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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꽃 Dec 26. 2022

시어머니가 집문서를 처음 보던 날


여러 우여곡절 끝에 우리 부부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화성시 동탄에 둥지를 틀며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융자가 잔뜩 낀 덕(?)에 우리는 생각했던 거보다는 싼 값의 전셋집로 출발할 수 있었고  그 후 그와 청약 당첨의 꿈을 꾸며 열심히 맞벌이하고, 차곡차곡 돈을 모아 나갔다.



결혼 후 아버님은 친척들을 초대하시곤 '아들, 며느리가 이 집을 산거다' 라며 허풍스러운 말씀을 하셨다. 어머님은 그런 아버님을 늘 싫어하셨다. 사실, 집에 대해 누구에게나 솔직하지 못했던 건 나도 매한가지긴 했다. 사무실 팀장님이 동료들 앞에서  "OO 씨는 그래도 시부모님이 동탄집도  주시고 좋네~"라고 하시길래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 네..."라곤 말하곤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실은 왠지 이 미묘한 한국의 집 문제(?) 앞에서 시부모님을 작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그 사이 말이 발이 달려, 나는 어느샌가 결혼하면서 집 한 채 턱! 받은 사람이 되어 있 했지만...)



새 집에서 시작한 우리 결혼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이듬해 1월 명절을 앞둔 어느 날. 아버님이 뇌경색으로 쓰러지시기 전까진...

그리 정정하시던 분이 한순간에 맥없이 병상에 누웠고, 호전의 기미는커녕 점점 악화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아버님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가던 시점, 내 뱃속에 생기지도 않은 아기를 두고 남편은 아버님 귀에 대고 올라오는 감정을 삼키며 말했다.



"아빠! OO이 임신했어요! 손주 꼭 보셔야죠. 빨리 일어나세요." 



중환자실과 요양병원을 넘나들며 1년 정도를 그리 보낸 후 아버님은 허망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버님은 어린 나이 6.25 전쟁겪고, 본인의 아버지도 일찍 여읜 채로 인생을 너무 고달프게 사셨다. 가수 영탁의  "황소처럼 일만 하셔도 살림살이는 마냥 그 자리" 라는 어느 노랫말처럼... 시아버지라는 타이틀을 떼어놓고 봐도, 그 70대 후반 연세에 제대로 된 집문서를 만져본 적도,  손주 얼굴 한번 만져보지 못하고 그리 허망하게 이 세상을 두고 떠나는 한 사람의 인생이 너무 가여웠다. 그런 마음으로 인해 아버님의 육신이 화장되는 그 순간 나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열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님이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신 후 몇 년 뒤 나는 예쁜 딸을 임신했다. 세월이 약이라고 아버님의 빈자리도 점점 잊혀 갔다. 남편과 다음 달이면 태어날 아기 맞을 준비를 하며 설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동산으로부터 이 집이 매매 가계약이 될 거 같다 전화 받았다. 당시 집 보러 오는 사람이 뜸해서 쉽게 팔리지 않을 거 같던 이 집이 팔리게 생겼다. 아까 낮에 이리저리 꼼꼼히 보시고 가신 분들집을 사려는 모양이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심장이 마구 뛰었다. 남편이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가 벌써 바짝 마른 게 느껴졌다.



"이 집 얼마에 팔리나요?"



집주인의 얘기를 듣고 좌절하며 끊었다. 이 집은 곧 팔린다. 우린 이 집 사정상 다음 달까지 집을 비워야 하는 처지에 놓여 다. 당시 어머님은  사람들이 집 보러 올 때마다 한 번씩 구시렁(?) 거리시며 거실 바닥 귀퉁이에서 고개 푹 숙인 채 콩나물을 다듬으셨다. 어머님의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빨리 자리 잡고 성공해야겠다 은 마음은 있었다.

그나저나  '나 담달에 애 나오는데...'

만삭의 몸으로 연로하신 어머님을 모시고 이 엄동설한에 갑작스레 이사를 해야 한다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잠시 뒤 남편이 집주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우리에게 하루만 고민할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다. 집주인은  사실 남보다는 우리가 이 집을 사면 좋겠다고 했다. 그간의 정(?)이 있으니 가계약자보다 300만 원은 더 깎아줄 테니 웬만하면 이 집을 사라고 권했다. 우린 이 집에 살면서 청약 당첨을 노리려는 계획을 세웠었는데 머리회로가 분주해진다.



그날 밤은  한숨도 잠을 못 잤다. 인터넷도 뒤져가며 인근 아파트까지 시세를 살피고 우리 수중의 돈과 어느 정도까지 우리가 대출을 갚아 나갈 수 있는지  여러 시나리오를 그려 보았다. 겨울이라 날이 추웠던 건지 내 마음이 너무 긴장되고 떨렸던 건지 집안에 있으면서도 손발이 달달 떨렸다. 어머님은 이런 상황에 대해 아무 말이 없으셨다. 별일이 아니라서 아무 말이 없으셨던 게 아니란 걸 난 너무 잘 알고 있다. 남편과 상의 끝에 다음 날 오전 남편이 집주인에게 전화했다.



"저희가 이 집... 살게요."



얼마 뒤 부동산에서 집주인을 만나 집 매매계약서에 시원하게 도장 찍고 으로 돌아왔다. 세계약서가 매매계약서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그간 아무 말이 없으셨던 어머님께 다가가 집 계약서를 들이밀며 을 열었다.



"어머님! 이거 보세요. 이제 이 집 저희 집이에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어머님은 집 계약서를 가슴에 부둥켜 앉고 바로 주저앉아 목 놓아 우셨다. 그간 아무 말이 없으셨만 북 받는 감정은 그 순간 어쩔 수 없으셨나 보다.



계약 당시 넘치는 대출로  화장실만 진정한 내 집 일지언정 나는 그래도 젊은 나이에 갖아 본 집 계약서를  어머님은 70대가 되어서야 만져 보신다 생각하니 이 아팠다.  그마저도 만져보지 못하시고 허풍만 떨다 가신 아버님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프다 못해 리기까지 했다. 남편과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어머님과 같이 주저앉아 집 계약서를 보며 한참을 얼싸안고 서로의 등을 쓸었다. '가족이란 이런 거구나' 싶은 마음이 드는 날이었다.




몇 년 뒤 둘째까지 태어나면서 둘째 취학 전에 집을 한번 옮겨 앉을까 싶어 작년에 집을 내 논적이 있다.

나는 우리 어머님이 부동산 손님이 오셨을 때 이렇게 직접 브리핑(?)을 잘하시는 분인지 처음 알았다. 이 집을 전세로 거주할 당시에는 부동산에서 손님들이 올 때마다 모기 같은 소리로 인사하시곤 거실 한편에 쭈그리고 앉셔서 연신 콩나물만 다듬던 분이셨는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내겐 참으로 듣기 좋은 브리핑이다.



"이 집이 을매나 해가 잘 들어오는지 몰라유.

겨울엔 난방 안혀도 따땃해서 애들두 노상 벗구 있어유.

여름 이 짝 문 열어 놓으면 머 에어컨이 필요없구.

너무 시원해 너무~ 저 짝 저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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