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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실없는 말일 수 있더라도, 농담은 힘든 하루 속 작은 위안으로 다가오곤 한다. 나, 그리고 타인의 일상 속에 잠시나마 빈틈을 만들어주며 숨을 쉴 수 있도록 말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다. 꾸밈에 있어 꽤나 노력이 들어가는 낱말들이기에. 뇌를 비틀어 지식을 동반해 정말 수준급으로 던져지는 농담이 있는 한편, 유치찬란하기 이를 데 없는 정말 실없는 농담도 있다. 희극적인 효과든 진지한 효과든 낯익은 낱말들을 숙고하며 만들어지는 농담은, 낱말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그 소리들에 귀를 기울어야만 던질 수 있다. 적당한 타이밍에 맞춰 던지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이런 농담을 던지는 것을 즐겨 한다. 물론 항상 일정한 거리로 던지지는 못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다소 멀리 날아가 버리기도 하고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바로 앞에 떨어지기도 한다. 수준급으로 힘 있게 던져지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형편없기 그지없다. 그럴 때는 웃픈 냉대를 받는다. 간혹 주변의 냉담한 반응에 순간 민망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뻔뻔스레 손에 많은 공을 쥐고 있다. 스트라이크가 있기에. 아주 적당한 거리에서 빠르고 정확하게, 살짝 회전이 걸리기도 하면서 곧게 나아가 제대로 꽂히는 그것.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농담의 정의이다. 그런 식으로 한 세 번 잘 던져지면 한 명씩 그 자리를 나가버리곤 한다. 너무 웃겨서, 배꼽을 잡으며 아웃이 돼버리는 것이다. 아주 잘 파고들었다는 소리겠지. 나는 이렇게 매일 누군가를 아웃시키며 살아간다. 나는 웃으면서 살기로 했기에. 나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포함시킨다. 그들을 매일 매일 아웃시키며 잠시 벤치로 돌아가 쉴 수 있도록 한다.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편하게 이 경기를 즐길 수 있도록. 그들이 웃어야 내가 웃는 것이니까.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웃는 하루, 웃는 삶이다. 물론 이는 혼자 감히 저들을 스스로 아웃시켰다고 생각하는 한 인간의 어이없는 망상에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하루에 던질 수 있는 공이 무한대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대로 막 던지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되니까. 그러다가는 공이 선을 넘는다거나, 아니면 아예 그 상대를 향해 날라가 버리는 순간들이 남발될 우려가 있다. 너무 많은 공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정도면 내가 상대를 오늘 하루 안에 아웃시킬 수 있겠다' 싶은 양만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절대 많게도, 그렇다고 너무 적게도 아니다. 적당히 상대가 지치지 않게끔만 던지는 것. 그래야만 서로 웃으면서 오늘 하루 이닝을 무사히 마칠 수 있다.
⠀어느 순간은 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 때도 있다. 미처 준비를 하지 못했다던가, 공을 꺼낼 힘조차 없었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상대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잘 던져주기도 때론 내가 잘 받아주고도 싶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니까. 그럴 때는 나는 아예 경기장을 조용히 나가버린다.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힘을 비축해두는 시간을 갖는다. 괜히 경기장에 어정쩡하게 남아있다가는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리기에. 내 표정을 통해 내게 공이 없다는 사실을 상대가 알게 되버리면 그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아예 자리를 떠난다. 그러고서는 남몰래 휴식을 취한다. 다음번에 공을 제대로 던지기 위해서는 쉼이 선행되어야 하니까.
⠀나는 기분이 조금만 안 좋아도 바로 티가 난다고 한다. 항상 웃으면서 공을 마구마구 던지던 사람이 공을 손에 들고 있지도 않으니까. 절대 티를 내려고 하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얼굴에 근심과 걱정의 감정 상태가 묻어 나오나 보다. 그런데 나는 힘이 없는 와중에 이 자체를 걱정을 한다. 걱정이 있는 걸 걱정한다. 나에게 공이 없다는 사실, 공을 던질 힘조차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답답하고 난감한 것이다. 평소 너무 쾌활하고 항상 웃어 보이는 탓에 조금만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 티가 나버리기에 그 순간이 꽤나 괴롭다. 조용히 경기장을 나가서 말없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을 때면 매번 누군가 조용히 내게 다가온다. '너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다. 그렇지만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그냥 아예 태도를 보일 수조차 없게 어쩔 수 없이 경기장을 나와버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라는 사람은 그곳을 나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슨 일이 있는 사람이었다. 매일 나타나 항상 공을 양손에 가득 들고 던지던 사람이었으니까. 무언가 미안해진다. 입꼬리가 항상 올라가 있는 탓에 살짝만 내려가도 태도가 바뀐 것처럼 보일까 봐.
