여 발명되었다.
세계인들은 뛰어난 문화예술, 과학기술, 지성과 합리적 사고를 가졌다고 판단되는 83백만의 민족이 2번이나 세계를 파멸시킬 뻔 한 원흉이다 보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중세시대 과연 독일은 존재하였을까?
독일이라는 나라가 실질적으로 현재의 근대국가 형태를 갖춘 것은 언급한 바와 같이 1871년이다. 통일독일제국의 1대 비스마르크 수상과 빌헬름 1세 독일 초대 황제가 프랑스를 점령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통일제국을 선포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이 건국된 것이다. 독일의 역사학자들은 프랑크 제국을 설립한 칼 대제, 신성로마제국을 설립한 오토 대제를 독일의 기원으로 보고, 1000여 년의 역사를 독일의 기원으로 보지만 수많은 제후국들이 각 각 독자적인 왕국, 조세권과 군대를 보유하여 실질적인 중앙집권체제의 국가로 보기에는 모순이 있다.
독일인들은 지난 1,000여 년간 수많은 영토 전쟁에 휘말리며 가톨릭 사제들의 폭정과 물질적 착취, 제후들의 강압적인 부역동원, 세금포탈과 전쟁 등에 동원되었으며, 주변 강대국인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폴란드와 같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900여 년간을 유린당한 역사를 가진 소국가 연합체였다. 200년 전만 해도 현재의 독일 영토 내에 조세권과 각자의 군대를 보유한 자치령과 군소 왕국이 100여 개 있었다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한 종교전쟁, 30년 전쟁, 페스트로 인하여 전체 인구의 30% 가까이 사라지는 흑역사의 경험을 한 민족이 과거 독일인들이다.
막스와 헤겔에 의한 공산주의 태동, 국민연금, 의료보장제도, 박사과정까지 교육의 무료 제공 등 사회보장제도, 종교개혁에 의한 기독교의 탄생 등은 한계치까지 억압받던 농부들과 시민들에 의한 생존을 위한 목숨을 건 항쟁의 결과물이란 점을 많은 한국 사람들은 알고 있지 못하다. 함부르크에는 이민 박물관이 있는데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굶주림에 못 견디던 독일인 수백만 명이 미국 등 북중미 지역으로 도주한 것을 기억하자는 박물관이다.
베토벤, 헨델, 바그너, 모차르트, 브람스 등에 의한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이 독일어권에서 대부분 작곡된 점 역시 당시 제후들이 자신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고 음악을 개인적인 현실도피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 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역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잘 알고 있지 못한다.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지만 과거 국가로서의 독일은 중세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인권이 무시되고 굶주림, 전쟁과 부역 그리고 역병 등 죽음의 공포와 상시 마주하던 다수의 독일인이 존재했던 나라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독일의 지역 균형발전은 중세부터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십여 년 전에 지역 균형발전의 모델로 독일을 따라가고자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독일 따라 하기는 최근 십여 년 전부터의 일은 아니다. 이미 독일 따라 하기는 6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있었던 일이다. Autobahn을 따라 해 만든 고속도로 시스템, 수출 입국을 위하여 독일 산업구조 해석, 지역균형발전, 내륙국가에 가까운 독일의 운하 시스템을 따라한 4대 강 사업, 독일의 신재생에너지 및 환경사업을 따라한 녹색성장 그리고 독일의 Industrie 4.0 등 우리나라 정부가 독일의 정책과 산업을 벤치마킹의 모델로 삼은 것은 필자가 알고 있는 것만도 상당하다. 물론 많은 정책들이 지속적 성장과 중장기적 계획을 기반으로 하지 못한 점이 매우 안타깝지만..
독일의 인구는 2021년 현재 8,300만 명에 달하고 유럽 국가들 중 최다 인구 보유국이다. 하지만 독일의 최대 도시인 수도 베를린 인구 3.4백만, 함부르크 1.8백만, 뮌헨 1.4백만, 쾰른 백만 순으로 인구 백만 이상의 도시가 4개밖에 되지 않는다. 인구 5,100만의 우리나라가 서울, 부산, 인천, 대구, 대전, 광주, 창원, 수원 등 백만을 넘는 도시가 10개에 달하는데 인구가 훨씬 많은 독일에 대도시가 적은 점을 보면 균형발전이 잘 되어 있는 국가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국인들이 잘 알고 있는 도시인 프랑크푸르트가 독일의 5대 도시이며 인구가 70만 명이라고 소개드리면 더더욱 많은 한국인들이 놀라는 경우를 많이 봤다.
간단히 설명해 보자. 독일의 인구는 83백만 하지만 독일의 공식 명칭을 보면 약간 이해가 빨라진다. BRD, 독일어로 Bundesrepublik Deutschland(번역: 독일 연방 공화국)이다. 즉 연방국가들로 구성된 공화국이란 것이다. 1871년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황제에 의하여 통일독일제국이 탄생할 당시에도 독일은 25개국이 각자 군대와 세금 그리고 수도를 보유한 독립적인 제후국들로 구성되었었다. 200년 전에는 약 100여 개에 달하는 군소 독립 제후국들이 존재하였으니 독일은 우리나라, 일본, 프랑스, 영국과는 달리 수많은 국가들의 연합체인 셈이다.
프로이센의 수도는 베를린, 바이에른 공화국의 수도는 뮌헨, 작센 공화국의 수도는 드레스덴, 한자동맹의 맹주는 함부르크 각자의 독일 제후국의 수도 역할을 하는 곳에는 이미 200여 년 전부터 궁전, 시청, 대성당, 각 도시를 대표하는 기업, 대학교, 전철과 지하철 등 자생적인 독자 도시 인프라가 구축되었다는 점이 우리나라와는 다른 태생적 차이점이다.
