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의 잔여 효과
회복을 경험했다고 해서, 삶이 곧바로 안정적인 상태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무너짐을 지나 조각 내어 버티고, 다시 나와 연결되는 과정까지 모두 거쳤음에도 여전히 실적 앞에 서면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이 되살아난다. 오랫동안 성과 중심의 조직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 감정은 거의 ‘후유증’처럼 따라붙는다.
이 흔들림은 자존감의 잔여 효과(residual effect)로 생각할 수 있다. 이미 무너짐에서 회복된 것 같지만, 과거 오랫동안 축적된 감정적 패턴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회복은 현재의 나를 바꾸지만, 잔여 효과는 과거의 내가 만들어 놓은 구조적 흔적이기 때문이다.
1. 실적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었던 시간들
오랫동안 실적은 나의 능력을 증명하는 가장 공식적인 지표였다. 병원 조직에서 진료 실적은 곧 평가, 평판, 성취와 연결된다. 숫자가 조금만 떨어져도 “나는 뒤쳐지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자동 반응이 조건반사처럼 일어난다.
이는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장기간 강화된 조건반응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평가 기반 자존감(evaluation-based self-esteem)’이라고 부른다. 타인의 평가, 조직의 객관화된 성과 지표를 통해 자신을 확인 받는 구조. 이 구조에 오래 머물렀다면, 회복 이후에도 그 패턴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조직 내부에서 늘 실적이 공개되고 비교 가능한 상태라면, 이 패턴은 더 깊이 몸에 새겨진다.
자존감이 아니라 존재의 안전감 (sense of security) 자체가 숫자에 의존하게 된다.
2. 회복 이후에도 흔들리는 이유: 마음의 ‘기억 장치’
몸이 큰 부상을 당했다 회복해도 날씨가 흐리면 통증이 다시 올라오는 것처럼, 마음에도 회복 이후 남는 미세한 통증이 있다.
자존감의 잔여 효과는 바로 이 심리적 통증의 잔존이다. 실적을 볼 때마다 예전의 압박이 다시 활성화된다 타인의 시선이 과거의 ‘평가자’로 자동 치환된다 타인의 칭찬보다 비판에 먼저 반응한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방어적 비교를 하게 된다.
이는 의지가 약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신경계가 과거의 생존 방식을 여전히 ‘유효한 전략’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쟁과 평가가 촘촘한 조직일수록 이 패턴은 더 오래 지속된다.
한의학적 관점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오랜 기간 과로와 긴장 상태를 지속하면 간혈(肝血)과 신기(腎氣)가 허해지고, 자율신경은 ‘경계 상태’를 기본값으로 설정한다. 몸이 안전해졌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회복 이후에도 불안은 반복적으로 살아난다.
3. 실적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흔들림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이 시점에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실적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가능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거의 불가능하다.
성과 중심 조직에 있는 이상, 평가에 대한 감정 반응은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흔들림의 유무’가 아니라, 흔들릴 때 얼마나 빨리 중심으로 돌아오는가이다.
즉, 회복의 목표는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흔들림에서 복귀하는 속도가 빠른 사람일 것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의 시간적 지표라고 한다. 예전에는 흔들림에서 돌아오는데 며칠이 걸렸다면 지금은 몇 시간, 혹은 몇 분 만에 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회복이다.
4. 흔들림을 다루는 나만의 전략: ‘비교의 회로’를 끊는 기술
실적 때문에 불안이 올라올 때, 과거의 나처럼 자동적으로 비교 회로가 작동한다.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잘하고 있어.”
“나만 뒤처지고 있는 것 같아.”
“다른 사람은 내 실적을 어떻게 볼까?”
이때 비교의 회로를 끊기 위한 실제적 기술이 필요하다.
① 숫자를 보지 않는 ‘전략적 무시’
회피가 아니라 생존 기술이다. 불안을 유발하는 자극을 줄이면 신경계의 과각성도 줄어든다.
② 내 몸의 반응을 먼저 살피기
불안은 감정이 아니라 신체 반응의 변화로 가장 먼저 나타난다. 숨이 가빠지거나, 가슴이 쪼여오거나, 어지러움이 올라오는 등의 신호. 이 반응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자동회로가 느슨해진다.
③ 성과의 프레임을 ‘지표’에서 ‘기여도’로 이동
“나는 오늘 얼마나 많은 성과를 냈는가?” 대신
“오늘 나는 무엇을 기여했는가?”로 기준을 옮긴다.
학술적으로도 ‘기여 기반 정체성(contribution identity)’은 성과 기반 정체성보다 안정적이다.
5. 흔들림은 실패가 아니라, 과거 자기의 지속된 흔적이다
실적 앞에서 흔들리는 나를 보며
“왜 아직도 이러지?”
“이제 좀 달라질 때도 됐잖아”
라는 자책이 올라올 때가 있다.
하지만 흔들림은 회복의 부족함이 아니라
과거 삶의 방식이 남긴 자연스러운 잔여 흔적일 뿐이다. 과거의 내가 살아남기 위해 사용했던 전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생각하려 노력한다.
흔들리는 내가 문제가 아니라, 흔들림을 알아채는 내가 성장한 것이다.
실적의 숫자는 여전히 나를 불안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숫자보다 내가 더 크고, 그 불안보다 내가 더 단단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다.
흔들려도 괜찮다. 중심으로 다시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바람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 같지만 결국은 중심을 잘 지키고 서 있는 갈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