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28
다시 현실로 돌아온 인간은 별안간 어지러운 새벽의 고배를 마셨다. 곧바로 가위에 눌렸고, 사뭇 인상이 달라진 베개의 입 구멍 속으로 내 뒤통수는 한없이 빨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꿈들은 다시 어지러운 인간관계와 거지 같은 사회 이념을 토사물로 그려냈다. 그렇게 내 생체 리듬은 언제 돌아왔냐는 듯 이미 탁한 공기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 다음 맞이한 휴일의 한낮은 내겐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다. 뜨거운 햇살을 등진 채 난 긴 잠에 빠졌고, 일주일간 묵혀왔던 도시의 피로들은 금세 물 빠진 녹색으로 변질되어 상당 부분은 침대 밑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꿈의 내용은 한순간에 몰락했고, 어쩜 이리 빠르게 반영되는지 신기하게만 느껴질 정도였다. 어제가 그저께인 것만 같은 착각, 내가 왜 여기에 존재하는지에 관한 의문,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 같은 것들이 온몸을 쥐어뜯는 새벽이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불과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내 영혼은 이곳에 고립되었다. 자고로 해방의 시간은 짧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지만, 그렇다고 일주일 전에 내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정말 믿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세상의 풀 내음을 너무 열렬히 맡고 온 탓일까. 많은 양의 알코올을 급하게 몸속으로 주입한 탓일까. 그러나 난 결코 하루도 어지럽지 않았다. 어느 날은 쥐도 새도 모르게 취해버려 꽤 차분히 잠자리에 들었고, 대부분은 적잖은 도수의 위스키 몇 잔으로 하루의 씁쓸함을 지우고서 눈을 감았다. 그러면 난 대체 무슨 이유로 이 괴리감을 지금껏 떨치지 못하고 있을까. 어째서 나는 사진첩 속 위스키의 영롱함에 다시금 갈증이 도드라지는 것일까. 그저 이 하찮은 세상을 취기로 가리고 싶었던 소인배의 푸념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속 좁은 청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그저 패배한 인간군·····.
고향의 초여름은 사뭇 달랐다. 탁한 녹색이 아닌 그야말로 초록색이라 말할 수 있는 빛깔이 눈앞에 아른거렸고, 그 앞엔 떼려야 뗄 수 없는 특유의 거센 바람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밀쳐댔다. 헛된 품에서 꿈을 찾던 인간이 고향에 오자 여유로움을 한껏 입안에 머금었고, 이곳을 떠도는 짐승들도 나와 다를 바 없음을 느낀 일화도 하나 있었다.
뻥 뚫린 도로 위를 빠르게 내달리던 와중, 송아지 두 마리가 도로 한가운데에 번뜩 나타났고, 차 속의 우리는 몹시 당황하며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그 짐승들은 여유롭게 네 발을 범퍼 앞으로 디뎠고, 양쪽의 인간들은 혼란스러운 발놀림을 바퀴의 머뭇거림으로 도로 위에 내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고향은 너무도 자연 친화적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묵묵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밟고 지나가지 않는 이상 그것만이 살길이었다. 잠시 뒤 또 다른 한 마리가 오른편에서 뛰쳐나왔고, 비로소 세 마리가 모이고서야 그들은 도로 옆쪽으로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그래, 이건 몹시 진귀한 광경.’ 그 순간의 나는 차 앞 유리에서 꽤나 많은 것을 마음에 담았다.
그들의 멋모르는 여유로움을 내가 살아생전 가져본 적이 있던가. 남들을 신경 쓰지 않고 내 소신껏 떠돌아다닌 적이 과연 얼마나 있던가. 난 아직 초록 세상 속 누런 점이 되기엔 한참 부족한 인간이라 생각이 들었다. 소로 불리지 않는 송아지의 당돌함, 어쩌면 청춘의 물러서지 않는 대담함 또는 용감함, 그럼 난 그런 것들을 갖추지 않은, 아직 이 세상의 송아지가 되기엔 한참 어린 아스팔트·····.