2000년대 후반까지 수도인 베를린으로 가려고 하는 대학 졸업생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가난하고 일자리 없는 베를린으로 이주하는 젊은이들을 측은하게 보았을 정도였다. 오히려 수도인 베를린 공대 등에서 공부한 젊은이들이 수도를 탈출하여 일자리가 많은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뒤셀도르프나 뮌헨 등 소도시로 이동하는 것이 2021년 현재에도 일반적인 현상이다. 물론 최근에 베를린이 유럽 스타트업의 허브 역할과 젊은 청년 창업이 활발해지고 있는 현상이 있으나 제조업체가 거의 전무한 베를린의 특성상 많은 대학생들이 공부는 베를린에서 일자리는 타지에서의 공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함부르크, 뮌헨, 프랑크푸르트, 슈투트가르트, 뒤셀도르프 비록 인구가 60만 명에서 2백만 명 이하 도시지만 세계적인 지역기업들이 각 각의 도시에 소재하여 충분한 산업 인프라와 세금 그리고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는 현실은 과거 독립 국가들의 수도로서 이미 현대 도시에 맞는 인프라를 구축한 결과라고 본다.
독일은 주요 기업들이 개별 도시의 경제적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도 한국과 다르다. 함부르크(에어버스, 바이어스도르프, 치보, 하팍로이드, 몽블랑, 융 하인리히), 뮌헨(BMW, Siemens, BASF), 프랑크푸르트(독일 은행, 코메르쯔방크 및 세계적인 다국적 은행), 슈투트가르트(벤쯔, 포르셰, 보쉬) 등의 다국적 기업들이 도시별 지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인들로서는 동등한 교육의 질이 제공되고 좋은 직장, 쇼핑 및 여가가 가능한 인프라 그리고 친구들이 있는 고향을 떠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상기와 같은 이유로 독일에는 한국과 같이 수도권 및 대도시 집중현상은 없다. 물론 동독 등 일부 낙후지역에서 대도시로 몰리는 현상이 국지적으로는 발생하고 있다.
비스마르크와 독일의 탄생 1871년
비스마르크는 독일 프로이센 왕국의 중흥의 기틀을 다진 독일제국 건국 최대 공신이며, 국부로 독일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철저한 왕당파이고 철혈재상이라는 닉네임이 붙을 정도로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외교력을 기반으로 19세기 중진국 수준에 머물던 프로이센 왕국을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과 전쟁과 외교를 통하여 유럽 최대 강국으로 부상시킨 인물이며 히틀러가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부친은 프로이센 왕국의 귀족 가문이었으나, 모친은 시민계급 출신으로 비스마르크에게 수많은 교육을 강요하는 등 유럽에서는 보기 드문 아시아의 맹모와 같은 인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비스마르크는 모친을 미워하고 일부로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낸 적도 있으나 가문의 후광으로 1848년 프랑크푸르트 Paulskirche의 연방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파견된다. 여기에서 비스마르크는 지역이기주의와 시민계급의 이상주의적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끼며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독일 통일에 앞장서는 소위 친위 왕당파의 수장이 된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 초대 황제인 빌헬름 1세와 더불어 산업혁명의 대표적인 제품인 증기기관차를 병참선으로 활용하고 연속 사격이 가능한 장총 등을 개발하여 주변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면서 소위 철혈재상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를 왕당파, 우익의 태두로만 알고 있는 한국사람들로서는 상상 이외의 진보적인 이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있다. 비스마르크는 세계 최초로 국민 연금제도 도입, 무상 의무교육, 무상 의료보험제도, 군인 유족 보험 등을 도입한 인물이다. 사회보장제도를 세계 최초로 국가단위에서 실시하는 등 사회주의 기반의 시스템을 도입한 진보적 인물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부상을 무상으로 치료하고, 전사한 군인의 유가족을 국가가 돌보며, 그 아이들의 교육을 국가에서 무상으로 담당하는 치밀하면서도 계산적인 사회복지제도일 수도 있으나 봉건제도정치와 사회주의에 입각한 사회보장제도를 병합한 세계 최초의 인물로 그 의미가 다른 위인으로 볼 수 있다.
왕당파이면서 우익의 태두로서의 비스마르크의 모습은 보불(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완성된다. 보불전쟁의 시작은 당시 스페인 왕위 계승문제였다. 당시 유럽의 최대 강국이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프랑스 나폴레옹 1세의 손자)는 프로이센 왕가에 대하여 영원한 스페인 왕위 포기각서와 더불어 굴욕적인 사과문을 요구한다. 이에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독일제국 초대 황제는 이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전쟁에 나서 파리를 함락시키고 위세를 몰아 독일 통일제국을 건립한다. 비스마르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과감한 결단력과 치밀한 계산을 겸비한 인물인 점이 여기에서도 증명된다
1871년 나폴레옹의 손자인 나폴레옹 3세가 지배하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거울방에서 25개 독일의 왕과 제후를 불러들여 중앙집권체제의 독일제국의 창건을 선포한다. 이 당시 독일은 총 순금 1,450톤에 달하는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을 프랑스에 청구하면서 독일과 프랑스는 소위 향후 80년간 소위 불구대천의 원수(Erzfeind) 관계에 돌입한다.
당시 비스마르크의 외교노선은 철저히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고립, 영국, 러시아와는 제휴하자는 것이 외교 국방의 기본노선이었다. 영국과 러시아와의 평화관계 유지가 독일제국의 장기간의 평화와 번영을 약속한다는 신념을 가진 것이다.
