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하루

by 박상준


인생에 있어 하루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하루란 시간으로 24시간, 오전-오후, 가을의 어느 날, 지루한 일상 한 달의 일부 등 다양하게 내재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매일 맞이하는 하루, 크게 가치를 부여하거나 심각하게 시간이 주는 뜻을 되돌아보지 않는 일상의 조각이 사람들에게 제각각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혹은 흐르는 물처럼 흘려보낸 인생의 파편이기도 하다.


특히, 주말의 하루가 주는 느긋함을 혼자 만끽하거나 또 자신만을 위해 어떻게 시간을 가둘지는 오롯이 각자의 몫이지만 그래도 계획적으로 하루를 보낸 후 느끼는 뿌듯한 감정은 시공간적 참여를 떠나 공감이 간다.

토요일 아침, 전날 문득 떠오른 여행 생각에 깊어지는 가을날 하루를 친한 지인과 함께 보낸다면 그 또한 뜻있는 날이 되리라 생각하고 아내를 통해 동행 의사를 타진한 후 같이 떠나기로 하였다. 수많은 추억을 간직한 두 부부가 깊어가는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기 위해 무작정 주말여행을 떠났다.


항상 운전만 하다 오늘은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니 마음이 편안해지며 스르르 졸음이 몰려온다. 집사람과 준석이 어머니의 수다가 마치 자장가 가사처럼 내 귓전을 맴돌지만, 따듯한 차 안의 공기로 결국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첫 목적지인 봉계 한우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주변은 경부고속도로가 확장되며 새로운 교차로가 생겼지만, 이것을 모른 채 옛날의 기억을 더듬어 도착한 마을은 여전히 고즈넉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날씨는 예보와 달리 포근하였고 두꺼운 옷으로 무장한 우리는 한 꺼풀 옷을 벗고서 함께 온 적이 있는 중남 식당에 들어갔다.


주말의 점심, 배가 고파 한껏 기대가 부푼다. 오래전 작은 형수와 인연이 닿은 이 식당은 내가 울산에서 근무하며 자주 방문한 곳으로 규모는 작아도 음식과 고기의 맛이 남달라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근래에는 내가 멀리 이사를 하여 자주 오지는 못해도 가끔 들러 옛 추억과 맛난 고기를 먹는 즐거움을 내게 주는 곳이다.


먼저 나온 육회는 오랜 주인과의 인연으로 서비스로 제공되었고, 안창살과 갈빗살을 숯불에 올려 살짝 구워 준석이 아빠가 준비한 와인과 곁들여 먹는 맛이란, 멀리서 차로 한 시간 이상을 걸려 찾아온 노력이 아깝지 않음을 증명해준다. 오랜만에 고기를 실컷 먹은 후 나른한 몸을 이끌고 감포로 향했다.


따로 일정을 정하지 않아 그냥 ‘발길 닿는 곳이 목표’라고 생각하고 낮술로 인한 약간의 취기가 주는 즐거움에 편승하니 더욱 기분을 들뜨게 한다. 운전 때문에 낮술을 먹지 못한 준석이 아빠의 희생으로 편안히 문무대왕 능이 자리한 감포 바닷가로 진행하니 주변의 풍경이 많이 변해 낯설게 느껴진다.


너무도 변한 길에 놀란 것도 잠시 차는 이내 문무대왕 능이 바라보이는 해변에 도착하였다. 초겨울 바다, 아이들이 어렸던 시절 두 가족이 경주 일대를 함께 여행한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그래도 사진은 남겨야지 하면서 촬영에 몰두한다. 집사람은 프로필 사진 교체를 위해 다양한 자세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한다.


촬영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조그만 카페로 이동해 주말 오후 늦게 움직이는 시곗바늘을 더 늦게 움직이게 하려고 붙잡아 놓아주지 않을 기세로 천천히 커피를 음미한다. 참 아무것도 아닌 이런 소소함을 누리지 못하고 잊고 지내는 인간들의 일상을 보면 무엇이 그리 바빠서 하루의 시간조차도 자신에게 허락하기 이토록 어려웠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온다.

