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14
오늘도 어김없이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여러 방면으로 붙잡고 있었다. 아침나절에는 몽롱한 눈으로 네모난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는데, 갈수록 그 속은 신선하지 않은 듯 보이는 이야기들로 붐벼댔다. 일전에 과한 웃음을 가져다주던 유쾌한 소리들도 반복적으로 들리다 보니 흥미가 떨어져 소음으로 들릴 뿐이었고, 그 속의 참신한 소재들이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커튼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스스로를 또 한 번 고독의 공간으로 가뒀다. 그 안에서 나는 오랜만에 병든 마음을 챙겼다. 병상 위에 대자로 누워 어젯밤에 꿨던 꿈들을 상기하기 시작했다. 대차게 꿨던 여러 꿈 중 한 다섯 개의 꿈들이 기억에 스쳤는데, 그중에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도 있었다. 매번 전날의 모든 꿈을 다음 날에 꼭 곱씹어 보곤 하는 나지만, 아침의 내 뇌는 네 개의 꿈만을 되뇌고서 회로를 멈췄다.
신선한 단편 영화들의 명장면들을 다시 꼼꼼히 더듬다 보니, 어느새 점심을 먹을 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발끝 위에 놓인 네모난 탁자 위에는 네모난 식판이 올라왔고, 그 한편엔 샛노란 빛을 내뿜는 동그란 것들이 놓여 있었다. 겨울 속에 내가 놓여 있음을 또 한 번 알리는, 다름 아닌 조그마한 귤 세 개였다. 어쩌면 내게는 지겨울 법도 한 색채였지만 오늘은 결코 아니었는데, 난 그 신선함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겨운 반찬들과 밥을 억지로 입에 욱여넣었다.
식사를 끝내고서 마침내 나는 텁텁한 입속으로 그 주홍빛의 과육을 혀 위에 얹어놓았다. 삽시간에 내 혀는 안쪽으로 움츠러들기 바빴는데, 향수가 느껴지면서도 곧바로 잊게 만드는 짜릿한 맛이었다. 그렇게 내 입속은 조금의 실망을 머금은 채 다시 지루한 침묵을 이어갔다.
게으름에 잡아먹힌 육체는 금세 또 병상 위에 늘어졌다. 벌건 대낮은 겨울임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내게 과하게 으스댔는데, 어느새 내 왼편에서는 뜨거운 태양이 창문을 부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 햇빛의 만행은 짙은 블라인드에 가려져 어슴푸레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 과격한 폭행의 현장을 바로 옆에 두고서도 삐딱한 자세로 가만히 누워있기를 유지했다. 병상과 맞닿아 있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목 관절마저도 부러뜨려 통증을 야기할 것처럼 무지 오만한 자세를 취한 채 나는 한 권의 책을 꺼내 들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별안간 내 배 위에 올라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는데, 나는 그의 몸을 양쪽으로 갈라놓고서 조금은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했다. 그 덕분에 약간의 흔들거림과 커튼 바깥의 소음으로 버무린 내 독서는 의외로 순탄히 진행됐다. 책 속의 문장들이 나의 무딘 호흡에 맞춰 위아래로 계속해서 요동쳤지만, 내 눈알은 그 움직임을 곧잘 따라다녔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알베르 카뮈의 수려한 뒤통수에는 점점 살이 차오르고 있었다.
갈수록 뻐근해지는 눈알은 힘겹게 문장 끝으로 무거운 발을 옮겼다. 어느새 내 초점은 한 페이지의 중간에 놓인 어느 마침표에 다다랐는데, 끝내 그 동그란 성취감을 삼키지 못한 채 완전히 흐려지고 말았다. 그 순간, 갑작스레 불그스름한 햇빛이 불안한 자세로 서 있는 <이방인>의 가랑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금세 내 앞에 놓인 문장들은 뜻밖의 온기를 뿜어댔는데, 그 주홍빛의 페이지를 보고 있으니, 내 두 눈은 다시 곧바로 동그래졌다. 하지만 금방 또 그 문장들은 푸른빛에 잡아먹혔다. 짐작건대, 태양의 만행을 구름이 블라인드에 앞서서 막아주고 있는 듯했다. 둘 사이의 공방이 계속 이어지면서, 그 둘은 책 한 페이지에 담겨 있는 분위기를 거듭 바꿔놓기를 일삼았다. 주홍빛과 푸른빛이 교차하면서 간만에 순조롭게 진행되는 나의 독서가 방해받는 듯했지만, 오히려 그 둘의 치열한 싸움을 구경하느라 그 속의 글들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 그렇게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배 위에서 벌어지는 그 재미있는 광경을 얌전히 지켜보며 무료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금세 또 눈알 주위로 노곤함이 밀려왔다. 어느샌가 명치 위로 다가온 이방인은 이제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나는 그의 가랑이 사이에 조그마한 종이를 끼워두고서 편안한 자세로 내 옆에 눕게끔 했다. 그러고 나는 곧바로 몸을 옆으로 웅크린 뒤, 그를 품 안에 둔 채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드는 잠에 빠져들었다. 무기력함을 더욱 자극할 수면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지루한 시간을 때우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불편한 잠에 빠진 지 어언 두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다시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커튼 바깥으로는 미디어의 호탕한 소음들이 쏘다니고 있었다. 그런 역겨운 소리를 애써 가리고 있는 커튼을 걷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있는 힘껏 걷어 재꼈다. 끝까지 펴져 있는 것에만 익숙했던 커튼이 처음으로 그 긴 몸을 감췄는데, 겹겹이 옆으로 눌려 있는 그 몸이 외려 내 눈엔 편안해 보였다. 그의 희생 덕에 나는 탁 트인 병동의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별 감흥은 없었다. 그저 왼편에서 뿜어져 나오는 햇빛과 화면 속의 익숙한 사람들, 그리고 뒤편에서 나를 유혹해대고 있는 무기력함을 애써 외면하기 위한 넓은 시야의 확보였다.