⠀하지만 나는 내가 가끔씩 충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애초에 배터리 용량이 커 에너지가 넘치긴 하지만 하루하루 전압이 세고 소비하는 전력이 많은 탓에 잠시 충전을 해야 하는 순간이 필요한 것이라고. 그리고 배터리 자체에 결함이 생기기도 마련이라고. 배터리에 무슨 일이 있으면 제대로 잘 작동하지 않는게 당연하니까. 평소와 달리 내가 말없이 가만히 있을 때, 내 얼굴에 '충전중'이라는 문구가 표시되면 얼마나 좋을까. 내 몸 한 편에 연결된 충전줄을 모두가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절대 '충전 중이니 건들지 마라'라는 뜻은 아니다. 그냥 말없이 가만히 있는 것이 내가 당신들에게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하기 위함이라고, 내일 당신들에게 공을 더욱 잘 던지고 싶어 쉼을 갖는 것뿐이라고. 단지 가만히 있을 뿐인데도 나를 희한하게 봐버리니 가끔씩 혼자 속앓이를 한다. 내가 태도가 바뀐 것이라고 생각할까 봐. 감정이 시시각각 요동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그냥 잠시 힘을 풀어 놓고 싶을 뿐인데, 머릿 속에서 열 일을 하고 있는 탓에 입근육을 쉬게 해줄 뿐인데. 괜히 혼자서 속상해하곤 한다. 나는 항상 웃는 사람이고 싶은데, 불가능하니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알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하지만 나는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다. 어차피 내일 더 잘 던질 것이고 그들과 더 오랜 시간 함께할 것이라는 것을.
⠀누군가 내게 말했다. 넌 휴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고. 힘쓸 때, 안 쓸 때를 잘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 없이 쓸 때 확실히 쓰고, 쉴 때 확실히 쉬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나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 친환경적인 인간이 오히려 더 주변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에어컨도 껐다 켰다 하는 것보다 오히려 계속 켜두는 게 전력 낭비가 덜한 것처럼 자잘한 낭비 없이 쓸 때만 확실히 쓰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새어나가는 행동을 줄이면 에너지가 모이고 활력이 생긴다는 사실. 이를 자각한 후로부터 나는 단지 에너지를 모으는 시간을 가진 것뿐이었다. 예컨대 충전기를 꽂은 채로 휴대폰을 사용하면 배터리 효율이 떨어지기 십상이다. 이처럼 나도 그 시간만큼은 전원을 키고 있지 않을 뿐, 누군가 나를 터치해 나의 속내를 알게 하고 싶지 않을 뿐.
⠀언제나 나는 이런 식이다. 생각에 매번 저렇게 잠기다가도 다시 경기장에 기분 좋게 나타나서는 공을 주섬주섬 주워 손에 꼭 쥔다. 상대와 적당한 거리에 서서 자세를 고쳐잡고 넌지시 미소를 건네며 다시 공을 던진다. 오늘도 나는 누군가를 아웃시키고 있다. 여러 명을 벤치에 앉히곤 한다. 모두 웃을 수 있는 경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모두가 오늘 하루를 즐겼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평소 나는 농담을 던지는 것을 즐긴다. 농담뿐만이 아니라 헛소리하는 것도 좋아하고 장난치는 것도 좋아하며 우스갯소리도 좋아한다. 말이나 글을 즐겁고 재치 있고 능란하게 구사하는 것을 좋아하며, 익살스러움과 유쾌함을 사랑한다. 재미난 이야기를 좋아하며 웃음소리 가득한 공간 또한 좋아한다. 나는 웃음이 뒤따르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활력을 주는 그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한다. 하지만 그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데에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 뒤따른다는 것을. 힘을 헛되이 헤프게 쓰지 않고 적절히 쏟아내기 위해서는 힘의 공허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 웃음의 공백기가 더 이상 길어지지 않도록 힘의 강약 조절을 더욱 적절히 해내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지치지 않도록, 나 스스로 괜히 미안함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만큼만. 정처 없이 떠도는 웃음을 쫓기 위해 너무 힘쓰는 것이 아닌, 웃음소리의 공허함을 받아들이자. 진정 웃음이 뒤따르는 모든 것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