유독 이번 초여름은 이방인들이 많이 보였다. 아니, 어쩌면 그들에게 자꾸만 눈길이 쏠린 탓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뭐가 그리 차분한 것일까. 어째서 그런 평온한 표정을 이 난해한 도시 속에 들이밀 수 있는 걸까. 그들과 비슷한 미소를 취하려 안간힘을 써봤지만, 도저히 진짜 이방인들의 색깔은 따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 난 도대체 이 복잡한 사회의 어떤 시민에 속하는가. 가짜 이방인, 그저 이 사회의 가엾은 열외자, 아니, 다시 말해 그저 소인배 정도로 불리는 게 맞을는지·····.
어느 오후에는 도시 속의 물길로 몸이 이끌리고 있었다. 땡볕 아래, 그리고 뜨거운 도로 아래, 그리고 그 밑바닥에 자리한 차가운 시냇물. 난 땀을 닦으며 그 앞으로 다가가서는 커다란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보란 듯이 이어폰을 양쪽 귀에 구겨 넣었고, 도시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아껴놓은 상념을 몰래 음미했다. 그러다가 맞은편에 보이는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이방인. 한 명은 아메리카노를 손에 쥔 금발의 여성, 그리고 그 옆은 거뭇거뭇한 수염을 가진 곱슬머리의 남성.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그들과 나는 완전히 다른 편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헤엄치는 정체불명의 물고기. 그들은 강물의 흐름을 거스르는 태도를 취하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부딪히고 있었고, 그 위의 하얗고 긴 부리를 가진 새는 그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러나 난 묵묵히 그들의 생명력을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고서 다시 맞은편에 보이는 것은 두 명의 이방인, 아니, 이번엔 한 명의 고독한 남성과 한 쌍의 연인, 그리고 네 명의 청년들이 보였다. 그렇게 내 눈앞에는 총 아홉 명의 이방인이 도로 밑의 해방감을 온전히 마시고 있었다.
‘그래, 나는 그럼 가짜 이방인. 이도 저도 아닌 허영의 자유인, 혹은 자유 의지를 손에 쥔 척하는 야바위꾼. 난 그저 그런 수식이 어울리는 인간일 뿐인 게지·····.’
땡볕을 피해 내려온 도로 밑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자리해 있었다. 아이들은 그 속에서 물놀이를 하기도, 몇몇 어른들은 발을 담그기도 하며 도시 속의 소소한 여유로움을 쟁취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두 귀를 막는 것이 익숙한 어느 열외자는 혼자만의 상념에 빠졌고, 일반적인 행복 치사량의 절반 정도는 일찍이 버리고 내려온 듯했다. 평범한 시민들의 틈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존재, 난 그 수식어를 떨치지 못한 채 시원한 바람을 구릿빛 뺨으로 반겼고, 그럼에도 내 딴에는 그곳에서의 시간이 꽤 고즈넉하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너무도 빠듯했던 하루 속에서 잠깐은 쉬어갈 필요가 있음을 내게 전해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그렇게 계단 아래로 내 몸이 자연스레 이끌린 것이 아닐까.
후끈한 도심 속의 산책은 한적한 사막 속에서 방황하는 기분이었다. 이따금 커피가 끌렸고, 그렇게 나는 일주일간 커피를 아홉 잔이나 마셨다.
