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너처럼 되고 싶다는 고백이야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많던 시절, 특히 싫어하는 사람 부류가 있었다. 자신에게 확신이 있으면서 세상에 스스로를 내보이는 사람들,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 누가 뭐래도 자기 기준으로 당당하게 사는 사람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건 모두 질투였다.
질투라는 건 결국 고백과 같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었어, 근데 나는 그렇게 못해서 속상해."라는.
그때의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었고, 그렇게 스스로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쟤는 왜 저렇게 당당하지?"라는 감정의 밑바닥엔 "나는 왜 저렇게 못하지?"라는 자괴가 있었고, 그건 나를 향한 미움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남을 미워하면서 동시에 나를 더 깊이 미워하고 있었던 거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안다.
과거의 나는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을 결코 들키지 않고 싶었다. '불행해 보이는 사람'이 되긴 싫었고, 그럼에도 행복하지 않으니까 마음이 계속 갈라져 있었다. 그래서 더 비꼬았고, 더 분노했고, 더 질투했다. 그때의 내겐 그게 나를 지키는 방식이었던 거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특히 아시아인들은 사회적 기준을 열심히 따라 살아간다. 나는 사회적 기준이 사람을 어떻게 무너트리는지를 알고 있다. 나이, 결혼, 돈, 명함, 외모, 연봉, 자가냐 전세냐, 이런 것 외부적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시선들. 물론 그런 기준이 다 나쁘기만 한 건 아니겠지. 삶의 편의를 정량화하기엔 효율적이니까. 근데 문제는, 그게 자존감의 척도로 쓰일 때다.
난 한국 나이로 30대 중반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결혼 생각 없고, 결혼식은 특히 하기 싫다. 내가 왜 웨딩드레스를 입어야 하지? 그 짧은 시간 진행되는 행사를 위해 몇 달을, 돈은 얼마를, 또 얼만큼의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거지? 예뻐서? 추억이라서? 그런 것들은 내가 진짜 원하는 게 아니다. 물론 가치관은 훗날 바뀔 수 있는 것이어서 그때 가서는 후회할 수도 있지만, 후회해 봤자 평생의 한으로 남을 정도일 리는 없을 텐데? 난 결혼식 비용으로 차라리 배우자와 여행을 떠나고 싶다. 서로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에 쓰고 싶다.
최근 내가 느끼는 감정 중 하나는, 사람들이 나를 질투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거다. 자의식 과잉 같나? 어쩌면 그럴 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주제에 경차를 타고, 아파트가 아닌 오피스텔에 전세로 산다. 하지만 빚은 한 푼도 없고, 통장에는 모아 둔 돈이 있고, 부모님이 내게 남겨 줄 자산이 있고, 부모님이 나를 사랑한다. 친구들과 건강한 교류를 하며 잘 지낸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 삶이 망가지지 않을 거라는 안정감을 갖고 있다. 그걸 눈치채는 사람들이 내게 던지는 질투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가 나눈 대화를 복기해 보면 느낄 수 있다.
벤츠를 타는 카푸어보다 스파크 타고 돈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 더 멋진 나는, 외부의 기준에 맞춰 살지 않기로 한 사람이다. 그게 어쩌면 불쾌할 수도 있겠지. 사람들은 대출금도 감수하며 체면을 세우고 있는데 나는 그걸 부러워하지 않고, 거기에서 벗어나서 산다. 누군가는 그걸 ‘세상물정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근데, 그건 그쪽 생각이고. 내 생각은 따로 있다. 나는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 진짜 강자라고 믿거든. 마음이 부자인 사람은 남을 끌어내릴 필요도, 불행을 팔아 위로받을 필요도 없다.
나는 더 이상 내 나이가 많다고 의기소침하지 않고, 여자라서 늙으면 가치가 없다는 말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올려갈 거라서 괜찮다. 과거에는 나를 학대하던 나였지만 이제는 나를 귀하게 대할 줄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는 걸 존중하게 되었다. 내게 찾아온 이 변화는, 내 인생이라는 작품에 새로운 장이 열린 거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이런 나를 보고 어른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면 나중에 후회해." 근데 그 말 뒤에는 사실, "나는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너도 그래야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아 보여."라는 무의식적인 바람이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철이 없다는 것도 기준의 문제 아닌가. 누군가에게 철이 든다는 건 '기성의 룰에 순응하는 것'이고, 나에게 철이 든다는 건 '내가 진짜 원하는 걸 알고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어렵게 어렵게 손에 넣은 내 행복, 타인이 깨트리도록 그냥 두지 않아.
우리가 그렇게까지 집착하던 사회적 기준이, 만약 어느 날 완전히 무너진다면? 그럼 그걸 위해 살아온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동안 세상이 강요한 틀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많은 것을 희생해서 맞춰온 사람들은? 오히려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니 애초에 그 틀은 무너질 수 있는 것, 불안정한 것이라는 걸 인정하는 편이 낫다. 나는 그런 허약한 틀 대신, 내 안에 단단한 기준을 세우기로 했다.
나는 이제 내가 누군가를 질투하면 이렇게 생각한다. "아, 나도 저렇게 살고 싶었구나." 그리고 나를 좀 더 사랑해 보기로 한다. 질투는 고백이니까. 나도 너처럼 되고 싶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