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62
⠀근무를 나가지 않는 날이 없는 요즈음. 더군다나 이번 달은 새벽 근무이기에 모두가 잠에 든 시간에 홀로 조용히 일어나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전투 조끼와 방탄모를 착용한 후, 열 발의 공포탄을 장전시킨 총까지 두 손에 쥔 채 바깥의 어두운 밤과 공기를 맞이하고 있는 요즘의 나이다. 근무라 함은 탄약고 초소에서 주변을 경계하는 초병 근무인 것인데, 이곳은 생활하는 공간으로부터 거리가 꽤나 떨어져 있고 경사진 곳에 있어 어느 정도 다리 근육을 간밤에 놀래주는 곳이기도 하다. 두 시간 동안 그곳에 서서 긴장된 두 손에 얹힌 총과 함께 바깥의 어두운 배경을 가만히, 그저 조용히 쳐다보다 보면 많은 생각이 눈앞 어두운 공기 사이를 오간다. 그 시간 동안은 이번 주의 계획을 세워놓기도, 이전 바깥세상의 공기들을 떠올리기도 하며 훗날 내가 온몸으로 느낄 공기들을 상상하기도 한다. 생각 외로 나는 그곳에서의 시간을 아직까지는(?) 소중히 여기고 있다. 뿔뿔이 흩어져있던 정신들과 생각들이 눈앞에 빈 공기들 사이로 오와 열을 맞추면서 금세 정리되곤 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은, 새벽 네 시 근무가 있었던 날이었다. 축축이 비가 내려 땅이 젖어가는 밤, 우의를 입은 채 평소와 같이 어두운 밤공기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해가 점점 뜨면서 앞 공기들에 색깔이 채워지고 있던 찰나, 웬 말랑한 생명체 하나가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한 힘없는 내 두 발 위를 밟고 지나갔다. 음. 음.. 응? 알고 보니 그 말랑함의 정체는 우리가 생활하는 곳 계단 밑에 자리를 잡아 살고 있는, 맨날 얼굴을 마주치곤 하는 외딴 고양이었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그곳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 이 먼 초소까지 와서, 게다가 초소 계단 위를 쭉 올라와서 내 발 위를 밟고 있는 것이었다. "음. 그래. 얘는 나보다 여기서 훨씬 더 오래 살았으니 이곳 땅 사정을 다 알겠지. 야밤에 그냥 심심해서 불쌍한 인간들 놀아주려고 여기까지 왔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 새벽에 이곳까지 혼자 네 발로 걸어와서는 나와 같이 알게 모르게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얘가 마냥 귀여웠다. 사실 저번 전국 여행 중 순천만 습지에서 하루 종일 나와 놀아주었던, 살면서 마주친 그 어떤 고양이보다 귀여웠고 내게 살가웠던 그 친구와의 긴 팬미팅 이후로 난 고양이라는 존재에게 꽤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다. 따라서 공허하고 숨 막히는 이 공간을 위로해 주며 남은 근무 시간을 따뜻함으로 채워줄 존재가 곁에 와준 것에 기뻐했다. 나는 저번 팬미팅 이후로 알게 된 고양이의 인간에 대한 호감적 행동, 즉 자신의 꼬리를 세우며 몸을 비비는 행동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얘도 그래주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정말 그 친구는 꼬리를 위로 쫙 치켜세우고는 나의 다리 사이를 지나가며 내 몸에 애정을 듬뿍 묻히고 있었다. 거리낌 없이 내게 맘을 열고서는 총 든 나무마냥 곧게 서 있는 내 옆으로 펄쩍 뛰어올라 내부 부스 안으로까지 대범하게 들어가기도 했다. 그 친구에게 거수경례를 할 수는 없다만, 확실히 나보다는 여유롭고 호기로운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내 시선은 일제히 그 친구에게 쏠렸다. 귀엽고 작은 존재에 대한 인간의 촉각적인 본성, 즉 감히 손으로 쓰다듬는 짓을 저지르며 남은 시간은 그 고양이와 함께 따스하게 흘려보냈다. 그러고서 마침내 두 시간이 흘러 근무교대를 한 뒤 복귀하려 내려가고 있던 찰나, 뒤에서 조그만 기척이 느껴졌다. 무엇인가 하고 뒤를 돌아봤더니 그 고양이가 나를 따라 같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근무를 마치고 복귀까지 같이 하는, 같이 새벽에 고생을 한 냥을 하는 냥이었던 것이다. 너무 가깝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게 뒤를 졸졸 따라와서는 자기만의 길로 안식처를 찾아 돌아가고서 종적을 감추었다. 덕분에 그날은 무료할 만도 할 두 시간을 돈을 내도 될 만한 두 시간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있었던 근무에서는 아쉽게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도 근무를 서고 와 무언가 모르게 바쁜 나지만, 나는 그곳에서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으며 힘든 내색과 같은 쓸데없는 태도를 내보이지도 않는다.
⠀엊그제도 어김없이 근무를 나서기 위해 침상에 앉아 콧소리를 흥얼대며 기분 좋게 전투화를 신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기가 내게 말을 건넸다. "와 그게 맞아? 아니 너 긍정, 진짜 그거 컨셉 아니야? 안 힘드냐?". 나는 곧바로 영문도 모르겠다는 듯이 답했다. "응? 긍정은 원래 컨셉에서 시작되는 거야.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이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어떻게든 좋게 생각하며 나 자신에게 '긍정적인 인간'이라는 컨셉을 씌우는 게 결국 긍정이지. 그렇지 않아?". 이처럼 말하고 나니 내가 뭐 간디가 된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정말로 사람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에 있어서 긍정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야 원체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인간이긴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까지 그럴 수 있는 그런 피곤한 인간은 절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화가 날 때도, 기분이 안 좋을 때도 있는 것이 당연하기에 나는 완전한 긍정을 스스로 기대하지도 않고 추구하지도 않는다. 아니, 그냥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들 속에서 어떻게든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면모를 나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단지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려 그러한 컨셉이라고 할 수 있는 컨셉을 내게 씌우고 그 상황을 이겨내는 것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컨셉이 나를 잡아먹고 내가 컨셉에게 잡아먹히려 하다 보니 결국 나는 남이 보기에도, 나 스스로에게도 되게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만약에 누군가 내게 당신은 정말로 더할 나위 없이 긍정적인 사람이 맞느냐고 묻는다면, 아니. 난 단지 긍정적인 '척'을 매일 하고 다니는 그냥 뻔뻔한 사람일 뿐. 웃고 있는 하회탈을 쓴 강도마냥 겉으로만 꾸준히 웃어 보이는 그냥 아주 치사한 사람일 뿐이라고 답하고 싶다. 결국 어렵지 않게 긍정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을 뿐이라고, 그냥 내가 나서서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의 힘을 전해줄 수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할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