독일의 마지막 황제인 빌헬름 2세(초대 황제 빌헬름의 손자)는 비스마르크 수상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자 초대 황제와 비스마르크의 모든 국방, 외교노선을 깨고 해군력 강화 및 식민지 확대 등의 노선에서 영국과의 갈등 노선을 택한다. 결과론적으로 독일은 영국 및 러시아와의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물론 러시아 제국도 공산혁명으로 멸망하지만) 황제 역시 퇴위와 더불어 망명을 택하게 된다. 비스마르크는 사후까지도 독일의 미래를 예견하였던 것이다.
함부르크와 북독일 지역에 근무하는 주재원들은 함부르크 근교 비스마르크 가문의 사유지가 있는 Aumuehle의 비스마르크 박물관을 방문하면 더욱 상세한 내용을 습득할 수 있다.
좌우가 분간되지 않는 독일의 정치
비스마르크의 영향으로 독일은 현재의 정치에서도 좌우를 왔다 갔다 하는 정치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독일 통일 당시 진보를 표방하는 사회민주당(SPD)의 빌리 브란트 수상과 헬무트 슈미트 수상이 동독과의 평화통일의 기반을 구축하였지만, 실질적인 통일은 동 노선을 유지 계승한 보수 진형의 기독교민주당(CDU)의 콜 수상이 완성한다.
콜 수상에 이어 사민당인 SPD가 재집권한다. 전임 쉬뢰더 총리는 수상으로 취임한 후 사회자본주의에 반하는 사회보장제도를 축소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노동개혁인 하르쯔 개혁을 실시한다. 당시 11%가 넘는 실업률과 경기침체를 탈피하고자 좌파 진보정부가 우파 보수정부에서나 추진할법한 반사회적인 개혁 드라이브를 추진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민심을 잃은 사민당 정부는 2006년 정권을 현 메르켈 총리에게 넘겨주게 된다.
2006년 재집권에 성공한 기민당의 메르켈 총리는 쉬뢰더 총리의 기존 사회개혁제도를 계승하고 우파임에도 불구하고 진보성향의 정책인 인도주의적인 난민 수용정책을 지속하는 정책을 실시한다. 뿐만 아니라 우파인 기민당의 현 당수이자 총리인 메르켈 총리는 주지하다시피 과거 공산국이던 동독 출신이다. 상기와 같은 몇 가지 큰 정책결정에서 독일의 당시 현실을 반영하여 우파가 좌파정책, 우파정책을 좌파정권이 실시하는 것 역시 비스마르크의 영향이 어느 정도는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독일을 멸망으로 이끈 인물 히틀러
오스트리아 평민의 가정에서 태어난 히틀러, 한국에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화가 지망생이었으며, 실제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비엔나 왕립 미술대학에 떨어진 후,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자원입대한다. 서부전선에서 참호전에 참전하고 연합군의 가스공격으로 눈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종전이 된다.
당시 전투 중에 영국군에 노출되어 죽을 위기에 처한 적도 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후 자신이 신에 의해 선택받은 자라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몇 차례 독일 군부의 암살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나면서 자신이 더욱 특별한 존재임에 대한 믿음이 강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알려진 바와 같이 극우정당 나치(NSDAP)를 설립하고 뮌헨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후 지명도가 상승하여 괴벨스, 괴링, 힘믈러 등의 도움을 받아 민주적 절차인 국민투표를 통하여 독일 수상이 된다. 그 후 연합군에 빼앗겼던 루르지방을 재병합, 오스트리아 병합, 체코 Sudeten지역 병합 과정에서 영국을 비롯 프랑스의 무력함을 확인하고 실질적인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인 폴란드를 급습하여 불가침 조약을 맺은 구소련과 폴란드 영토를 나누어 병합한다. 1940년 영국과 스위스를 제외한 전 유럽을 병합 내지는 동맹국으로 삼아 나치 정권의 최대 절정기를 맞는 시기가 이때이다.
히틀러의 독일군은 1차 세계대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차를 중심으로 한 기갑사단과 막강한 제공권을 병합하는 전술, 소위 번개전(Blitzkrieg)을 통하여 프랑스와 영국군을 단 한 달 만에 제압한다. 당시 그의 별명은 독일어 약칭으로 GOEFAZ였다. 독일어로 풀어쓰면 Groesster Feldherr aller Zeiten(시대를 초월한 최고의 군사적 지도자)라고 불리었다.
이후 유대인 600만여 명, 집시와 장애인들을 강제수용소에서 학살하는 과정, 소련과의 전쟁에서 소련의 민간인과 군인 1천만여 명을 살해하는 만행이 나치 정권 치하에서 벌어진다.
1941년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을 점령한 후 히틀러는 독일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소련을 침공하면서 독일의 패망은 예견되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특히 스탈린그라드 침공에 실패하면서 수백만의 독일 군인들이 전사, 아사, 동사하면서 6년간의 2차 세계대전이 마침내 독일의 패전으로 달려가게 된 것이다. 미국의 참전과 더불어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독일의 전선은 연합군과의 서부전선, 그리고 소련군과의 동부전선 양 전선에서 힘겨운 전쟁을 치르게 되며 패망한다.
히틀러는 패망 직전 ‘독일의 미래는 이제 없다’는 확신 아래 항복하지 않고 마지막 한 사람의 독일인이 남을 때까지 결사 항전을 지시하고 자신은 베를린 수상관저의 지하벙커에서 자신의 부인 Eva Braun과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평소 히틀러는 ‘독일과 결혼하였기에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자살 직전에 십여 년간의 내연관계를 이어오던 Eva Braun과 결혼하고 몇 분 뒤 동반 자살한다.
