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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요일 Jan 22. 2023

A 씨, 겨울 꽃이 피었어요

D-268

  죽음이 그리 쉽게 찾아오는 거라면, 죽음이 결국 계절의 일부인 것이라면, 어려울 것도 없는 것 아닌가요. 두려워할 것도 없는 것 아닌가요. 어차피 오늘도 죽고, 내일도 죽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죽어 나갈 테니까요. 어제, 그제도 누군가는 죽었을 테니까요. 한데 난 어째서 아직도 죽음을 자연스레 여기지 못하는 걸까요. 아무런 힘없이 부르르 떨리는 몸을 추위 속에 부여잡는 것, 그러고 겨우 하나 부지하고 있는 목숨을 망연히 가혹한 공기에 내어주는 것, 그게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어젯밤의 나도 격정의 몸 떨림을 작위적인 어둠 속에 내보이지 않았겠지요. 이제껏 죽음을 이리저리 회피하고 다녔던 내가 어쩌면 조금 얄밉습니다. 방금에서야 홀연함을 되찾은 마음이 다른 이의 외로운 주검에 또다시 여러 갈래로 찢어지고 있으니까요. 그 균열 속에는 모난 세상을 향한 모멸감과 회의감이 슬며시 깃들고 있습니다. 씁쓸한 고통이 스며든 환부에서는 계속해서 전복적인 성격의 핏물이 흘러나오고, 그 주변의 구태의연한 눈빛들은 저절로 파멸하지요. 뼈아픈 통증에 그리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는 나는 시체 위로 개탄스럽게 쌓인 눈들을 두 발로 무참히 짓밟아 버리고, 그 흔적들을 무심한 세상 쪽으로 흩뿌리는 중입니다. 흰 눈으로 덮인 계절을 기어코 붉은 피로 칠하는 인간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의 무게를 두 손으로 가볍게 짊어진 자들의 면상에 그 새빨간 눈덩이를 던져버리고만 싶어지는 것이지요. 내가 죽지 않는다고 이 세상이 하얗진 않다는 것을. 그 어딘가에서는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발자국이 고요히 남아 우리를 쳐다보고 있음을, 나는 새삼스레 깨닫고 마는 겁니다.     


  바깥의 도시 속에서는 작은 새들이 여기저기서 날아다닙니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날갯짓을 펼치며 어지러운 세상을 이리저리 구경하지요. 그런데 갑작스레 죽습니다. 이곳에서도 죽고, 저 먼 곳에서도 죽어버리지요. 한적한 길을 따라 계속 맥없이 무언가가 죽어나는 겁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만 마리의 새들이 허망하게 죽음의 유리창을 맞닥뜨리고 있지요. 뾰족한 이기심에 잡아먹힌 인간들이 그 조그마한 새들을 감싸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게 잘려나간 새의 동그란 대가리는 길바닥에 처참히 널브러지고, 인간들은 그 옆을 무심히 지나칩니다. 어떤 것들은 초록 풀더미 위에 편안히 자리해 있기도 하지만, 이미 숨이 멎어버린 가엾은 사체들일 뿐이지요. 새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저 먼 나날을 바라보며 무던히 날아갔을 뿐, 그저 인간들이 꾸며낸 투명한 벽에 머리를 처박고, 아래로 고요히 떨어져 결국 목숨을 잃었을 뿐이지요. 몇몇 사람들은 그 아까운 생명 위로 눈물을 떨어뜨립니다. 대부분은 관심도 없지요. 이것이 정년 세상의 이치인 걸까요. 그저 그들은 조용히 죽어야만 한다는 저주를 받았을 뿐, 그저 나약한 육체를 지니고 태어났을 뿐인 걸까요. 어째서 그러한 죽음들은 소외되고, 버려지고, 그리고 순식간에 잊히고 마는 걸까요. 나는 몹시 무서울 뿐입니다. 죽음이 이리도 별일이 아니었던 거라면, 죽음이 이리도 쉽게 여겨지는 거였다면, 어젯밤 몸을 격렬히 웅크리지 않았을 거라서요. 굳어버린 몸의 힘을 축 늘어뜨리고, 차가운 길바닥에 아껴놓은 체온을 뚝뚝 떨어뜨리며, 다가오는 아침을 결코 기다리지 않았을 거라서요. 지금의 난 더욱더 두렵습니다. 젊은이의 얼어붙은 살갗이 완전히 소실될까 봐, 그렇게 자연스레 내 육체 또한 언젠가 눈더미 속으로 조용히 숨어들까 봐 난 몹시 두렵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엔 한 송이의 겨울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흰 눈 알갱이들 속에서 누구보다 발랄하고 그윽한 향기를 내뿜으며 외로이 피어나고 있지요. 눈치 없게도 나는 그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습니다. 또다시 나 스스로가 미워지는 중이지요. 그러나 난 그 꽃을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여름이 찾아와 주변의 눈이 다 녹아버린대도, 다시금 싸늘한 계절이 밀려와 눈보라가 몰아친다 해도, 난 어젯밤의 추위를 망각하지 않을 겁니다. 아직도 죽음은 내게 너무나 어려워서요. 아직도 죽음이란 두 글자는 내겐 너무 괴로운 활자라, 난 그 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스스로가 죽음으로부터 가벼워질 때까지, 나 또한 어떤 계절의 꽃으로 피어날 때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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