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부 조각내서 살아보기

by 불멍

1) 오늘만 버틴다: 단기 생존의 리듬


무너짐의 시간을 지나고 나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을 뜨는 것도, 하루를 견디는 것도

쉽지 않은 일들이었다.

늘 5년뒤를 10년뒤를 계획하고 살아가던 내게

알 수 없는 그 시간들을 계획하는 것은 커다란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거창한 목표를 세우는 대신

“오늘 하루 잘 살아 보기” 로 마음먹었다.

내일도, 다음 주도, 1년 뒤도 바라보지 않고

그냥 머리를 비우고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을 해보기로 했다.


단순함은 생각보다 큰 힘이 있었다.

하루의 크기는 생각보다 작고,

작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다.

커다란 성공도, 완벽한 계획도 필요 없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루틴”을 지켜보기로 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아이의 아침을 챙기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하루에 정해진 진료와 강의를 하고

지하철로 퇴근하는 일.

그게 다였다.

하지만 “루틴”보다 중요한 것은 “리듬"이었다.


루틴이 ‘반복의 틀’이라면,

리듬은 ‘숨의 간격’이다.

삶에는 템포가 있고,

그 템포는 매일 달라진다.

몸이 지칠 땐 느리게,

마음이 가벼울 땐 조금 더 빠르게.

그 리듬대로 보내는 일상이

하루를 잘 살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오늘을 잘 보낸다는 건

그 리듬을 놓치지 않는 일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다시 리듬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하루를 조각내 살아가다 보면

그 조각들이 모여 새로운 나를 만든다.

거창한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지만

매일 작은 회복이 누적된다.


아직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커다란 안심이 된다.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2) ‘다음 주까지’의 목표가 ‘다음 해까지’로


처음에는 오늘만 잘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내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렇게 하루 단위로 쪼개어 살던 시간이

어느새 일주일이 되었고,

그 일주일이 한 달이 되었다.


장기 계획을 세우던 습관을 버리기로 했다.

‘지속 가능한 짧은 목표’를 세우기로 했다.

“이번 주엔 한 사람에게라도 따뜻한 말을 건네자.”

“이번 주엔 좋은 사람과 점심을 먹자.”

그런 소박한 목표들이 한 주를 버티는 힘이 되었다.


작고 단기적인 약속들이 쌓여

하루보다 조금 긴 ‘리듬’이 생겼다.

삶의 리듬이 회복되면

에너지도, 방향도, 조금씩 돌아온다.

그때서야 비로소

‘다음 주까지’의 계획이 ‘다음 달까지’로,

그리고 언젠가 ‘다음 해까지’로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하루를 버티는 힘은

조금 더 긴 시간을 살아내는 힘으로 변한다.

삶은 의지로 유지되지 않는다.

쉬는 법을 알고, 내려놓을 때를 알고,

다시 일어설 타이밍을 스스로 느낄 수 있을 때

그때서야 무너지지 않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여전히 불안함은 남아있다.

어쩌면 이 불안함은 사는 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짧은 목표들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주고 있다는 것을.

다시 길게 달릴 수 있는 날이 오더라도

그 시작은 늘 짧고 단순한 하루라는 것을.


사람들은 인생은 장기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생은 장기전이 아니라

짧은 생존전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들이 모여

결국 ‘지속 가능한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3) 루틴이 아니라 리듬: 매일의 회복을 설계하는 법


한동안 나는 루틴에 집착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일을 반복하고,

하루를 일정한 틀 안에 가두면

삶이 안정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루틴은 삶을 지탱하는 구조일 수는 있어도,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유연성은 없다.

루틴은 계획이지만, 리듬은 감각이다.

계획은 머리로 세우지만, 리듬은 몸이 기억한다.


리듬은 파도처럼 오르내린다.

몸이 지칠 때는 속도를 늦추고,

마음이 가벼울 때는 조금 더 멀리 나아간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나의 상태를

잘 알아차리는 것이 리듬의 핵심이다.


루틴은 “해야 하는 일”로 나를 몰아세우지만,

리듬은 “지금의 나”를 존중한다.

오늘은 한 걸음만 걷고 싶을 수도 있고,

내일은 조금 더 달리고 싶을 수도 있다.

리듬은 그 변화를 허락한다.


사람들은 모두 꾸준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회복은 꾸준함에서 오지 않는다.

회복은 멈춤과 호흡의 균형에서 온다.

잠시 쉬는 시간,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느린 순간,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는 짧은 틈.

그런 사소한 장면들이 리듬을 만든다.


늘 계획을 짜고 미래를 계획하던 나는

이제 하루를 계획표로 짜지 않는다.

대신 하루의 리듬을 듣는다.

아침엔 몸의 속도를,

낮에는 마음의 온도를,

저녁엔 하루의 호흡을 점검한다.

그 감각이 나를 다시 현실에 묶어두고,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준다.


리듬은 나를 통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나를 돌보는 방식이다.

삶은 루틴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리듬으로 이어진다.


하루의 끝에서 나는 오늘의 리듬을 되짚는다.

빠르지 않았는지,

너무 힘들지 않았는지.

그렇게 내일의 속도를 조절한다.

무너짐에서 배운 잘 버티는 기술이다.


루틴은 목표를 향하지만,

리듬은 나를 지킨다.

이제 루틴이 아니라

리듬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keyword
작가의 이전글1부 무너짐의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