현재 대한민국 인구보다 천만 명이 많은 총 6천만여 명이 사망하고, 현대사회에서 세상 지옥의 재림이라는 말을 탄생시켰던 독재자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유럽에서의 세계 2차 세계대전은 마무리된다
독일의 유대인 박해 어디서 기원한 것인가
아우스쉬비츠(Ausschwitz)로 대표되는 KZ(Konzentrationslager 집단(강제) 수용소의 약어)에서 학살당한 유대인의 숫자는 60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한 민족이 타민족을 말살하고자 하던 시도는 과거에도 있었으나 현대적인 과학문명이 태동한 20세기에 현대적인 인프라를 활용하여 한 민족을 체계적으로 멸종시키고자 한 시도는 실질적으로 독일이 최초이다.
유럽에서의 유대인 박해는 고대와 중세 때부터 있었던 일이다. 일부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칙령으로 유대인의 제조/상업 종사를 금지하였고 이에 고리대금업 외에는 유대인이 돈을 벌 길이 막막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독일의 대표적인 금융도시인 프랑크푸르트의 경우 고리대금업을 하던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있던 도시로 로스차일드 등의 유대인 가문이 이곳에서 시작하였으며 유대인 금융가들이 많이 있었던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히틀러의 유대인 증오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히틀러가 집권하기 위한 초기 유대인 자본을 유치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는 설, 퇴역군인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자본이 연합군을 지원하여 유대인을 증오했다는 설, 히틀러의 조상 중에 유대인이 있었기에 이를 무마시키고자 했다는 등의 설 등이 대표적이다. 상기의 설들은 소문으로만 떠돌고 있는 것이며, 확실한 하나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히틀러는 유대인이라는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을 이용하여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 일반화의 전략을 집권과 정권유지의 방편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는 중세부터 있어 왔고 고리대금과 금융업을 생계로 삼던 돈 많은 유대인들에 대한 일부 대중의 증오심을 극대화하여 내부 통합의 근거로 삼은 것이다.
물질적인 정권유지의 방법으로 나치가 유대인을 활용했다는 것 역시 증명된 사실이다. 유럽에서 살해당하고 추방당한 천만 여명의 유대인 동산과 부동산이 나치 정권의 부채를 탕감하고 인프라와 산업시설 확충과 무기 설비 확충에 이용된 것이다.
즉 히틀러가 유대인을 멸망시키고자 한 배경에는 종교적인 편견, 나치의 재정적 어려움 그리고 대중을 현혹하기 쉬운 일반화의 오류 정책을 통한 특정 집단을 증오 대상으로 만드는 복합적인 요인이 숨어 있던 것이다.
손자끼리의 전쟁 1차 세계대전
한국인들은 1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는 2차 세계대전만큼 잘 알지는 못하는 것 같다. 대부분 표면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여 촉발된 총 2천만 명이 살해된 첫 번째 세계전쟁으로만 기억하고 있으며, 내부적인 이유로는 독일과 영국, 프랑스 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전쟁의 촉발이라는 정도가 한국에서 알려진 상식이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는 재미있는 일화들이 있다. 당시 영국의 국왕인 조지, 그리고 독일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 그리고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황제는 모두 외사촌간이다. 영국의 유명한 빅토리아 여왕의 친외손자들끼리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유럽의 역사학자들은 1차 세계대전을 손자들의 전쟁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100여 년 전 근세 유럽 왕국에서도 평화와 정권유지를 위한 정략적인 결혼이 유행하였고 당시 유럽의 왕국들은 혼인을 통한 정략적 제휴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독일 통일의 주역인 비스마르크 수상은 프랑스는 고립시키고 영국과 러시아와는 우호관계를 통일독일제국의 외교 최우선 정책으로 내세웠으며 결과적으로 독일, 영국, 러시아의 결혼 동맹을 성사시킨 것이다.
특히 영국의 조지 국왕과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는 외관상으로 쌍둥이로 오인할 만큼 닮았다는 점, 그리고 빅토리아 여왕의 서거 시에 외손자인 독일의 마지막 황제인 빌헬름 2세가 임종을 지킨 점 등은 유럽에서는 잘 알려진 비화이다.
소련은 독일이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제국은 동서부 전선에서 두 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동쪽에서는 러시아 제국 그리고 서쪽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와 두 개의 전선에서 수백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는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독일 군부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낸다.
독일 황제와 군부는 당시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배척받아 스위스에서 망명 중인 레닌에게 수백만 유로와 더불어 지원 인력을 제공하면서 레닌이 러시아에서 집권할 시에 독일에게 항복할 것에 합의한다. 이를 수락한 레닌은 주지하다시피 혁명을 통하여 공산국가인 소련을 건국하고 바로 독일제국과 항복에 가까운 휴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황제가 집권하던 독일제국이 독일의 전세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하여 레닌을 앞세워 왕정체제와는 극한의 대립을 하는 공산정권인 소련을 설립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동부전선에서 소환된 350만 명의 독일군과 오스트리아 군인을 투입한 서부전선에서 독일은 갓 참전한 미국, 프랑스, 영국 연합군에 밀리고 굶주림에 허덕이던 독일 해군의 반란과 민중봉기에 의하여 연합군에 항복하고 만다.
나중에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독일군이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와 유대인에 내부적으로 배신당해 패배했다는 선동을 통하여 정권을 잡는다는 점에서 역사의 악순환은 지속된다.
