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각난 나를 하나로 엮는 회복
무너진 나를 다시 세우는 일은 한 번에 끝나는 복구 작업이 아니다. 오랫동안 쪼개져 있던 마음의 조각들을 천천히 하나씩 맞춰가는 과정이다.
처음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서 숨쉴 틈 없이 달리던 나.
하지만 이제는 안다. 예전의 나는 이미 사라졌다.
다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이어 붙이는 일이 회복이라는 걸.
조각난 스스로를 붙잡고 있을 때 느끼는 불완전함에 불안했다. 하지만 그 불안 속에서
‘지금의 나’와 화해하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맞지 않아도 괜찮다.
삐뚤게 이어진 선들이 오히려 진짜 나의 흔적처럼 느껴졌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 느리게 가는 동안 비로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볼 수 있다. 그 느림 속에서 마음은 숨을 쉬고, 생각은 다시 정리된다.
예전엔 관계의 속도에 맞추어 살았다. 누군가의 기대, 사회의 속도, 그 틀 안에서 나를 정의했다.
하지만 그 속도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의 속도를 다시 세웠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맞추기보다 나의 속도 안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서로의 속도를 존중할 때 관계는 지치지 않는다. 나를 억누르지 않고 이어지는 관계,
그게 내가 다시 배우는 회복의 형태다.
조각난 나를 하나로 엮는다는 건 과거의 상처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흔적을 품은 채 살아가는 일이다. 그 흔적이 바로 내가 걸어온 증거이자 내가 다시 살아가야 할 이유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존재다. 하지만 이제는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스스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조각난 채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바로 내가 다시 나로 이어지는 방법이다
2) 관계의 최소 단위: 나와의 신뢰 회복
사람에게 상처받던 시기가 있었다.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고, 믿었던 관계가 흔들릴 때마다 내 안의 신뢰도 함께 무너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깨달았다. 나를 상처주는 것은 타인이 아닌
결국 내 자신이었다.
내가 내 편이 되어주지 않으면 세상은 늘 나를 흔들었다. 누군가 나를 칭찬해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판을 들으면 곧바로 자책했다. 외부의 말 한마디가 내 존재를 뒤흔드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회복은 이 믿음을 되찾는 일에서 시작됐다. 내가 한 말을 믿고, 내가 세운 약속을 지키고, 내 감정을 존중해주는 일.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아주 작은 신뢰의 쌓임이다.
나는 이제 하루의 끝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의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나?”
그 질문에 솔직하게 답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계획을 다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나 스스로에게 솔직하다면.
나와의 신뢰는 자기 연민이 아니라 자기 존중에서 온다. 힘든 날엔 “괜찮다” 대신 “그럴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조금 늦더라도, 멈춰 서더라도 “그래도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다독이는 것.
그게 신뢰의 언어다.
사람들은 흔히 관계를 외부에서 찾지만, 관계의 최소 단위는 ‘나’다. 내가 나를 믿지 않으면 어떤 관계도 오래 가지 않는다.
나 자신과의 관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이제 외로움이 올 때마다 그 감정을 피하지 않는다. 그건 ‘혼자 있다’는 뜻이 아니라 ‘내 안에 다시 연결할 내가 있다’는 신호다. 그 순간을 견디면 다시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자라나고 더 이상 외부의 속도에 밀리지 않는다. 다른 누구의 기준도 아닌, 나만의 속도와 리듬으로 살아갈 수 있다.
3) 타인의 시선 대신 ‘내 생존 감각’으로 사는 법
한때는 세상이 정한 기준에 나를 맞추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과를 내야 하고, 인정받아야 하고, 쉬고 있으면 불안해야 ‘열심히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기준에 너무 오래 노출되면 감각이 무뎌진다. 몸이 먼저 지쳐도 마음은 무시하고,
마음이 무너져도 “괜찮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게 버팀이라 믿었지만, 사실은 천천히 자신을 소모시키는 일이었다.
무너진 뒤에야 알았다. 내 생존 감각은 남의 시선보다 훨씬 정확하다. 아무리 타인이 옳다 해도
내 몸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그건 나에게 옳지 않은 일이다.
이제 나는 하루의 기준을 바꿨다. 성과 대신 에너지의 흐름으로 살핀다.
“오늘 하루 내 에너지가 어디로 흘렀는가.”
그 질문이 내가 살아 있는지를 알려준다. 피로가 쌓이는 방향으로 살면 반드시 부서진다. 기운이 회복되는 방향으로 살면 느리더라도 오래 간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건 세상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의 신호를 우선순위에 두는 일이다. 몸이 보내는 피로의 신호,
마음이 느끼는 불편함의 신호. 그걸 무시하지 않으면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요즘 나는 일정이 빡빡한 날일수록 하루 중 한 시간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확보한다.
그건 게으름이 아니라 생존 기술이다. 그 짧은 정지의 시간 속에서 몸은 다시 감각을 회복하고,
생각은 현실로 돌아온다.
나는 이제 ‘누가 옳은가’보다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가’를 기준으로 산다. 남들이 보기엔 작고 느려 보여도, 그건 나에게 꼭 맞는 속도이자 온도다. 그 감각을 지키는 것이 결국 나를 버티게 하는 가장 현실적인 힘이다.
세상은 여전히 평가와 속도의 언어로 돌아간다.
하지만 나는 그 언어 대신 몸의 언어, 마음의 언어로 산다.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내 생존 감각이 나의 나침반이다. 그 감각이 살아 있는 한 나는 어디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