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90
드디어 커튼을 완전히 걷어 젖힌 것이었습니다. 기역 자로 대차게 한 인간을 옥죄고 있던 커튼이 기다란 몸을 숨기며 구석으로 물러나는 날이 찾아온 것이었지요. 겨울바람이 몰래 쳐들어와 커튼을 밀어버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내 왼손으로 네모난 병상의 첨예한 윤곽을 바깥으로 온전히 드러낸 아침이었습니다.
그날 눈을 떴을 때는, 정말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 전날 밤도 마찬가지였지요. 처음으로 병상의 부실한 관절들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 않았고, 창밖으로 비스듬히 보이는 밤은 그 색이 무척이나 연했습니다. 그러한 가벼운 밤 자리에 눕고서 머릿속에 떠도는 상념은 전혀 준비해 둔 것이 아니었고, 즉흥적인 뒤척거림과 함께 경쾌한 얼룩이 그 속을 덮을 뿐이었습니다. 그러고서 아침에는 내 널브러진 신경들이 이상하리만치 부지런한 움직임을 내보였는데, 어쩌면 약간의 흥분이었습니다. 그런 조그마한 흥분과 설렘에 어느새 내 뒤에는 깔끔하게 치워진 병상이 놓여 있었고, 그 자리는 내 지난날의 아픈 흔적이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탈바꿈되어 내가 아닌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듯 보였습니다. 하얀 시트가 완전히 벗겨진 병상 위는 정들었던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 듯 무지 싸늘한 색을 띠고 있었는데, 나 또한 더 이상 그 색깔 위에 몸져누운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뜨뜻미지근한 엉덩이를 그리 오래 맞대주지 않았습니다. 차디찬 것들 사이에서 내 존재감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하물며 시트 안에 감춰져 있던 그간의 압박과 상처의 꼴이 영 말이 아니었기에, 더 이상 그 위에 무겁고 병든 육체를 올려 두면 안 됐습니다.
그 싸늘함을 뒤로하고 나는 주저할 새 없이 얼룩진 환의를 완전히 몸에서 벗겨내고,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그 흔적들을 내팽개쳤습니다. 그러고는 그사이 어색해져 버린 뻣뻣한 옷감을 몸에 갖다 댔는데, 정말 어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은연중에 널널한 환의 속에서 조용히 정체성을 잃었던 내 육체와 정신이 새로운 색과 질감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듯했지요. 내가 이 옷을 입는 날이 다 찾아오는구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감탄을 내뱉고 있던 나였으니 두말할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막상 다 차려입고 나니 괜스레 또 어깨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원인 모를 자신감과 자부심이 힘 빠진 몸속으로 깊게 채워지며 나를 뒤늦게나마 위로해 대는 느낌이었지요. 그 덕분에 늠름한 자태와 산뜻함이 가득한 발걸음을 장착한 나는 괜히 기다란 복도를 어슬렁거릴 수 있었습니다. 두 발은 바닥으로부터 조금 떠 있었고, 어깨와 가슴도 한껏 부풀러 올라 나약한 몸집을 잠시나마 치켜 올려 주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그사이 부푼 기대와 흥분은 한쪽 손목을 조이고 있던 허약함의 증서마저 부러뜨렸는데, 그 허전함의 자리는 곧바로 튼튼한 시계가 메꿨습니다. 오랫동안 차고 있지 않았던 터라, 그 착용감마저 어색했지만 그사이 구멍이 하나 숨어들어 있었기에 그리 나쁘진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때가 돼서야 그곳에서 탈출했습니다. 변모된 계절의 품에 어색한 몸을 갖다 댄 한 인간의 흰 발자국이 곳곳에 찍혀있던 하루였습니다.