라인강의 기적은 소련의 작품?
2천만여 명의 사망자를 기록한 1차 세계대전, 6천만여 명의 사망자를 기록한 2차 세계대전을 촉발한 패망 독일에 대한 연합군과 세계의 두려움은 사라질 수 없었다. 특히 6백만여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여 유대인을 말살하려고 한 독일에 대한 공포는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영국, 프랑스와 미국, 특히 영국의 처칠 수상은 독일을 산업 제조시설이 없는 영원한 농업국가로 만들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이 다시 제조강국,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만든 국가가 아이러니하게도 2차 세계대전 중 가장 많은 2천만여 명의 희생자를 낸 소련이라는 점은 또 하나의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소련은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종전되기 직전 독일에 항복을 하여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의 과실을 취하지 못하였었기에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승전국으로서 영토적, 물질적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외교전을 수행한다.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동구 유럽을 사실상 공산정 치하의 식민지와 같은 상태로 만들어 독일과 서방에 대한 완충지대 및 공산주의 전진기지를 만들고 한반도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전범인 일본을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과 남한으로 북한을 완충지대 및 공산주의 전진기지로 만드는 정책을 실시하며 냉전시대를 촉발한다.
이에 미국은 팽창하는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항하여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인 독일과 일본의 재건에 전념하는 또 하나의 역사의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특히 독일의 경우 제트 추진 전투기, 미사일, 유도탄 등 당시 세계 최고의 군사기술을 보유했던 국가로 관련 기술자들이 대거 미국에 스카우트되어 나사의 기초가 되고 미국의 무기체계의 선구자들이 된 점도 간과하지 못한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V1, V2 미사일을 개발한 폰 브라운 박사로 동인은 전후 미국의 나사를 설립하는 창립자가 된 인물로서 인류의 달 착륙의 최대 공헌자로서 기록된다. 독일이 영원한 농업국가가 되는 운명을 소련이라는 미국의 거대 적수에 대한 대항마로 활용되면서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은 독일사 최대의 러키 한 아이러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6.25로 인하여 비슷한 운명에 처할 일본이 부활한 점 역시 같은 맥락이겠지만.. 독일 현대사의 행운은 이에 그치지 않고 독일 재통일이라는 더 큰 행운의 기회가 도래한다는 점이다. 정말 부러운 나라다.
예정된 참사, 2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패망의 길로 가게 되었다. 독일의 마지막 황제인 Wilhelm 2세는 1차 세계대전 종료 직전 망명을 하게 되고 SPD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 최조의 민주정부가 종전협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미국, 프랑스, 영국이 주축이 된 연합군 측에서는 베르사유조약과 후속협상을 통하여 천문학적인 배상금인 1320억 마르크(약 47,000톤의 순금)를 66년 동안 배상하여야 하는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 중에 52%는 프랑스, 영국은 22%, 이태리 10%, 벨기에 8% 등을 취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연합군은 독일이 보유한 상선을 추징하였고, 천문학적인 배상금 지불을 이행하지 못하는 독일에 대하여 석탄 보고이며 산업 중심지인 루르지방을 강제로 점유한다. 이 과정에서 독일은 살인적 인플레를 경험하게 된다. 1918년 1마르크가 1923년에는 1조 마르크에 해당하는 1조 배에 달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로 지폐의 종이 가격이 액면가를 초월하는 사태를 독일인들은 경험하게 된다. 현금을 땔감으로 활용하던 시기였다.
또한 1929년 미국의 증시 폭락으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는 독일 경제와 불안한 민주주의 체계를 회복불능 상태로 추락시켰으며 이는 독일인들의 기존 정치에 대한 실망과 분노, 특히 미국, 프랑스, 영국과 같은 연합국에 대한 증오로 발전하여 나치과 히틀러의 집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1차 세계대전 후 정치권의 파행적 국가운영과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를 이용하여 2차 세계대전을 통한 명예회복과 세계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노렸다면 과한 표현일지...
대부분이 모르는 독일의 귀족사회
2021년 독일은 언급한 바와 같이 내각제 기반의 연방 공화국 형태로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자본주의 민주주의 국가이다. 하지만 현재에도 독일에 8만여 명의 귀족들이 자신들만의 계급사회를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독일인들도 잘 모르는 사실이다.
