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작의 좋은 글
최근에 2024년 5월 향년 88세로 작고하신 신경림 시인님의 『뭉클』이라는 산문집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시인님께서 여러 작가들의 수필이나 글을 엮어낸 모음집으로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글' 총 40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선생님의 책 서문을 아래에 간략히 소개해 드립니다.
(이 책을 엮고 나서)
나를 '뭉클'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산문을 찾아서
나를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한 데는 선행 시의 힘이 물론 컸지만 산문의 영향도 그에 못지않았다. 가령 김기림의 '길'이나 정지용의 산문들을 읽었을 때 뭉클하게 가슴에 와닿던 감동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시를 공부하면서 틈틈이 산문을 써보는 것이 내 문학수업의 주요한 내용이 되었다. 고교 시절 어떤 문예 콩쿠르 산문 부문에 당선되었을 때 뛸 듯이 기뻐했던 일은 지금 돌아봐도 즐거운 추억이다.
그래서 종종 뭉클하게 가슴에 와닿던 산문을 다시 읽고 싶어질 때가 있어 찾아보았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시라면 좋은 선집이 많이 나와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꺼내 읽을 수가 있지만, 산문은 그렇지 못해 늘 아쉬웠다.
함명춘 시인과 만난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했더니, 그 역시 시 못지않게 감동을 받았던 산문들이 그를 시인으로 키우는 데 큰 몫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특히 성직자나 화가, 음악가 등 비문인의 산문을 읽었을 때의 감동을 많이 얘기했는데 생각해 보면 나도 나비박사 석주명이며 화가 김용준 그리고 민요 학자 고정옥 같은 전문 문학인이 아닌 사람들의 산문을 읽고 무척 감동했던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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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오래전에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던 글들은 지금 읽어도 감동이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책을 엮는 기쁨을 맛보았다. 글을 선(選) 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문학적'이 아니고 '뭉클'임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뭉클'은 '문학적'보다도 한자리 위의 개념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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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은 신경림님의 『뭉클』 40편의 글 중 제일 첫 번째로 수록된 김유정의 『필승 전前』을 소개해 드립니다. 김유정 선생님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소설가이자 수필가, 시인으로 농촌 현실과 서민들의 삶을 사실적이고 해학적으로 묘사한 것이 특징입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1937년 3월 향년 29세에 폐결핵으로 요절하셨습니다.
이부작은 이 편지를 읽고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김유정 님의 친구 필승에 대한 천진난만한 장난기와 꾸밈없는 우정과 유머감각 그리고 돈도 없고 아프고 힘들지만 이를 극복해 보겠다는 삶의 의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마 글 이웃님들도 이 편지를 읽어보시면 인생의 희로애락을 맛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짧은 편지를 감상해 보겠습니다.
필승 전前 _ 김유정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100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주기 바랍니다.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해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한 두어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번역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해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뭇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해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 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3월 18일
김유정으로부터
여러분,
김유정 님이 친구 필승에게 보내는 편지 잘 읽어보셨는지요? 김유정 님이 요즘과 같은 좋은 시대를 타고났으면 폐결핵도 이겨내고 장수하셨을 텐데요, 너무 빨리 저세상으로 소풍 떠나셔서 많이 아쉽습니다. 아마 어쩌면 지금도 천국에서 친구 필승을 만나 함께 매일 닭도 먹고 뱀도 사냥하는 땅꾼도 되어 못다 한 글과 시를 쓰고 계시지 않을까요? 늦게나마 신경림 시인님의 뭉클로 필승 前 같은 좋은 편지를 접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많이 웃는 날 되세요^^
ps. 나중에 김유정 님의 '필승 前'으로 팔자 詩나 N 행시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