병상 위에서는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눈을 뜨기 전, 눈을 뜨고 나서, 그리고 눈을 뜨고 있는 때 모두 헐거운 자국들로 그 자리를 덮어버리곤 했습니다. 그 좁디좁은 공간 속에서 많이 울고, 많이 삼켜내고, 많이 뱉어냈으며,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분비물이 그곳에 널브러져 조촐한 비명을 종일 질러댔습니다. 내가 떠난 그 자리가 겉으로는 깔끔히 치워진 듯 보이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속엔 보이지 않는 눈물자국과 핏자국, 그리고 깊은 고뇌의 비릿한 냄새가 남아있을 테니까요. 끊임없는 혼란 속에서 피어났던 미약한 희망과 어설픈 고독의 흔적, 그리고 여러 허상과 버무려진 약간의 외로움까지. 정말 많은 얼룩이 그 자리에 진하게 묻어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흔적들의 겉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불안의 혼탁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을 것입니다. 칠이 벗겨진 병상 속에는 그간의 온갖 위태롭던 감정들이 파고들어 죽음을 불어넣었겠지요. 만약 이 사실을 그곳의 사람들이 눈치챈다면, 난 할 말이 없습니다. 누구보다 그 공간을 말끔히 치우고 나왔지만, 무언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지금이니까요. 난 참 불쾌하고 무례하기 그지없는 환자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 일주일 동안은 하루도 빠짐없이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건조하고 텁텁한 병실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것은 내 조용한 눈물뿐이었지요. 은연중에 병실 습도 관리에 도움을 준 셈이었으니 조금은 뿌듯할 정도입니다. 사실 그때만큼은 그 누구보다 아팠습니다. 남몰래 초록색 베개에 적셔지는 침묵의 눈물은 그 어느 때보다 오묘한 색깔을 띠었는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소리 없이 그려진 그 눈물자국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내 육체에서 흘러나온 감정이 너무 과한 나머지 병상 밑으로 떨어질 정도였으니까요. 난 그렇게 힘없이 그곳에서 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별의 고통까지 그 위에서 떠안고 싶진 않았기에, 그대로 그 짙은 녹색의 흥건한 골짜기 속으로 잠식되어 조용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위에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편치 않은 몸을 억지로 끌고 나갈 수도 없었을뿐더러, 가령 완전히 다 나았다고 해도 그 건물 밖엔 또 수십 개의 벽이 존재했습니다. 애초에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공간이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참담하고 암울한 현실은 계속해서 내 두 눈을 찔러댔습니다. 그리고 그 환부에서는 투명한 피가 하염없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렇게 한때 나는 그 좁은 곳을 무자비하게 눈물로 더럽힌 파렴치한 놈이었습니다.
눈물을 거하게 쏟아내고 무거운 숨을 바깥으로 종일 내쫓았는데도 나는 단 하루도 깊은 잠에 빠지지는 못했습니다. 간섭이 적은 그곳에서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두 개의 눈알 속에서 양극의 세계를 자꾸만 넘나들었던 것이지요. 눈을 감기 전엔 긴 한숨의 잔여물이 내 얼굴 위를 떠다녔고, 눈을 뜨면 허상임을 깨달은 나의 가엾은 얼굴이 천장에 비춰 보였습니다. 끝끝내 찌뿌드드한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세워 앉아 있으면, 지난날의 허무함과 상실감이 침대 머리맡에 힘없이 떨어졌습니다. 어제의 허상들이 오늘을 끌어내리고, 오늘 일으킨 잠깐의 환상이 변화된 내일을 희구하는 눈빛을 띠기를 반복했지만, 결국은 뿌옇게 흐트러진 허상과 심리적 공허함만이 가득 차버린 하루의 연속이었습니다. 가령 나는 그저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었고, 혼잡한 도시 속에 보통의 시민이 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기 일쑤였습니다. 시끌벅적한 잡음들 사이에 불쑥 끼어드는 경박한 웃음소리, 벅찬 미소에 아려오는 광대의 쓰라린 느낌, 그리고 사람들의 품에서 설쳐대는 그런 해방감을 상상하다 보면 나는 문득 내 앞에 놓인 커튼이 얼마나 단단한가를 실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결국엔 그곳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홀로 시간을 세어가며 다를 바 없는 내일을 고대하던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요. 뒤늦게나마 사람들 곁에 있는 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던 나였습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내 자리로 돌아와 정겨운 사람들을 마주하니, 나의 다급해진 말마디 사이사이에는 기쁨이 메워져 호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즐거움 속에서 숨이 한껏 차오른 광대를 기어코 되찾은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꽤 많은 걸 망각한 채 그 외딴곳에 병들어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 조용하지 않은 인간이 그곳에서만큼은 잠시 정체성을 잃었었다는 사실을요. 병상 위에서의 나는 홀로 세상의 무심함에 험한 생각을 뱉어대곤 했습니다. 환한 창밖이 보일 때면 괜한 노파심을 품고서 스스로를 괴롭히기 십상이었고, 결국 타인의 존재를 완전히 잊은 채, 그저 미디어의 딱딱한 어깨에 삐뚤어진 마음을 기대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모든 것은 이곳의 따스한 기운과 만나 완전히 휘발되어 사라졌습니다. 이번 겨울의 남은 반쪽만은 미약하게나마 녹일 수 있게 된 나였습니다.