1871년 독일을 통일한 Hohenzoeller왕가, 오스트리아를 기반으로 하는 Habsburger왕가 등은 독일에 관심이 있는 한국인들도 들어본 바 있지만 독일에도 현재에도 귀족사회가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독일에는 유적을 포함하여 총 25,000 여개의 궁전, 성과 요새가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성들은 유명한 바이에른주의 백조의 성, 프로이센 왕가의 Hohenzoelle성, 포츠담의 상스시 궁전, Schwerin성 등이 대표적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하여 로렐라이 언덕으로 가는 라인 강가를 따라가면 3-4km 정도 간격으로 수십여 개의 과거 요새, 산성유적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대부분이 기원후 800년대부터 1200년대에 지어진 것이며 과거 기사들과 제후들의 성으로 보면 된다. 이 성들 중에는 여전히 귀족 가문의 사유재산으로 되어 있는 성들이 다수이며 일부는 관광목적으로 일반에게 공개하는 성들도 있으며 일부는 귀족들의 생활공간으로 미공개되는 성들도 있다. 최근에는 돈벌이의 목적으로 호텔로 개축된 성들도 있어 중세시대를 느끼고 싶어 하는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8만여 명의 귀족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귀족 간의 혼인을 통해서 귀족계급을 유지하는 전통이 있으며, 이들은 과거 왕조시대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유럽의 사교계를 주도하고 있다. 일반 독일인들은 귀족사회에 대하여 큰 관심이 없으며, 돈을 소유한 사람들이 럭셔리한 삶을 즐기는 것을 그들만의 삶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현재 독일 귀족층의 최고위의 자리는 독일제국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의 증손자인 Georg Friedrich(1976년생)이 맡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 최고 수장의 자리를 지키는 Georg Friedrich가 종손이 아니라는 점이다. 독일 마지막 황제의 첫째 손자와 둘째 손자가 서민층과 결혼함으로써 독일 귀족층의 최고 수장 자리를 상속받지 못하고 셋째 손자의 아들이 최고위의 자리를 이은 점은 한국인으로서 보면 매우 독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독일 귀족사회의 모든 특권은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에 의하여 사라졌으나 궁전과 부동산 등 일부 유산은 인정되어 21세기에도 귀족사회의 전통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1990년 독일 재 통일 이후 Reichsbuerger(제국 시민)이라는 단체가 독일제국의 정통성을 이어간다며 현 정부를 부정하고 과거 독일제국의 세를 확장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2021년 현재 소수 극우집단 또는 이단집단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터키와 독일, 왜 독일에 터키인이 많을까?
독일에 도착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외국인은 터키인이다. 독일어 어학학원에 등록을 하거나 독일학교에 입학을 하던지, 독일 대학에서 유학을 시작하면 터키인들이 가장 많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우리나라 독일 교민사회의 구성과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과거 1960년에서 7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에서 2만여 명의 광부와 간호사가 독일에 파견된 적이 있다. 이중에 절반 정도는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였으나 절반 정도의 인원은 독일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 현재 독일의 2세, 3세 교포들은 대개 이 분들의 자녀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과연 독일이 우리나라의 광부와 간호사만 받아들였을까? 아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중 1945년까지 800만 명의 독일인이 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하고 특히 많은 군인들이 전사하여 노동력 특히 젊은 남성 산업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기였다. 경제는 10%대의 고성장을 하고 있으나 인력이 부족한 시기에 독일의 선택은 외국인 노동자를 유입하는 방안을 선택한다. 당시 한국에서는 2만여 명이 들어왔으나 터키에서는 50만여 명이 광부와 산업인력을 들여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독일 정부에서는 이들 대부분이 일정기간의 노동 후에 귀국할 것을 기대하였으나 반대로 터키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독일로 이주를 선택한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들 대부분이 독일에 정착하여 현재 독일 인구 83백만 중에 약 3백만 명의 터키계 독일인들이 있는 이유이다.
독일인 중 중산층 이하의 일반인들은 터키인들에 대하여 차별적인 인식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Gastarbeiter(외국인 노동자를 칭하는 독일어)로 온 터키인들의 대부분이 농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들로 청소부, 광부, 건설노동자로서 일을 하면서 종교적, 문화적, 언어적으로 통합되지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차별적인 의식이 태동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2020년을 기준으로 독일 국회의원 중 14명, 그중 녹색당의 당수가 터키계로 터키계 독일인들이 독일 내에 정치/경제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확보되는 과정에 있으나 이 과정이 커질수록 독일 내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의견도 커질 수 있다는 점은 우려된다.
베를린, 유럽의 수도, 세계 도시로 부활하나?
2021년 베를린은 유럽 경제를 선도하는 독일의 수도이자 실질적 유럽 대륙의 중심도시로 부상 중이다. 독일은 83백만의 인구로 유럽 인구의 17%, 경제적으로는 21%를 담당하는 실질적 유럽 최대의 경제적, 정치 대국이며, 총인구 350만여 명의 수도 베를린은 냉전 종식 후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지정학적으로 가장 중심에 위치한 요지이다.
하지만 베를린은 2000년대까지만 해도 과거 서베를린이 동독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고립된 섬과 같은 도시였었던 영향으로 경제기반이나 사업기반이 전무했던 도시였다. 과거 분단 시절에는 Transit라고 불리는 서독에서 출발하여 동독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4개 노선과 항공/철도노선만으로 출입이 가능했고 소련과의 분쟁이 나는 경우 가장 먼저 점령당할 위험에 처한 오지 중의 오지였었다.
1990년 독일 재통 일직전까지만 해도 베를린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베를린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에게는 군대 면제의 특혜를 주는 등의 출산 진흥정책을 실시한 바 있다.
하지만 2021년 베를린은 인구 350만 명, 총 159개의 대사관과 영사관이 소재하는 유럽 제1의 정치/외교 도시, 총 8,500여 개의 국내외 협회가 소재하고 외국 정부기관 1,600여 개가 소재하는 명실상부한 독일의 수도로서 환골탈태 중이다. 또한 미국의 다국적 전기자동차 생산업체인 테슬라가 베를린 인근지역 연산 100만대 규모의 기가팩토리를 건설 중에 있다.
프랑크푸르트, 뮌헨에 이어 연간 27백만 명이 이용할 예정인 허브공항 역시 최근 완공되었고, 연간 500여 개의 스타트업 기업이 매년 신규 창업되고 있으며, 3,000개에 달하는 스타트업 기업을 중심으로 유럽 최대 스타트업 허브시티로 변모 중이니 독일 베를린의 향후 10년 뒤의 모습은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을 기대하게 한다.
