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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요일 Apr 02. 2023

사월의 허공, 이일의 공허

D-198

  아니나 다를까 핑크색으로 물든 그들의 허공, 네모난 세계를 가득 채운 꽃잎들과 북적거리는 인간들, 그리하여 파생되는 빛의 연속성은 내 초점을 더럽히고, 그렇게 발현된 진정한 허공을 나의 어지러운 눈깔에 갖다 대면 공허다. 공허만이 허공이고, 허공만이 공허를 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오묘한 기분. 그럼 내 삶은 공허의 무한한 스펙트럼, 타인들에게는 영원히 비가시적인 빛, 스스로만이 느끼는 개탄 섞인 고백의 향연·····.      


  가라앉지 아니하고 격하게 들끓는 그들의 핑크색 핏줄, 그리고 그 속에 자리한 사랑의 기운은 날 제압하고, 난 그저 눈알을 동그랗게 부릅뜬 하등한 존재다. 네모에 공격당하지 않으려 죄수는 목구멍 너머로 동그란 밥알을 찬찬히 넘기고, 그 안의 시커먼 신경들은 귀소본능을 어떻게든 억제한다. 그렇게 피어난 제삼의 빛은 조용히 내 육체를 안쪽에서부터 태우고, 허공을 수놓은 무쓸모의 단상들은 핑크빛 바람에 사라져 버린다. 이제부터 난 눈을 감아야 할 존재, 그래야만 연명할 수 있는 녹색의 심장을 가져버린 자이고, 하나같이 갈증 섞인 이곳의 식물들은 그 심장마저 잃어버린 게 틀림없다. 나의 꽃은 눈을 떠야 할 필요성을 언젠가부터 삭제당한 것이고, 그렇게 나는 오늘과 내일을 잃는다.      


  자꾸만 나를 헛된 계절 속에 가두는 그들의 반듯함. 내 시선은 무수한 꽃잎들의 곡선을 타고서 그사이에 자리한 여백을 마음껏 통과한다. 그러나 내 신경은 각진 모서리에 부딪혀 다시 꽃잎의 눈을 찌르고, 그렇게 흘러나오는 향기는 곧바로 악취로 변한다. 실제로 내 앞에 보이는 것은 꽃잎이 아닌 휑한 나뭇가지들이고, 그 밑에서 멍하니 고개를 올려다보면 같잖은 구멍들이 송송 뚫린다. 그 틈에는 하얀색 하늘과 구름 한 점, 일말의 상실감과 회의감이 투명하게 그려지고, 그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다시 공허, 어지럽게 말하면 허공이다.      


  진정한 의미의 허공. 모양도 빛도, 아무런 단상도 없는 무위의 세계. 그 흔한 사랑이 한 점도 존재하지 않으며, 조금의 생명력도 피어나지 않는 그런 공간. 난 이 속에서 남몰래 허영을 간직하고, 뜻 없는 타성에 젖는다. 내 머리통 위는 심장을 잃어버린 꽃이 힘겹게 꽃망울을 움켜쥐고 있으며, 나 또한 그와 다를 바 없는 생명체다. 언제 터뜨릴지 모를, 그런 불가해한 생 속에서 발버둥 치는 공허 속의 생명력. 마지못해 터지는 건 심약한 가슴속에서 나오는 눈물이며, 그새 변색된 내 심장은 썩은 귤색을 연상케 한다.     


  마음의 저변에서 타고 오르는 원인 모를 원한과 증오, 그리고 그것들을 기꺼이 애정 어린 색으로 치환하는 나의 혀를 적당히 자르고 싶어지는 지금의 기분. 그러나 그 혀가 세상 바깥으로 튀어나온 날은 바로 오늘이고, 내 혓바닥은 원래부터 핑크색이다. 그럼 나는 무얼 음미하든 핑크색. 그럼에도 그 위는 공허가 눅진하게 내려앉는다. 공허는 허공, 허공은 공허. 사월의 허공, 이일의 공허. 그렇게 오늘도 내 어지러운 미각 위는 작은 허공이 되어버리고, 나는 널브러진 타인의 빛깔을 잽싸게 주워 먹는다. 그렇게 난 공허와 함께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며 탄생의 기념사를 입 밖으로 조용히 뱉는다. 카악-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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