찾아간 카페들은 모두 저마다의 고유한 커피 향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카페에서는 대형견 두 마리가 손님들에게 귀염을 받고 있었고, 애초에 상호가 강아지의 이름을 딴 것이기도 했다. 사실 그곳의 커피 맛은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는 맛이었고, 아무튼 그 두 마리는 모두 골든레트리버였다. 폭풍처럼 다가오는 바닷바람을 피하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의 누런 점들에 또다시 마음이 이끌려 그곳에 발을 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카페는 도시 속 매우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해 있었다. 고지대에 자리한 그 동네는 이곳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정취를 내뿜고 있었고, 과거 실향민의 마을이었던 것에 이미 열외자의 두 발은 일찍이 그곳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 틈에 자리한 카페는 북적거림과 고요함이 혼재된 공간이었다. 직원의 말투에는 친절함이 가득 묻어 있었고, 나는 이곳에도 보들보들한 털을 가진 생명체가 있는지 의심하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커피는 산미가 강했고, 내 입맛에는 썩 괜찮았다. 그렇게 잠시 여유로움을 마시던 도중, 옆자리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여성이었고, 알게 모르게 내 시신경은 그들에게 쓰이고 있었다. 그러나 내 걱정과는 달리, 그들은 내게 사진을 요청하려 했던 것이었고, 그렇게 나는 온 정성을 다하여 그들의 생명력을 대신 카메라에 담아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친절한 공간에서 함께 친절한 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커피 맛이 정말로 느껴지지 않았던 곳은 따로 있었다. 나는 한 살 차이 나는 젊은 여성과 카페로 향했고, 우리는 여느 때처럼 커피를 주문했다. 둘은 매우 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덧 두 해가 지나갈 동안 만나지 못한 상태였고, 그래서 할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렇게 근황을 묻는 대화에서 사회 이슈에 관한 토의로 넘어갈 때쯤, 빙산의 일각처럼 보였던 커피잔 속의 얼음들이 서서히 본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주제는 동물원의 존재 이유. 둘의 의견은 상당 부분 비슷한 흐름을 계속 보였다. 진지한 대화를 사랑하는 내게 그곳의 커피는 혀에 닿자마자 빠르게 와해되는, 그저 불을 피우기 위한 장작 같은 것에 불과했고, 미디어의 폐해, 신세대의 사회성, 그리고 그런 것들로부터 파생되는 허무 의식과 결국 피어오르는 진로 고민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얼음의 형체가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세상을 향한 물음표를 마구잡이로 던졌다. 그녀는 취업 준비생이었다.
위구심을 가득 챙긴 우리는 그렇게 저녁을 먹으러 어느 한 식당으로 향했다. 둘은 다시 나란히 앉았고, 눈앞에는 모든 요리 과정이 직관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골치 아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쩌면 난해한 사회를 기껏 피해 나온 산뜻한 금요일 밤이었지만, 그렇다고 식탁 위를 침묵 위로 채우고 싶지 않았던 우리였다. 낮은 도수의 알코올과 함께 나는 상념의 해상도를 올리며 말을 뱉어댔고, 그곳에서도 비정상적인 사회 질서만이 대화 주제로써 입에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비교적 성숙한 대화를 요리 앞에 연이어 꺼냈고, 어쩔 수 없이 중간중간 나는 한숨을 여러 번 뱉었다. 그러나 그 응어리들은 이후에 마신 위스키 두 잔으로 어느 정도 희석되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그날의 귀갓길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물론 위스키의 독한 향은 끝까지 몸에 잔존해 있었다.
그녀와 얼음을 깨부수기 전에는 전시관에 갔었다. 오스트리아 조각가인 에르빈 부름의 전시가 열려 있었고, 나는 이 작가에 대해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그에게 조각은 신체를 활용한 행위가 되기도, 아니면 물성을 가진 조형물, 그리고 무형으로 존재하는 개념이 되기도 했는데, 그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가 존재함은 분명해 보였다. 그런 그의 전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조각은 ‘가방 조각’이었다. 그 작품은 품위, 부, 그리고 어쩌면 사회적 지위로 종종 작용하는 디자이너 핸드백이 다리를 부여받아 앞으로 달려나가는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사물이 소유자의 확장된 모습으로써 표현되었음을, 사물에는 각 개인의 정체성이 투영된다는 작가의 신념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인간의 감정이 깃든 듯한 사물들이 어쩌면 인간성과 사물성의 위태로운 경계를 직조하고 있음을, 아니, 어쩌면 머리 없는 니트 조각이 나중에 내 목을 조를 수도 있음을! 그리하여 인간다움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고는 사진첩들을 구경하러 서점에 들렀다. 이방인들의 사진들이 주를 이뤘고, 난 그중에서 최대한 일상적인 생활상이 담긴 것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은 어느 미국 연인의 사진첩.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연출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정서의 차이라고 둘러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자극적인 연출과 자연스러운 일상성의 마찰 속에서 두 연인의 애정 어린 이야기만큼은 고유성을 잃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그들의 미소에 어느샌가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녀 또한 그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고, 나보다 그 공간의 분위기를 더 사랑하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여러 책을 차분히 둘러보았고, 우리 둘은 안 본 사이에 어딘가 되게 무거워져 있는 듯했다. 그녀는 취업 준비생이었다.