독일과 프랑스, 불구대천의 원수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로
독일과 프랑스는 1950년까지만 해도 불구대천의 원수(Erzfeind)라는 명사가 생길 정도로 100여년간의 앙숙관계에 있었다. 독일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제 그리고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전, 독일 통일,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양국은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백만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전쟁을 수 없이 치르면서 서로 원수로 여기며 살아왔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는 프로이센을 유럽 군사강국으로 부상시키면서 프랑스와 수많은 전투를 치른 바 있다. 이어 나폴레옹이 유럽 정복전을 나설 때에 프랑스군은 독일의 수많은 제후국들을 복속시켰다. 이후 1871년에는 독일 프로이센 왕국이 파리를 함락하고 프랑스의 자존심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의 창립을 선포하고 당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망명의 길을 택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수백만 명이 전사하는 소모전을 겪으며 1919년 프랑스를 포함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프랑스는 독일의 산업생산시설 중심인 루르지방을 점령하고 이를 히틀러가 수년 후에 무력으로 되찾는 일도 벌어진다. 주지하다시피 2차 세계대전 개전 시에 독일은 전차부대와 공군력을 앞세워 프랑스, 영국 연합군을 개전 3개월 만에 괴멸시키고 다시 파리는 함락되며 프랑스에는 나치 괴뢰정권이 설립된다.
마지막으로 드골의 망명정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하여 영토를 재 수복하고 집권하면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다시 승전국의 일원이 된다.
상기에 약술한 100여년간의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 중에 사망한 독일인과 프랑스인은 수백만 명에 달한다. Erzfeind(불구대천의 원수)라는 말은 1950년대까지 독일과 프랑스, 양국의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 이후 100여 년간의 숙적 관계를 버리고 2021년 양국이 현재 가장 가까운 이웃국가로서 공존하는 것은 양국의 정치인과 국민들이 공멸보다는 미래와 생존을 택한 결과라 할 것이다.
우호관계의 틀은 위대한 정치적 선각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1959년 재집권한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당시 독일 수상이던 아덴아우어 수상을 자신의 별장으로 비밀리에 초대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하여 더 이상의 공멸을 초래하는 증오 관계를 청산하고 우호관계 회복의 계기를 100년 만에 마련한다. 이를 발판으로 현재의 EU(유럽연합)가 결성되는 중요한 시발점이 된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중 히틀러 제3제국에 의하여 정복당했으며, 영국으로 망명하여 가장 많은 수난을 겪은 인물, 독일을 가장 증오해야 할 드골 대통령이 독일 아덴아우어 수상과 친구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며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독일과 프랑스가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될 수 있도록 기반을 조성한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독일의 통일은 준비된 통일일까?
독일 사민당(SPD)의 당수였던 故Billy Brandt수상은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진 정치인이라 알려져 있다. 물론 서독은 분단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동독과의 소통에 노력하였으며 같은 민족끼리의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온 점은 확실하다. 한반도에서와 같이 북한에서 한국의 TV 방송을 차단하고 우편 및 전화연락까지 봉쇄하는 상황은 독일 분단 시에는 없었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 친지들과 우편 연락도 가능했고 서독의 방송을 청취하는 것도 가능하였으니 우리와는 확실히 다른 환경에 처했던 상황이다.
하지만 1985년에서 1987년 필자가 Goettingen에서 독일학교를 다닐 당시를 기억해 보면 독일의 통일에 대한 준비는 미미하였다고 회상한다. Gymnasium에서 독일 친구들과 소통이 어느 정도 원활하게 되었을 시에 17세의 청소년으로서 가장 관심이 높았던 부분은 두 나라가 공히 분단의 상황에 처해 있어, 독일 친구들과의 대화 주제는 사춘기 관련 주제와 더불어 양국에 대한 차이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88 올림픽을 앞두고 6.29 선언 등으로 한국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당시 수많은 독일 언론에서 처음으로 한국에 대한 보도가 많아지던 시기로 독일 친구들의 아시아 미지의 국가, 한국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던 시기였다. 1987년 당시 독일 친구들이 내게 이야기했던 것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은 비록 현재 우리 서독보다 가난하지만(당시 1인당 우리나라 국민소득 2,000달러, 독일 15,000달러) 통일은 한국이 우리보다 훨씬 빨리 될 것이다. 한국은 2차 세계대전의 전범도 아니고 주변 국가의 증오 대상 국가인 독일에 비하여 한국의 통일이 용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부분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독일의 통일은 내가 독일을 떠난 후 2년도 되지 않아 정말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준비되지 않은 통일로 인하여 독일은 지난 30여 년간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단일민족이 통일되어 유혈분쟁 가능성이 사라지고 통합된 나라에서 사는 것을 보면 독일은 참 복 받은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2016-17년 대규모 난민 유입사태는 역설적으로 독일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통합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더 이상 독일 언론이나 방송 그리고 독일인들과의 대화에서 서독인이 동독인을 비하하는 Ossi(동독 놈), 동독인이 서독인을 비하하는 Wessi(서독 놈)라는 비속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물론 2021년 현재에도 서독과 동독지역의 빈부의 격차는 존재하고 동독지역 사람들의 상대적인 박탈감은 크지만 그 격차는 점차 감소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백만 명의 중동 난민들이 들어오면서 독일 내부의 동서 간의 단결력이 강해진 것이다. 물론 이 기조가 우파적 민족주의로 향하는 것은 위험해 보이지만 수많은 갈등과 유혈을 경험한 독일인들은 미래에도 합리적으로 대처할 것으로 본다.
두려움의 대명사, 나치, 부활의 기회를 맞이하나?
