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모닝 2

비워야 기억이 머무른다.

by 불멍

슬로우 모닝은 의외로 스스로의 게으름을 정당화 하기 위한 방패처럼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손에 닿는 것이 휴대폰이다. 알람을 끄기 위한 목적일수도 있지만 일단 손에 쥐는 순간 놓기가 쉽지 않다. 운동화를 신으면 나가게 되고, 책을 들면 읽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행동은 생각보다 초기 선택의 관성에 좌우된다. 뇌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한 번 열린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흐름을 잘못 타기 시작한 아침은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 버리기 쉽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알림과 속보, 메시지와 트렌드가 한꺼번에 밀려들면, 하루의 첫 순간부터 뇌는 이미 많은 연료를 소모한다. 그럴 때 “슬로우 모닝 중이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스크롤을 내리는 경우가 있지만, 끝없이 화면에 머무르는 일은 느림이 아니라 주의력을 방치하는 일이다.


느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무의식적 소비는 회복이 아니라 소진에 더 가깝다. 슬로우 모닝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되돌리는 일이다. 하루의 시작권을 세상에 내어주지 않고 다시 나에게 돌려놓는 일.


아침의 뇌는 아직 외부 자극을 감당할 준비가 덜 된 상태이다. 이때 급격한 디지털 자극은 자율신경계를 자극해 교감신경이 우세해진다. 심박이 오르고, 몸의 긴장 상태가 하루의 기본 감정이 되어버린다. 반대로 휴대폰을 뒤로 미루고 스트레칭과 느린 호흡, 차를 준비하며 향을 음미하는 것을 먼저 하면 부교감신경이 서서히 작동하고, 뇌와 몸의 속도가 맞춰진다. 감각 기반의 아침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작동 모드 자체를 전환하는 개입이다. 반응적으로 끌려가는 상태에서 선택적으로 살아내는 상태로, 속도를 기준으로 사고하는 뇌에서 감각을 기준으로 사고하는 뇌로 방향을 돌려놓는 일이다.


부쩍 건망증이 심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갑자기 단어가 생각나지 않고,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금방 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고, 방 안에 들어와 놓고도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떠오르지 않아 멈춰서게 된다는 사람들. 하지만 이런 순간들이 모두 노화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때로는 뇌가 고장 난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사고의 인풋이 들어와 기억할 틈을 잃어버린 것일 수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주의를 전환하는 디지털 환경에서는 작업기억이 과부하되고, 짧게 담아둔 정보가 장기기억으로 옮겨가는 과정 중간에서 끊긴다. 기억은 쌓이지 못한 채 표면에서 사라지고, 결국 건망증처럼 보이는 현상으로 드러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노력이 아니라 덜 들어오는 환경이다. 뇌가 정보를 선택하고 정리하고 저장할 여유를 되찾을 수 있도록 남겨둔 빈 공간, 그게 뇌 건강의 조건이 된다. 노자는 “채워 넣으려 하기보다, 비워내고 덜어낼 때 오히려 쓰임이 생긴다(虛而不屈)”고 했고, 장자는 “마음이 어지러우면 보는 것도 들리는 것도 흐려진다(心倚則目不明)”라고 말했다. 한방에서도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지고, 감정이 정리되지 못한 채 쌓이면 심이 지쳐 혈(血)의 흐름이 약해지고, 혈이 약해지면 정신(神)이 제자리를 지키기 어려워지고, 기억이 들어와도 머물 곳이 없어져 새어 나가는 현상을 건망이라고 보고 있다.


낮 동안 쌓여 있던 인지 부하가 해소되지 못하면 밤이 되어도 뇌는 멈추지 않는다. 몸은 누워 있어도 생각은 여전히 달려가고, 다음 날 해야 할 일들이 처리되지 않은 파일처럼 남아 떠오른다. 자율신경계가 긴장을 내려놓지 못하고 교감신경의 잔향이 남아 잠들어야 할 순간에도 ‘깨어 있음’을 유지하려 한다. 그래서 불면은 단순히 잠이 오지 않는 현상이 아니라 정리되지 못한 하루가 뇌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과정일 수 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의 과부하가 밤의 불면으로 밤의 피로가 다음 날의 건망증으로 이어지며 하나의 순환이 만들어진다. 결국 불면과 건망증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인풋을 감당하느라 정리가 중단된 뇌의 반응일 수도 있다.


점점 빨라지는 디지털 세상, AI 세상의 속도로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 종일 따라가야 하지만, 나의 속도로 시작한다면 하루가 따라온다. 빠르게 사는 것이 능력이라면 천천히 시작하는 것은 능력을 다시 나에게 소유하는것이다. 몸의 감각을 먼저 깨우고 차의 온도와 향을 느끼고 한 문장을 천천히 읽으며 주의를 나에게 머물게 하는 일, 그렇게 시작된 하루는 방향을 잃지 않는다. 느림은 뒤처짐이 아니라 정렬이고 멈춤이 아니라 재배치이며 포기가 아니라 회복이다. 과부하된 뇌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의지가 아니라, 덜 들어오는 아침이다. 세상의 시간보다 자율신경의 리듬을 먼저 깨우는 아침, 반응이 아니라 선택으로 하루를 여는 아침. 그렇게 천천히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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