다음 날, 일 년 만에 마주한 젊은 남성들의 몰골에는 하나같이 구릿빛이 형형했다. 그날의 우리는 오랜만에 술을 온몸에 뒤집어쓰듯 마실 수 있었고, 서로의 통증이 한데 어우러진 술맛은 꽤 강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보다 무척 점잖아져 있었다. 제법 우리는 성숙함을 지니게 되었고, 우리의 대화에는 예전보다 굵은 밑줄들이 중간중간 그어져 있었다. 오타 또한 이전보다 현저히 줄어든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들의 불투명한 감정들을 비로소 알코올 속에서야 알아볼 수 있었다. 밤이 무르익을수록 털어놓지 못한 속 사정들이 그들의 몸 곳곳에서 멍으로 발견되었고, 그렇게 나는 그들의 새빨간 문장을 얌전히 감상하기 위해 정신줄을 꽉 잡았다.
제법 무뎌진 우리의 정체성과 그 속의 상처들. 난 우리의 몸집이 이전보다 확실히 커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은밀히 야위어진 듯 보이는 우리의 모습. 상처 또한 몸집을 키웠기 때문이 아닐까.
한 친구의 얼굴은 이튿날에도 붉은 기를 떨치지 못했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숙취, 아니, 어쩌면 알코올을 기어코 죽이지 않으려는 육체의 마지막 붙잡음.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알코올을 분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알코올을 굳이 건드리지 않으려는 외로운 세포들의 끈질김이라고. 하지만 친구는 몹시 힘겨워했고, 우리는 휴식의 시간을 오후 동안 길게 가졌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스며들자 나는 재즈 바로 걸음을 옮겼다. 그날은 피아노, 보컬, 그리고 기타로 이루어진 재즈 밴드의 공연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위스키를 머금을 생각에 나는 조금은 흥이 올라온 상태였다. 그렇게 나는 앞쪽에서 들려오는 재즈의 선율과 함께 조금의 위스키를 목구멍으로 여러 차례 넘겼고, 자연스레 내 식도는 일말의 진동을 느끼며 그들의 음악과 어우러진 알코올을 온전히 흡수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어느샌가 연주에 심취해 있는 세 명의 음악인에게 완전히 매료되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적 태도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고, 그곳에서의 소박한 공연이 무척 낭만적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쑥스러운 말과 행동은 어쩌면 송아지가 되는 과정인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곳의 위스키 맛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흥겨운 공간에서 흥겨운 커피를 마신 것인지도.
기억을 더듬어 보니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더 있었다. 여느 때처럼 나는 옷 매장에 들어가 갖가지 옷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갑작스레 한 쌍의 연인이 내게 성큼 다가왔는데, 다름 아닌 셔츠의 사이즈 여부를 내게 묻는 것이었다.
“아, 저는 직원이 아니라 고객이에요.”
서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그들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사과를 건넸다. 그러나 나는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어쩌면 썩 나쁘지 않은 해프닝이라 생각이 들었고, 민망함을 애인에게 공유하는 그들의 표정이 그저 순수해 보였다. 난 지금도 그곳에서의 일화가 굉장히 유쾌했다고 느낀다.
내가 만약 냉소주의자였다면, 나는 물고기를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이방인들을 감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가짜 이방인이며, 그렇기에 물고기의 생존 의지를 카메라에 담았다. 난 그저 이 사회의 가엾은 열외자, 아니, 다시 말해 소인배 정도로 불리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몹시 계획적인 열외자, 그 누구보다 열렬한 발걸음을 보이는 속 좁은 청년. 난 절대 즉흥적인 움직임을 혐오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난 송아지와 물고기, 그리고 골든레트리버를 결코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누런 점의 가치 또한 절대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내 존재는 그저 시커먼 아스팔트. 자꾸만 누군가에게 밟힌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처는 더욱 깊어지고, 몰골은 더욱 야위어져 갈 뿐인 게지·····. 난 오늘도 외로운 베개에 뒤통수를 맡긴다. 이것은 내가 초록 세상과의 괴리감을 여태껏 떨치지 못한 탓. 위스키의 영롱함이 가슴 밑바닥에서 여전히 떠오를 뿐이다. 이 장황한 한숨은 그저 소인배의 푸념. 그러니까 다시 말해 난 그저 이 시대의 속 좁은 아스팔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그저 패배한 인간군·····. 난 이미 가위에 눌릴 준비를 마쳤고, 이제 나는 잠시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