나치의 2차 세계대전 중 전범 역사로 인하여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극우파를 금기시하던 독일이 최근 변하고 있다. 독일을 위한 대안정당(AFD: Alternative fuer Deutschland)은 난민을 배척하고, 이슬람 문화를 거부하며 EU를 거부하는 극우파 색채를 강하게 띄는 합법적인 우파 정당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지난 70년간 독일은 실질적으로는 보수적 색채를 가진 기민/기사당(CDU/CSU)과 사민당(SPD) 양당 체계를 유지하여 왔으나 2007년 대연정(Grosse Koalition) 이후 기민/기사당(CDU/CSU)과 사민당(SPD)은 그 지지율이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며, 우파 정당인 AFD의 지지율은 10% 내외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7년 선거를 통하여 독일 국회에 진입한 AFD는 공식적인 발언에서 유대인 학살을 부정하고 중동 난민에 대한 증오감을 표출하는 등 금기시되었던 민족주의가 되살아 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 최근의 상황이다.
AFD는 아직까지는 독일 재통일 이후 가장 낮은 실업률과 경제의 안정성으로 10% 이하의 지지율에 머무르고 있으나 만약 지속적인 난민의 유입과 테러 그리고 코로나 여파로 독일 경제가 부정적인 기류를 타고 실업자가 대거 발생하는 경우 독일 우파의 성장세가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극우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AFD를 금지하자는 등의 논의가 시작되고 있으나 동 정당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기에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공포의 독일에서 희망의 독일로
우리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부러워하는 독일이란 나라가 독일의 재통일 이후 지난 30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기를 우리나라와 비슷한 동족상잔의 전쟁 공포 속에서 살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냉전 중에 미국과 소련의 전쟁이 발발할 시에 핵전쟁의 중심에 설 것을 두려워하던 나라, 같은 독일어를 쓰는 동일 민족끼리의 전쟁 가능성에 몸서리치던 나라가 1990년 전의 독일이었다.
과거의 독일 역시 상시 공포에 휩싸이던 나라였다.
독일은 200년 전만 하더라도 100여 개의 주권 도시와 국가들이 난립하면서 프랑스, 러시아, 폴란드, 오스트리아, 덴마크와 스웨덴 등의 주변 강대국의 정략적 희생물이 되었던 나라이며, 중세시대에는 천주교 사제들과 왕권 그리고 귀족의 착취와 포탈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서민들이 고통받던 나라였으며, 1차 산업혁명 이후에는 생산성 향상을 위하여 다수의 시민계급이 인권과 노동력 착취 대상이 되었던 나라이다. 세계 1/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독일인은 1천만여 명,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냉전 당시 최전선 국경 국가로 1990년까지 독일은 언제나 멸망의 두려움과 공포와 마주하던 국가이자 민족이었다.
이러한 수세기간의 심리적인 공포와 물질적 착취, 불안감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불합리하고 수직적 체계, 지배계층의 타파, 갈등과 모순의 체계를 점차적으로 합리적 시스템으로 인권보호와 차별금지 그리고 사회보장제도 확충으로 해결하여 왔고 이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공산주의가 잉태된 나라, 유대인을 말살하는 인종차별주의적 민족주의가 탄생한 나라,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나라, 수많은 국가들이 하나로 통일된 나라 독일은 수많은 수식어가 붙은 나라이다.
현재 독일은 미국, 러시아, 터키, 영국 그리고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과 또 다른 갈등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이번 갈등이 과거와 다른 점은 독일이 힘을 바탕으로 한 무력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갈등 해소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중동 난민, 이슬람에 대한 심리적인 두려움과 이로 인한 민족주의와 우파의 강세, 전통적 민주 정당들의 약세 등의 리스크 요인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독일의 현재 모습이지만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현재가 과거 어떤 독일보다 평화롭고 부유하며 자유롭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전 세계적인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불안감은 증가하고 있는 상황은 세계 어느 지역과 마찬가지이다.
생존과 공존을 위한 선택 EU, 삐걱거린다.
EU는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전, 보불전쟁, 세계 1/2차 세계대전 등살 육전을 반복하던 독일, 프랑스, 영국이 지속 가능한 평화체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경제적 국가적 연합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2020년, 2차 세계대전 전후 70년 후 EU를 주도하던 3개국 중 하나인 영국이 EU를 탈퇴한다. 2016년 브렉시트가 통과되지 않을 것이라는 대부분의 유럽 언론과 주변의 다수의 의견,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집권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독일의 전반적인 여론결과는 틀린 것으로 확인된 상태이다.
특히 1차, 2차 세계대전과 근세와 중세 끊임없는 유럽 국가와 민족 간의 전쟁을 피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보장하고자 만든 EU체계의 흔들림에 많은 독일인들은 혼란해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드골 수상과 독일의 아데나우어 총리가 그 근간을 확립하고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통하여 만든 EU가 흔들리는 상황인 것이다. 지난 30여 년 끊임없이 확장해 오며, 더 이상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태리, 스페인이 아닌 하나의 유럽 국가인 EU를 향하여 달려오던 유럽이 뒤 걸음 치고 있는 것이다. EU의 미래가 불확실하면 할수록 독일 역시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엷어질 것은 자명하다. 앞으로 어디로 EU가 나아갈지는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자명한 것은 확실한 개혁 없는 현재까지의 방식으로는 EU의 분열은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점이다. 역사의 흐름이 다시 쳇바퀴처럼 다시 회전하면서 각 국의 이익을 위한 민족주의로 갈지 아니면 건강한 세계화를 위하여 EU의 단합과 통일성이 강화될지는 미래만이 알 것 같다.
(2편 독일인은 어떤 교육을 받나 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