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인 반이다
[시작이 반이다]
히말라야의 햇빛은 공기가 오염되지 않아서인지 서울의 햇빛보다 훨씬 강렬했다. 등위의 짐이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하였지만 오르막길이 아니어서 참을 만했다. 한 시간을 걸어서 배꼽시계가 작동할 즈음 나디에 도착했다. 나디에는 20~30여 개의 롯지(lodge)가 있었고 그중 강 옆 비교적 깨끗해 보이는 곳에 짐을 풀었다. 방은 작년에 보았던 히말라야의 여느 롯지들과 똑같았다. 널빤지로 벽을 만들고 방안에는 나무 침대 2개에 빛바랜 매트리스, 그리고 나이 먹어 축 늘어진 베개가 전부였다. 다행히 구형 전구에 불은 잘 들어왔다. 우선 하루 종일 먼지를 뒤집어쓴 몸이 갑갑하여 서둘러 샤워를 했다. 샤워장의 물은 미지근했고 널빤지로 사방이 막혀있지만 이음새 사이로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샤워를 마치고 나니 오후 4시 30분쯤 되었다. 주위의 고요함과 시간의 여유가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습관적으로 디카를 들고 마을 풍경을 사진에 담으면서 어슬렁 돌아다녔다.
'그제만 해도 서울의 자동차 경적소리와 휴대전화 너머로 사람들의 악쓰는 소리가 온몸을 포위했었는데 이곳 히말라야에는 바람 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개 짖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완벽한 평화와 고요의 세상이군’
히말라야의 성수기는 보통 11월부터 그 이듬해 3월까지이며 5월부터 9월 초까지는 몬순이라고 해서 우기 기간으로 여행객이 많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붐비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성수기에는 롯지를 잡기도 힘들다) 추위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작년에 이어 9월에 트레킹을 시작한 것이었다. 저 멀리 태양이 히말라야 산자락으로 숨어들어가고 있었다. 바쁠 것 하나 없이 느긋하게 롯지로 돌아가서 볶음밥(fried rice)를 주문하였다. 히말라야의 롯지들에선 음식값과 숙박 값 그리고 각종 생필품 값들이 정부에서 지정한 대로 정해져 있었다. 물론 트레킹을 시작하는 저지대에서 보단 고지대가 가격이 비싸지만 터무니없는 바가지는 없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사람 또는 당나귀들의 등에 음식재료 및 생필품들을 날라야 하기 때문에 높은 곳일수록 당연히 가격은 더 비싸졌다. 그래서 보통 트레킹 중에 방값은 200RS, 고지대라도 300RS를 넘지 않지만, 음식값은 100~300 정도로 한 끼 식사가 방값보다 비싸진다. (여행 당시 1달러=71RS=1100원으로 1RS에 약 15원 정도 되었다) 그래도 아침, 점심, 저녁에 방값을 다 지불하고 중간중간에 콜라나 생수를 사 먹더라도 하루에 1000RS 정도밖에 비용이 들지 않았다. 거기에 포터 비용으로 하루에 보통 8~10달러가 소요되니 이를 다 합해도 한국 돈 3만 원 정도로 하루 동안 멋진 히말라야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롯지의 야외 정원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 양 발을 다른 의자에 올려놓고 무스탕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꺼멀이 저녁식사를 다했는지 내 옆에 와 앉았다.
"Kamal, did you eat dinner? What did you eat?"
"dalbat, sir"
"You always eat dalbat"
꺼멀은 항상 달밧만 먹었다. 트레킹 중에 꺼멀이 다른 음식을 먹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롯지 주인들이 포터에게 제공하는 게 달밧 밖에 없어서인 것 같지만 가끔 내가 음식을 사 줄 때도 꺼멀은 달밧 만을 시켰다. 트레킹 중에 롯지 주인들의 불문율 중 하나가 포터 및 가이드에게는 식사와 잠자리를 무료로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포터나 가이드들이 고생한다고 그러한 편의를 제공해 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보통 포터나 가이드들이 트레커들을 히말라야의 수많은 롯지들 중에서 자신의 롯지로 안내를 해주기 때문에, 즉 트레커들이 소개받은 롯지에서 음식값과 숙박료 등을 지불한 대가로 혜택을 제공받는 것이었다.
정원 의자에 앉아서 꺼멀의 아이들이 잘 크고 있냐고 물어보았다. 꺼멀의 가족은 지금 카트만두 서쪽에 해발 약 2천 미터 되는 곳에서 살고 있다. 작년에 만났을 때 애가 벌써 3명이었는데 지금도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낸다고 했다. '꺼멀은 27살에 애가 3명인데 나는 34살에 아직까지 뭘 했는지......' 꺼멀이 오늘따라 무지 부러워 보였다.
꺼멀과 이야기 하다가 간단한 네팔 말도 배워보았다. 오늘 배운 네팔어는 ‘What's your name?’이었는데 네팔 말로 ‘데빠잉꼬 남뀨’였고, ‘Sit down please’는 ‘버서누호서’라고 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생활 네팔어를 배워봐야겠다. 밤이 깊어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밖의 강물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침대에 누워서 오늘 지출한 비용을 정리하고 하루 일들을 메모하다 잠자리에 들었다. '시작이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