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18
여름 다음 겨울이었다. 여름 그리고 겨울. 이곳에서 가장 오래 머무른 누군가가 우리에게 꺼낸 섬뜩한 문장이었다. 숨 고를 틈 없이 그의 입에서 뜨거움과 차가움이 동시에 쏟아져 나왔는데, 이 외딴곳에서는 양극의 공기가 그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던 호흡이었다.
그의 가혹한 날숨에 나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격렬한 뜨거움에 싫증을 내며 새벽을 부둥켜안고서는, 어느새 뜨거움을 그리워하며 얼어붙은 기지개를 켜고 있을 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러나 정말로 내 앞은, 그의 말이 틀린 문장이 아님을 온몸으로 끄덕이는 날의 연속이었다. 어느새 내 입은 뜨거운 한숨을 토해내고 있었고, 입술 위에는 긴 가뭄이 찾아왔다. 꿈을 꾸기 위한 눈 감음엔 점점 두려움이 도드라졌고, 어느샌가 잠결에 추위로부터 몸부림치고 있는 스스로를 어둠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찝찝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겨울 냄새를 맡고 있었다. 차가워진 손발은 냉정함을 유지하지 못한 채, 결국 서로의 짝을 찾아 마구 비벼대기 시작했다. 정말 내 온갖 낭만적인 감정들이 거부하는, 다소 섣부른 추위임이 분명했다. 여름 다음 겨울, 봄과 가을엔 기회조차 주지 않는 이곳이 참 밉기도 했다. 하지만 그 미움은 금세 사그라들 수 있었다. 망실 상태인 가을을 끝내 완전히 잊어버린 나는, 더이상 가을을 찾으려 들지 않았다. 애초에 가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친절한 겨울이 일찍 내 곁에 다가올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뻗은 손은 불친절했다. 어찌나 딱딱하고 차가운지. 몹시 냉정한 겨울의 무뚝뚝한 손은 기꺼이 내게 쓸데없는 의문을 쥐여 주었다. 왜 가을을 먼저 내보내지 않았느냐고. 어째서 가을이 뻗는 다정한 손을 제치고서 먼저 내 손을 잡았냐고. 그러나 겨울은 답이 없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묵묵히 나를 설득할 뿐이었다.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따뜻함을 한 입 더 베어 물고만 싶었다. 내 몸을 잽싸게 뚫고 들어오는 겨울의 짓궂은 손을 어떻게든 뿌리치려면 더한 온기를 속에 품어야 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여름과 불편한 어깨동무를 했던 내가 어느새 떠나가는 붉은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여름의 뒷모습을 아련히 쳐다보는 내 두 어깨는 결국 냉정한 겨울바람의 무게에 천천히 주저앉아 버렸고, 나는 어떻게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찾아보려 온몸을 휘감는 따뜻함의 두께를 늘리기 시작했다. 칼 같은 바람이 내 몸에 은은한 상처를 남기게끔 놔두고 싶지 않았기에, 나의 숨겨진 쓸쓸함을 오묘하게 자극할 겨울의 날카로운 눈을 피하려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싫증을 내며 후덥지근한 공기들을 기피하던 내가 뜨거움과 섣부른 만남을 추구하고만 싶어졌는데, 그 기분이 참 묘했다. 황망함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서투른 욕망과 결핍이 나를 계속 흔들어 놓는 것이 틀림없었다.
의도치 않게 갈수록 요란해지는 공기의 흐름에 매년 겁을 먹는 것은 나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머무른 지 한참 된 그들도 좀처럼 저돌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디론가로 숨지도 못할뿐더러 나처럼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지도 못하는 나무들은, 오롯이 제자리에서 그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따라서 나무들은 이제껏 아름다움을 내비쳤던 잎들을 재빨리 밑으로 떨어뜨렸다. 더 이상 힘이 되지 못하는 옷감들을 쓸쓸한 모양으로 길바닥에 내놓았고, 주저할 새 없이 그동안 곪았던 가지들을 스스로 부러뜨렸다. 그러고는 허약해 보이는 알몸으로 매서운 바람들을 애써 웃으며 반겼다. 차가운 공기에 맞설 채비를 단단히 한 듯 보였지만, 어쩌면 몹시 가련한 나무들의 빈약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어여쁜 지난날은 바스락한 소리를 지르며 지나가는 내 발밑에 죽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듯 보이는 가지들 또한 금방이라도 꺾어질 것만 같았는데,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두꺼운 옷을 단단히 여몄다.
성미 급한 겨울은 어느새 나를 한 해의 끝자락에 바래다 놓았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기만을 기다렸던 잔혹한 여정이었지만, 내가 무얼 남겼나 하는 후회와 상실감에 너무도 급하게 도착한 12월은 그리 썩 반갑지 않았다. 통증을 한편에 계속 지니고서 섣부른 추위와 어색한 팔짱을 낀 채로 맞이한 이 계절은 나를 더욱 쓸쓸한 곳으로 내모는 듯했다. 어째서 여름 다음 겨울일까. 어째서 이 외딴곳은 내게 숨 고를 틈을 주지 않는 것일까. 병상 위에서 맞이한 겨울바람은 더욱 가혹한 정적을 내게 가져다주었고, 그 후로 오랫동안 나를 미련한 인간으로 대우했다. 내 환의는 몇 번이고 벗겨졌고, 짙은 흉터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내 힘찬 상념들은 갈수록 차가운 벽과 커튼에 막혀 터무니없이 바닥에 내려앉았고, 머릿속은 흐릿한 희망과 게으른 잡념으로 가득 찰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 벗겨진 나무처럼 한 명의 병든 환자로서 병실 한편을 묵묵히 지켰다.
