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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요일 May 20. 2023

겁쟁이의 고백에 관하여

D-150

  육체 곳곳이 텅 빈 것만 같은 일상의 연속, 여러 개의 구멍이 송송 뚫린 내 정신줄과 얼굴에는 어느새 초여름의 뜨거운 태양빛이 스며드는 중입니다. 인간들의 머리통 위로 내리뻗는 긴 주홍빛은 내겐 썩 반갑지 않은 온도인 탓에, 미련한 인간은 요 며칠 동안 글쓰기라는 행위를 완전히 잊고 살았습니다.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머릿속을 나뒹구는 삶의 응어리들은 어느샌가 울음을 그쳤고, 내 감정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인들에게마저 내 말랑한 입꼬리는 어느새 새침해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관한 아주 약간의 고민,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해방감에 관한 또 아주 약간의 고뇌들이 지속적으로 쌓이다 보니, 내 몸과 마음은 대체 어떠한 색채를 띠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중입니다. 더군다나 첫 문장을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내 손가락을 볼 때면, “너 요즘 꽤나 방황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감정을 토해내는 법을 망각했나 싶을 정도로, 내 목구멍은 며칠 동안 문을 굳게 걸어 잠갔고, 그간 써왔던 문장들에는 그 순간만의 고유한 체취가 완전히 시들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들의 부재, 그에 따른 나 자체의 무의미함, 그리고 요즘따라 나를 가만두지 않던 이 외딴 세계가 내 엄지의 지문을 조금씩 떼어가고 있던 것입니다.     


  메모장을 채워나가는 삶이 조금 힘겹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좋은 징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여태껏 내 안의 활자들을 역류하게 만든 것은 일종의 우울이었습니다. 슬픔과 괴로움은 배로 격앙되어 다가오기 일쑤였고, 즐거움마저도 외로움을 동반한 채 찾아왔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문장을 끄적이게 된 계기들은 대체로 나의 지난 과오, 어쩌다 발견된 옅은 상처, 그리고 나와 비슷한 타인들의 통증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날이 대부분인 탓에 아무런 것도 눈에 담기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색깔들이 좀처럼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물론 현재의 내게 이 세상이란, 무척 조그맣고 불편한 곳에 국한됩니다). 그렇게 나는 자연히 활자들을 멀리하게 된 것이고, 잠깐 사이에 까막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헤밍웨이의 문장 하나가 번뜩 뇌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글쓰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타자기 앞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다.” 마침 작업을 하다 베인 오른손 약지의 상처에는 불그스름한 피가 차츰 말라가는 중이었고, 다시 다른 종류의 피를 흘릴 차례이긴 했습니다. 오늘따라 유독 아려오는 신체의 통증 또한 나를 더한 떠돌이로 내모는 중이었는데, 주변의 맥없는 눈빛들과 무책임한 표정들은 골몰하는 눈동자의 움직임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기에, 얼떨결에 쓰라린 약지를 타자기 아래에 받친 채 오랜만에 이 단편적인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뜨겁지 않은 열정을 내가 품고 있었나 봅니다. 세상의 어느 한구석에 고립된 채로 살아가고만 싶어지는 요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잔뜩인 이 세상 속에서 난 대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미디어의 자극적인 말장난, 넘쳐나는 타인들의 사적 행보, 훤히 보이는 피로한 내 일상들. 이 네모난 세상에는 뭐가 이리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인간들을 부추기는 여러 허풍과 사탕 발린 조언들이 이제는 좀 따분하게만 느껴집니다. 폭력과 혐오가 만연한 이 세계 속에서 나는 더욱더 거대한 냉소주의자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나를 좀 내버려 뒀으면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들지만, 이 단말기의 반듯함과 적지 않은 무게에 짓눌린 내 손가락의 굴곡이 온전히 내 잘못임을 대변하기에 사실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요즘 그 못난 손가락으로 지구를 쭉 둘러보는 중입니다. 손가락 두어 개로 세상을 자유로이 거닐며 가고 싶은 장소들에 하트를 달아놓는 것이 내 오랜 취미라서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실제 두 발은 여전히 묶여 있는 탓에 이 짓만이 내게 최선입니다. 그저 부지런한 여행객으로 이 세상을 향유하고 싶을 뿐이기에, 핑크빛으로 이 새까만 지구를 물들이려 무지 애쓰는 중입니다. 그러다가도 부질없는 알림들이 내 행성 위를 들이닥칠 때면, 나는 생각만큼 그들을 용감히 무찌르지 못합니다. 아직도 이 넓은 세상의 유려한 떠돌이가 될 자격이 현대인에겐 한참 부족한 듯싶습니다.     


  요즘 음식을 천천히 먹는 버릇을 들이고 있습니다. 맛과 향을 느긋하게 음미하기 시작하니, 내 혓바닥 위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죽음을 맞이하는 재료들이 늘었습니다. 즐겁든 불행하든, 곱씹을 시간도 없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기에, 차라리 여유를 가지고 이 세상의 알싸한 맛을 제대로 느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요즘 입이 짧아졌습니다. 천천히 먹으니, 맛은 다소 떨어지고 조그마한 양에도 만족하게 되는 탓에 이 세상이 참 시시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입으로 대충 욱여넣는 무언가가 참으로 부질없게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잠깐이나마 했던 나 자신이 지금은 살짝 우습게 느껴지긴 합니다. 얼마 안 가서 다시 현대 사회의 흐름에 편승한 숟가락질이 내 손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제부터 손목의 힘을 조금 늘어놓고 살아 보려 합니다. 이 속에서도 시간의 자유를 조금은 쥐고 있기에, 난 거기에 여유를 추가하여 일상의 느긋함을 쟁취해 볼까 합니다. 더럽고 추잡한 세상도 여유롭게 둘러본다면, 고약한 냄새가 적응되어 차츰 향기롭게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앙상한 생각이 드는 지금입니다.     


