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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꽃 Dec 23. 2022

우리 부부 신혼집 알아보던 날

결혼하면서 제일 큰 숙제!


남편과 결혼 전 6년이라는 장기연애 동안, 자연스럽게 우리 결혼과 미래에 대한 얘기를 참 많이 하곤 했는데 그 중 가장 큰 숙제는 집 문제였다. 당시 나는 대학 졸업 후 성남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부모님과 살고 있었고 남편은 서울 양재동으로 출퇴근하며 부모님과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었다. 우리 둘다 가진 돈은 얼마 없는 데다 결혼하면서 양가 도움은 커녕 오히려 시부모님을 부양해야하는 위치였기에 지금 생각하면 나보다는 그가 고민이 훨씬 많았겠다 싶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용인 어느 곳에 싼 집과 토지 몇 개가 인터넷에 올라온 걸 봤다며 한번 가보자고 했다. 당시 그사는 집도 전세금을 2년마다 올려야 하니 이래저래 부담스러웠고, 출퇴근은 멀어지더라도 조금 더 낙후된 곳의 집을 싸게 사거나 터를 사서 집을 지으면 집 앞에 텃밭도 있을 수 있고 하니 부모님을 위해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던거 같다. 내 생각에도 어머님 아버님이 워낙에 연세도 있고 하니 아파트 생활보다 훨씬 나을 거 같았다.



근데 나는 머릿속으로 '용인시 수지 같은 동네'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한 채로 그와 부동산 임장 목적지로 향했다. 부동산 사장님과 연락해 세 곳을 임장을 했다. 속으로 '맙소사! 여기가 용인이라고?' 하고도 한참을 더 들어갔다. 생각해보면 결혼하던 해가 내 나이 27살, 남편 나이가 32살. 땅을 알아보러 다닌 건 결혼 한참 전 일인걸 감안하면 우리 둘 다 참 어렸고, 무지했다.  



첫 번째 집 : 용인 어느 저수지 인근 이차선 도로 바로 옆에 위치한 산 밑 집. 날씨가 좋은 날임에도 그터만 음산하게 느껴졌다. 거의 머 뒷산으로 둘러싸인, 아니 거의 산에 파묻혀 있던 집. 분명 뒤에는 산이 있고, 집 앞 근처는 저수지도 있으니 지형상 배산임수 터(?)인 것만 같은데 내 눈는 그저 귀곡산장이었다.  폐허가 된 지 오래된 느낌에, 뭐 하는 사람이 살았던 건지 집 앞에는 사람보다 더 큰 커다란 십자가가 꽂혀있고, 몸뚱이 이곳저곳 잘려나간 동상이 떡하니 서있던 집. 이건 뭐 귀신들이 살거나 간첩 은신처로 딱일 것만 같았다.



두 번째 터 : 용인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나는 용인 땅에 이렇게 백로가 많이 날아다니는 곳이 있다는 걸 그날 첨 알았다. 인근에 머가 하나도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다. 그저 쌩쌩 달리는 차도 바로 옆 산중턱 터. 다른걸 다 떠나서 이 곳에 살면 우울증은 제대로 보장될 것만 같았다.



세 번째 터 : 앞에 두 곳을 보고 나니, 세 번째 목적지를 향할 땐 그와 나 둘다 실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더는 보기 힘들 거 같아서 중간에 가다가 차를 돌려 나왔다.



그 후 우리 집 문제는 다시 표류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요즘 그 수원 밑인가? 동탄신도시라고 거기 아파트를 거의 짓고 있는데 아직 뭐도 없고 해서 짐 싹 미분양 났다고 그러던데, 그러면 전셋값이 많이 쌀 거야. 거기 한번 알아봐."



그 얘기를 듣고 얼마 후 주말을 이용해 그와 동탄이라는 곳을 들렀다. 사실 서울에서 한참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난 번  그 저수지 앞 십자가 꽂힌 집이나 백로 날아다니는 터를 보다가 와서 인지, 아직은 공사판이지만 깔끔하게 정돈되고 즐비한 아파트들을 보는데 콩닥콩닥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부동산에 들러 세 곳의 전셋집을 알아 보았다. 새 아파트라 주방이며 다 마음에 들었다. 그중 마지막 집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앞전의 두 집보다 방도 하나 더 있는데 전세가가 훨씬 싸다는 이유다. 햇살 가득한 베란다 통창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단지 내 정원도 꽤 마음에 들었다.  한 번에 '우리 집'이다 싶었다. 그도 같은 마음이었고 더는 볼 거 없이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다.



'우리 보금자리는 여기는구나!'



아버님과 어머님도 햇살 가득한 남향의 이 새집이 너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 후 남편과 부모님 먼저 이사를 했고 나는 몇 개월 후 결혼식을 마친 후 이 집에 들어갔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이곳에서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전세가가 쌀 때는 그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융자가 이렇게나 많이 꼈다니.' 

전세 계약 전 부동산 사장님께 미리 듣긴 했지만 그땐 융자라는 의미도 크게 인지하지 못할 때였다. 그래도 우리 집주인은 좋은 분이셨다. 입주 후 서서히 전세가가 올라 2년 후 전세금 걱정을 하던 때가 있었는데 사실 많이 올리시지도 않으셨다. 어린 며느리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게 너무 예뻐 보인다고 하시며 살다가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이 집을 꼭 사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그러고 싶어요. 이 집'



몇 년 뒤 우리는 이 집을 진짜 우리 집으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곧 발행예정이다.)




남편과 어쩌다 차로 용인 땅을 지날 때가 있는데 그때 당시 그 느낌의 집이나 터를 지나칠 때면 우리 둘 다 같은 추억에 잠기는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우리 그때 여기 살았으면 어땠을까?"


[오션뷰 뻥까는 저수지 뷰, 마당 앞 십자가, 여기저기 잘려나간 동상, 저수지서 뛰노는 백로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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