아침이면 부모의 메마른 목소리를 떠올리고, 낮이면 친구들의 가냘픈 웃음소리를 갈구하고, 밤이면 고즈넉한 분위기 속 술잔이 부딪치는 투명한 소리를 갈망했다. 인간들 사이의 따스한 구석에 앉아 아무런 걱정 없이 자유롭게 떠들고 숨죽이고를 반복하는, 그런 자유로운 들숨과 날숨의 조화가 무척이나 그리운 나날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소음에는 그 어떠한 친근함도 묻어있지 않아 내 귓속은 항시 메말라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의 터프한 휠체어 바퀴 소리, 누군가의 무뚝뚝한 응급 벨과 터벅터벅 다가오는 도움의 발소리, 그리고 몇몇 환자들의 힘없는 푸념과 한숨만이 가득한 이곳에는 따뜻함이랄 것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겨울이 다가왔음에도, 이 안의 소리들은 하나같이 찝찝하고 무언가 모르게 갈증이 섞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갑작스레 첫눈이 내렸다. 일어나 보니 얼어붙은 창밖이 온통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즐기지 못했다. 처음으로 눈이 오는 순간도, 모두가 하나 되는 순간도. 새하얀 겨울 속에 기꺼이 뜨거움을 내비치는 붉은 유니폼들을 나는 차갑게 외면해야만 했다. 눈앞에 따뜻함을 두고도 나는 그것을 쟁취하지 못했다. 붉은 열기는 새까만 화면 속에 가려져 온전히 내게 닿지 못했고, 나는 그 뜨거움을 등진 채 춥고 냉정한 새벽을 조용히 부둥켜안아야만 했다.
불쾌한 잠이었다. 그러한 불쾌한 잠을 힘겹게 이어가다 작은 소란에 불현듯 눈이 떠졌는데, 시계를 보니 두 시가 조금 안 되는 시간이었다. 우리의 불편한 수면을 더욱 약 올리기라도 하는 듯, 그들의 배려 없는 환호와 박수 소리가 저만치서 울려 퍼졌는데, 그 알량한 탄성은 몸져누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아쉬운 눈꺼풀을 닫는 수밖에. 그러고 아침에 일어났을 땐, 이미 식어버린 붉은 땀과 열기에 한기가 더해져 소름이 조금 돋을 뿐이었다. 약간의 서러움이 섞인 찬탄을 뒤늦게 그들에게 뱉은 나였다.
차가운 겨울을 곁에 둘수록, 따뜻한 사람과 따뜻한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온기를 나눠야 함에도 내 몸과 마음은 아직 차가움을 유지하고 있다. 그 어떤 곳보다 차가운 곳에서 차가운 사람들과 차가운 말을 나누며 차가운 고통을 묵묵히 홀로 견디고 버틴다. 이처럼 차가운 것투성이인 지겨운 일상에서 뜨거움을 내비치는 것은 입에서 나오는 한숨뿐이다. 그러나 매일 주변인들에게 무심히 전하는 메시지 속의 '하'는 몹시 차갑기 짝이 없다. 이유 없이 힘없는 한 글자로밖에 전해지지 않는 내 하루가 참 비참하고 음울해 보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고통, 차가움을 뚫고 열을 뿜어낼 수 있는 행위의 부재, 그 누구와도 따뜻한 온기를 나누지 못하는 서러움은 생각보다 큰 통증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엄습해 오는 냉철한 추위에 호되게 두 뺨을 얻어맞고만 있었다.
여름 다음 겨울. 눈 씻고 찾아봐도 가을은 없었다. 다정한 가을을 곁에 두고서 스스로 몇 가지 질문을 건넬 기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한 해 동안 내가 열매를 얼마큼 맺었는지, 어떤 아름다운 색채를 그동안 내뿜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여름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겨울이 다가오고, 뜨거운 감정을 쏟아내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우리는 몸을 웅크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겨울은 더욱 큰 냉철함을 지닌 채 우리를 감싸 안고 있다. 이제 더이상 단순한 계절의 넘김이 아닌 듯 보인다. 여러 감정과 상념들이 추위 속에 침잠하는, 몹시 냉혹한 계절과 우리는 성급한 만남을 갖고 있다.
갈수록 가을은 사라지고 봄도 우리 곁을 그리 오래 머물지 않는다. 지금부터라도 여름과 겨울, 두 계절에 익숙해져 의연하게 맞서는 법을 차근차근 배워야만 하는 것일까. 겉이 차가울수록, 따뜻한 속을 가지고 서로를 보듬어줘야 이 계절을 고통 없이 즐길 수 있는 것일까. 슬슬 냉정한 겨울바람과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외딴곳에서 더 큰 실망을 안고 쓸쓸한 잠에 빠지지 않으려면. 괜스레 뜨거움을 그리워하며 스스로를 추위와 통증 속에서 더욱 내몰지 않으려면, 그냥 이 가혹한 순환에 몸을 맡겨야 할 것 같다. 차가움 또한 따뜻함을 만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니까. 그저 여름 다음 겨울, 여름 다음 겨울, 다음에 있을 조금은 더 찬란할 겨울을 묵묵히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