얼마 못 가 나는 다시 커튼의 멱살을 잡고서 반쯤 끌어 옮겼다. 그러고서는 병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이방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가랑이 틈에 낀 종이를 빼주고 난 뒤 다시금 그의 속을 들여다보려 노력했는데, 이번엔 또 생각만큼 그의 말들이 읽히지 않았다. 어째선지 내 머릿속엔 계속해서 딴생각이 쳐들어오고 있었다. 두 눈알이 문장들 사이에 파묻혀 있기를 유지할 뿐, 머리는 그 속내를 전혀 빨아들이고 있지 못하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영화를 감상하기로 했다. 커튼 바깥의 화면 속에서 내뿜는 지겨운 이야기들이 아닌, 내 머릿속에서 기꺼이 꾸며낸 전날의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 기억이 어느 정도 희미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떻게든 그 생생한 현장을 다시 더듬어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끝내 아침나절에 되뇌었던 네 개의 꿈 중에서 세 개의 꿈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생존자들 사이에 불청객이 끼어들고 있었다.
악몽이었다. 머리를 쥐어짜며 기억을 불러일으키다 보니, 불현듯 망실 상태였던 악몽까지 뇌리를 스쳤다. 급하게 잊어보려 했지만, 쉽게 떠나지 않았는데, 그래도 남아있는 세 개의 환상만을 계속 상기시키니 결국 그 악몽을 끝내 짓밟을 수 있었다.
세 개의 영화 중 가장 환했던 하나의 작품만을 간단히 이야기해 보자면, 그 내용은 이랬다. 마침내 간만에 해외여행을 떠나게 된 우리 가족의 들뜬 표정을 비추며 그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 내가 가장 신나 있었다. 꿈을 너무도 많이 꾸는 나머지, 그 속에서 자각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던 나지만, 어젯밤만큼은 그 경계가 조금은 견고한 것이 분명했다. 꿈과 현실 사이의 틈이 완벽하게 갈라지면서, 병상 위는 물론이거니와 아예 이 외딴곳을 벗어나 내가 완전히 해방을 맞이했다고 믿게끔 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순간을 완전히 만끽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환희에 가득 찬 나머지 그 속에서 급기야 가족들을 잊고서 혼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고서 바로 옆 동네인 일본으로 향했는데, 사실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단지 여행을 떠난다는 것에 벅찬 기쁨을 머금었던, 그 짜릿하고도 경이로운 느낌과 감정이 이 꿈의 대부분이었다. 아무튼 나는 일본에 잠깐 머물다 곧바로 몽골로 떠났고, 몽골의 어느 아름다운 관광지를 혼자서 마음껏 밟고 다니다 그 환상은 마무리를 짓는다.
한 편에 자리했던 끔찍한 악몽을 끝내 지워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처해 있는 현실을 완전히 벗어나게끔 해준, 더할 나위 없이 희망찬 상상이었다. 차가운 한밤중에 나는 남몰래 희망을 머금었고, 하루 종일 그 꿈을 머릿속에 소중히 간직했다. 비로소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그 꿈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하루 내내 기분이 꽤 나쁘지 않았다. 지루하게만 흘러가는 일상, 그리고 전날의 악몽이 만들어 낸 찝찝함, 또한 더 이상 신선함을 가져다주지 않는 커튼 바깥의 소음들을 완전히 잊게 만든 것은 단연코 그 안에서 품은 희망이었다. 비록 헛된 희망이었지만, 그 거짓된 기억을 생생히 곱씹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기분 좋게 붙잡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서야 나는 내 앞에 놓인 커튼 안팎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안타깝게도, 나는 여태껏 내 머릿속에 놓인 커튼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희망을 절로 머금으며 비로소 절망을 누그러뜨리고, 신선함을 끌어오면서 기어코 지겨움을 잊어버릴 수 있는 인간이었다. 내 마음과 머릿속엔 분명히 커튼이 존재한다. 내 눈앞에 놓인 모든 것들은 내 안에서 나오고, 내 안에 없는 것은 바깥에도 없으니까. 그렇게 나는 오늘 밤에도 커튼 속에서 희망을 머금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커튼을 내일 어떻게 다룰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희망은 절대 뱉지 않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