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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밑에서 생기는 길

걷는 동안 길은 생긴다.

by 불멍

살다 보면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사방이 캄캄하고, 어디로 발을 내딛어야 할지조차 암담할 때. 막다른 골목에 닿았다고 느끼는 순간, 그때 선택지는 늘 두 가지였다. 멈춰 서서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일단 걷거나. 자의던 타의던 그럴 때 나는 무작정 걷는 쪽을 택해 왔다. 방향은 알 수 없었다. 그 끝이 어디로 이어질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걷다 보면, 나는 결국 어딘가에 도착해 있었다.

레지던트를 마치고 나서 쉽사리 취업이 되지 않았다. 개원을 하기에는 너무 젊었고, 남들이 다 가는 병원급에는 내가 갈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비행기를 탔다. 미국에 가서 조금 더 공부를 하고 오겠다고. 나를 믿고 지지해주셨던 부모님 덕분에 그 결정이 가능했던 것도 사실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뉴욕행 비행기에서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미국까지 갔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오면 어쩌나. 만류하던 사람들의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 나를 가장 두렵게 했던 것은 실패 그 자체보다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알지 못했다. 무언가를 확신해서 걷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발을 내딛는 것 자체가 이미 선택이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준비된 뒤에 걷기 시작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길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길은 걷기 시작한 뒤에야 걷는 사람의 발밑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완벽해서 흔들리지 않는 삶보다 무너질 걸 알면서도 다시 발을 내딛는 삶. 나는 그런 삶이 좋다. 그래서 이제는 길이 보이지 않을수록 나는 멈추지 않고 걷는다. 무언가를 꾸준히 해 나가다 보면 결국 또 내 발밑에 새로운 길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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