그러고 곧바로 크리스마스가 찾아왔습니다. 다행히도 병상 위에서 맞이하는 고독한 성탄절은 피한 것이었지요. 게다가 얼떨결에 바깥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에, 더욱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도시의 추위 속에서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오래간만에 길거리를 누빌 수 있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밥 한 끼를 느긋하게 때우고, 두 손을 주머니에 꽂고서 제 갈 길 가는 빙판 위의 사람들을 곁눈질하고, 홀로 카페에 들어가 생판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의 차를 마시며, 심리적 허기와 물리적 허기를 모두 채우기 위해 베이글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습니다. 그때만은 두 쪽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입을 오물오물하며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한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원인 모를 소름이 몇 번에 걸쳐 계속 온몸에 돋아났습니다. 이번에도 겨울바람의 소행은 결코 아니었고, 그저 유리창 너머를 아득히 바라볼 때마다 한 인간이 어렴풋이 비춰 보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가 내 눈은 어느새 왼편에 놓인 좁은 골목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문득 그사이에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쳤는데, 저 어둑한 곳에 몰래 숨어들어 통렬한 울음을 터뜨리고 싶다는 부끄러운 소망이었습니다. 내가 봐도 괴상한 마음의 각도였고, 혼자 울고 싶다고 읊조리는 나의 입술이 창에 비춰 보였습니다. 하지만 계속 그러고 있을 순 없었기에, 꿉꿉한 머릿속을 환기할 겸 이번엔 오른편으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그곳엔 세 사람이 모여 다정히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얽혀 있었는데, 그들은 하얗지만 독한 연기를 서로의 얼굴에 뱉어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연 대화가 오고 갔고, 그와 함께 불씨의 수명은 점점 사그라들었지요. 그러나 끝내 하얀 숨을 잃은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더러운 잔해를 그대로 길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러고서 어느새 유리창 바깥으로 모습을 감췄지요. 그 역겨운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하나의 물음표를 그 앞에 떨어뜨렸습니다. 더러운 인간성을 스스로 흘리고 다니는 그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면상에 불을 지르고 무참히 짓밟고 다니는 행위에 품은 잠깐의 의문이었습니다. 어째서 그리 당당하게 길거리를 더럽히는 것인지 정말 궁금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향한 약간의 위구심을 혼자 들먹이다가, 나는 다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러고서 조용히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어느 한 페이지를 조심히 어루만졌는데, 이윽고 나는 그 속의 문장들과 정체 모를 선홍빛의 물을 번갈아 마시며 그곳의 시간을 음미했습니다. 추운 겨울 속에 혀와 머릿속이 은연히 뜨거워지던, 고독과 결핍이 조금 첨가되었지만, 꽤나 근사했던 그때의 느낌은 그날의 모멸감을 빠르게 와해시켰습니다.
고요한 티타임을 마치고 나는 곧바로 서점으로 향했습니다. 불현듯 가벼운 시를 조금 읽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까닭이었습니다. 그렇게 서점에 발을 들이고서 나는 수많은 책 사이를 자유롭게 누볐습니다. 사실 그다지 책 읽기에 열성적인 인간은 아닌 탓에, 사람 구경하듯 다양한 맛의 제목들을 시름없이 둘러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한 시집의 표지가 눈에 쏙 들어왔는데, 별다른 탐색 없이 곧바로 책장에서 빼 들고서 계산대로 가져갔습니다.
그냥 그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간의 고독으로 심히 어지럽혀진 머릿속에 사소한 고민을 끼워 넣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나는 그 시집 속의 담긴 시들을 서 있는 채로 가볍게 읽었습니다. 그러고서 책을 가방에 넣고 다시 길거리를 돌아다녔는데, 날이 저물고 나니 두 손이 더욱 차갑게 아려왔습니다. 장갑을 끼지 않고서는 돌아다닐 수 없는 작은 도시 속의 사늘함이었지요. 그러나 나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습니다. 장갑을 낀 내 손은 주머니에 담긴 네모난 무언가를 결코 꺼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나는 주변의 어수선함을 여유로운 눈으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길 위의 사람들은 성탄절임이 무색하게 하나같이 평범했고, 저마다의 사정들이 모여 그저 혼잡하기만 했던 길거리였습니다. 그저 바깥에서 맞이하는 해 질 녘이라는 사실 말고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도시의 저녁이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나는 부질없는 하루임을 곱씹으며 어둠이 스며들기 전에 그곳을 황급히 떠났습니다.
어느덧 일주일 정도가 지나 한 해의 끝자락에 나는 두 발로 간신히 서 있습니다.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다행히 그 밑의 발자국은 꽤 선명합니다. 그간의 발자국들은 결코 아니었지만요. 여름의 자국은 조금 너저분했고, 가을에는 눈에 보이지 않았으며, 겨울의 반 토막은 그 정도가 흐릿했습니다. 비틀비틀 걸어왔던 나의 지난 흔적들이 뒤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것이지요. 온전치 않은 계절의 발자취에 나약한 공백으로 곳곳에 자리해 있는 나였습니다. 그렇게 나는 지금도 별생각 없이 그 얼룩진 계절을 이어 걷고 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끄적임도 생각보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중이지요. 뒤를 돌아봤자 마음만 아려오고, 눈만 피곤해지는 것 같습니다. 약간의 멀미가 차오르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는 앞은 아직 깨끗합니다. 아직 얼룩이 묻어 있지 않아 상쾌한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추웠던 정적의 겨울을 뒤로하고 남은 반쪽을 향해 상쾌한 발자국을 남기려 합니다. 보다 선명하고, 보다 포근하며, 보다 올곧은 발걸음을 내딛고만 싶어지는, 그러한 신선한 새벽이 내게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내일이라고 내게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비슷한 하루의 연속일 뿐이지요. 아직 나의 겨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김없는 차가움의 연속이기에, 내일이 온다고 결코 봄은 아니기에, 나는 그저 또 다가오는 하루를 기다립니다. 얼룩진 계절이 완전히 지워질 때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