천천히 감포읍을 향해 차를 이동하여 바닷가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근처 시장을 방문하여 둘러보았지만, 딱히 볼거리가 눈에 띄지 않아 이내 발길을 배가 정박한 포구로 돌렸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바다와 배에 부딪혀 반사되는 모습이 아름답다.


비릿한 바다내음이 코를 자극하고 이따금 낚시꾼이 보이기는 했지만 호젓함이 느껴지는 항구의 풍경은 넉넉하게 내 마음을 받아주는 듯하다. 포구 주변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어린 시절 내가 봐 왔던 간판과 낡은 가게가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런 가게 사이사이에서 사람들의 숨소리와 느린 움직임이 더 나를 과거로 이끌고 가는 착각마저 일으키게 한다. 차량으로 돌아가다 길가 불판 위에 놓인 골뱅이가 우리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또 한 모금의 술이 필요한 시간인가 보다.

독특한 냄새와 더불어 쫀득한 식감의 골뱅이가 한 잔의 소주와 합해져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전율, 이것이 여행 간 식도락이 주는 즐거움이 아닐까 한다. 저녁을 먹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 고민을 거듭한 우리는 목적지를 변경하여 부산으로 향했다.

장시간의 이동 끝에 차량을 남포동에 주차하고 나의 안내로 자갈치 시장 내 곰장어(먹장어) 집으로 들어갔다. 좁은 공간엔 먼저 온 손님들이 술을 먹고 있었다. 곰장어구이는 산 곰장어를 채소와 함께 양념으로 버무려 연탄불에 초벌구이하고 재차 불판에 구워 먹는 이 지역의 명물 안주거리다.


오늘 처음으로 술을 마시는 준석이 아빠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첫 잔이 주는 짜릿함과 시원함이 온종일 운전으로 피곤한 몸을 풀어주는 청량제가 되었기를 바란다. 간단히 마시고 들뜬 기분으로 남포동과 광복동 일대를 구경하며 다닌다. 나는 고향이 부산이고 한때 이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이 있었기에 자주 여기를 다녔던 기억을 떠올리며 새삼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추억을 떠올려 본다.


유난히 정이 많은 도시, 내 고향이라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시끌벅적한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좋은 곳에서 태어났다 자부한다. 다소 지칠 즈음해서 다시 원기를 보충하기로 하고 족발 골목으로 발길을 옮겼다. 빽빽하게 주차된 차량을 따라서 이동하다 항상 다녀가는 부산 족발에 당도하여 냉채족발을 주문하고 기다렸다. 엄청난 규모의 족발 가게에는 손님들로 가득하다. 옆자리에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이 자리하여 족발을 먹으며 여행의 밤을 즐기고 있었다. 톡 쏘는 겨자를 곁들인 냉채족발이 여기서 만들어져 전국으로 번져나갔다는 가게의 안내를 보면서 맛나게 다들 잘 먹었다.

이미 거리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고 기온은 서서히 내려가고 있었다. 부산에서 이리저리 알아본 호텔은 이미 여행객들로 만실이다. 아무래도 여기서 숙소를 구해 잠을 청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별다방(스타벅스)에 모여 앉은 우리는 프로필 사진을 주제로 사진도 찍고, 오늘 찍은 사진을 교환하며 몸을 데운다.


더 늦기 전에 집으로 가기로 하고 대리운전을 하여 마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힘들게 도착한 집에는 정전의 암흑이 우리를 기다린다. 이것도 오늘 우리가 맞아야 하는 일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괜히 심통을 부리다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로 잠을 청한다.


긴 가을날의 하루가 저물었다. 내 인생에서 단 한번뿐인 2018.11.24. 일 가을 그 하루를 기억하고 싶어 이렇게 긴 글이 필요하였나? 아무튼, 새로운 하루는 항상 초연이다. 재연할 수 없다. 우리는 ‘하루를 정말 잘 보내고 있을까?’하는 물음에 언제든 ‘네’ 할 수 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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