  적당한 알코올은 얼추 아름다운 게 분명합니다. 최근에 마신 사케와 고량주의 향긋한 냄새가 그랬습니다. 기분 좋게 잠자리에 눕고 나니, 그날의 내 엄지는 자연스레 여러 감정을 메모장에 꺼냈습니다. 손가락들이 이리저리 꼬여있던 때인데도 말입니다. 알딸딸한 느낌, 진작이 힘을 잃어버린 한쪽 눈알, 그리고 나머지 동공과 남겨진 편두통의 미세한 힘으로 이끌어낸 어두운 새벽 속 네모난 빛 번짐은 참으로 우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무언가에 오묘하게 취해 있는 순간을 항상 갈망하는 인간에게 이보다 간편한 사생활은 없는 듯합니다. 물론 과도한 음주는 좋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감정을 토해내는 것이 아닌, 더욱이 복잡한 걸 토해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타자기 앞에서 피가 아닌 다른 내용물을 흘리는 것은 모두가 용납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기에 알코올은 목구멍이 적당히 잠겼을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다툼은 항상 적개심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불필요하게 피어난 적의는 안 그래도 삭막한 세상에 빨간 잉크를 들이붓고, 주변에 서성거리는 인간들의 눈꼬리를 양 끝으로 한껏 찢어 올립니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못된 것 같습니다. 감정에 솔직해질 때마다 찾아오는 자괴감, 그리고 이 어정쩡한 사회를 노려보는 내 매서운 눈매는 매번 심장을 군데군데 찌르는 듯합니다. 쓸모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온종일 떠돌고, 나는 결국 주변을 맴도는 이들에게 의심 아닌 의심을 잔뜩 품곤 합니다. 부정은 정말 끝이 없기에 이것이 참 위험한 행위임을 잘 알면서도, 한 번 묻은 적의는 잘 지워지지 않아 참 곤란한 요즘입니다. 그럼에도 그 칼끝이 내 심장으로 향하지 않게끔 애써 마음을 다스려 보는 중입니다. 어떻게든 잘 풀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별안간 농후한 콧수염을 가진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갈색 코트에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앳된 노트북으로 글이나 쓰는 인간이 되고 싶어진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그냥 어느 날 무거운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조용히 구석에 박혀 타자기나 두드리는, 사사로운 감정들을 그저 묵묵히 터뜨려 나가는 그런 강한 사람. 그냥 그런 꿈을 잠깐 꿔본 적이 있다는 싱거운 이야기에 그치는 문단의 시작입니다. 사실 요즘 들어 기묘한 생각이 드는 날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미쳐야 하나, 이렇게까지 입꼬리를 찢어야 하나. 그런데 짜증 나게도 그게 나라서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가장 편하고 즐거울 때가 미친 듯이 미소 짓는 사람들 앞의 한 광대로 실존할 때라는 사실. 잠시라도 입을 닫고 있으면 누군가 슬쩍 다가와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는 게 내 인생이기에, 단 하루도 미소를 띠지 않으면 도태되는 운명임을 나는 일찍이 받아들였습니다. 이 또한 내가 자초한 일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누군가 취미가 뭐냐고 내게 물었습니다. 나는 곧바로 ‘글쓰기’라고 대답해 버렸습니다. 이상하게도 질문에 답하는 데에 전혀 막힘이 없었습니다. 진정 취미랄 것이 내게 생겼다니. 노래 듣기나 영화 감상과 같은 성의 없는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니. 난 어느샌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어쩌면 농후한 콧수염의 남자가 벌써부터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렇게 진실한 호흡이 줄줄이 나열된 글은 처음 써보는 것 같습니다. 온갖 상념에 휩싸여 방황하던 나의 활자들이 오늘은 무척이나 정갈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쳇바퀴 돌아가듯 흘러가는 일상들, 잠깐의 행복감으로 유지하고 있는 삶, 난 그저 그 틈에서 삐져나온 무언가를 기록할 뿐이지만, 그래도 이 과업이 내 안에 들끓는 일말의 두려움과 불안을 조금이나마 잠재우는 듯합니다.     


  바깥의 세상은 늘 소란스럽지만, 내 메모장은 항상 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마음속 감정들은 활개를 치지만, 이 단편적인 세계에는 무엇이 들어가든 일정한 크기로 묵묵히 생존해 나갑니다. 그래서 이 무뚝뚝한 세상을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내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데 있어 너무 인색하게 굴고 싶지 않기에, 이곳에서만큼은 내 자아를 솔직하게 투영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단말기에는 분명 청춘을 허비하는 데 쓰일 것들이 태반이지만, 난 이 속의 메모장만큼은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요 며칠간은 참 초조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갑작스러운 뜨거움에 지문이 망가진 것인지, 더 완벽히 토해내려는 욕심에 잠시 무기력에 뛰어든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참 알 수 없는 회의감에 빠져 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난 어떻게든 이 고통을 견뎌낸다는 것을. 끝끝내 내가 좋아하는 바를 쟁취한다는 것을. 부디 내 독백이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끄적임으로 다가가길 바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방랑자가 행복하기를, 조금의 불행을 지닌 모두가 더 나은 다정함으로 세상을 대하길 바라며 이만 장문의 고백을 어색하게 마쳐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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