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에 찾아와 준 고마운 이야기
보통 영화나 드라마를 고를 때 로맨스는 쏙 빼놓고 고르는 편이었다. 대신 공포나 스릴러를 즐겨 봤다. 빠른 전개, 강한 자극, 비현실적인 감정이 있어야 끝까지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에게 잔잔한 <봄밤>은 재미있는 드라마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극적인 사건 대신, 충분히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그 안에서 생기는 평범한 갈등들이 이어질 뿐이었으니까.
예전의 나라면 초반 몇 회 보고 바로 꺼버렸을 작품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 보기 시작했지만 워낙 잔잔해서 몇 회 못 가 관뒀었다. 그러다 기분이 뒤숭숭한 요즘, 볼 것도 없어서 다시 틀어 보았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봄밤을 완주하게 되었다.
봄밤은 겉으로 보면 뻔한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주 뻔한 현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정인에게는 이미 오래 사귄 연인 기석이 있다. 은행에 다니고 집안 배경도 좋다. 결혼 적령기의 딸을 둔 부모라면 누구라도 사위로 삼고 싶어 할 조건이다. 정인과 기석의 관계는 주변에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인이는 그 안에서 점점 비어 갔다. 4년의 연애 동안 쌓인 설움 때문이다. 종종 헤어지자는 말을 무기처럼 쓰던 기석, 정인을 무시하던 기석의 아버지, 영국. 그런 관계 속에서 정인이는 점점 정인다울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마음이 먼저 식어 버렸다.
그런 정인 앞에 나타난 사람이 지호다. 기석의 후배이자 약사인 그는 어린 아들 은우를 키우는 미혼부다. 조건만 놓고 보면 기석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지호부터가 새로운 여자를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지호는 정인이 숨을 고를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이다. 막무가내로 이끌리는 마음을 뭐라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인은 지호에게 빠져들었다.
정인이 처한 상황은 낯설지 않다.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기석과의 관계는 결혼으로 향하고, 가족들은 그 선택을 당연하게 여긴다. 사회적으로 보기에 기석은 괜찮은 남자고, 그와의 결혼은 행복한 삶으로 가는 길처럼 보인다. 그런 선택을 거부한다면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중 누가 쉽게 고개를 끄덕여 줄까. 대부분은 말릴 것이고, 설득하려 들 것이다. 드라마 속 정인의 주변 사람들 역시 그렇게 행동한다.
사회적으로 설명 가능한 선택 앞에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은 늘 뒤로 밀린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조건과 안정만 놓고 보면 기석을 선택하는 게 맞다. 다른 무엇보다도 지호에게는 아이가 있다. 누구라도 쉽게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조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인이였다면 나도 아마 지호를 선택했을 거다. 나를 소모하면서 억지로 맞춰 가는 결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흔히 연애는, 결혼은 맞춰 가며 하는 거라고 한다. 그건 당연한 말이지만 그 타협이 나의 자존감을 훼손하고 나를 소모시키는 행위라면 어떨까. 겉으로 보기에, 남들 눈에 보기 좋은 파트너라면 내 마음을 희생시키고 함께 걷는 게 맞나? 나는 아니라고 본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삶이 아니라면 그 안정이 정말 오래 버틸 수 있는 건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게 된다. 세간에는 또 이런 말이 있다. 부부는 의리로 산다. 그런데 그 의리가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상당하더라. 아내를,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 적당히, 조건 맞아서, 나이가 차서 늦기 전에 결혼하고 애를 낳은 부부들 중 불륜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물론 안 그런 부부들이 많다는 것도 알지만 나는 적당한 사람 곁에서 행복할 자신이 없다.
서른 초입도 지나고 슬슬 중반을 향해 가는 나이가 되니 세상이 말을 거는 방식이 달라졌다. 아직도 만나는 사람이 없고,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설명이 필요한 상태가 되었다. 회사 사람들이 대놓고 말한다. 왜 아직이냐고, 언제쯤 할 거냐고, 눈을 낮추라고. 만약 내가 정인이였다면 다들 그냥 기석이랑 결혼이나 하라고 했겠지. 지호를 고른 선택에 대해 철없다고 말들을 했을 거다. 나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몇 번이고 오르내렸을 것이다. 이제 곧 2026년이 되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한가 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재미있기보다는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했다. 도파민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속도가 필요해진 시기에. 예전의 나라면 견디지 못했을 느린 망설임, 진부한 이야기들. 지금의 나는 이 망설임이 왜 중요한지, 왜 어떤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과정인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봄밤은 그런 드라마다. 재미없어서, 그래서 지금의 나에게 필요했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