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by 황프로

긴 여행에서 돌아온 지도 벌써 수개월이 지났다. 올해가 가기 전에, 내가 걸었던 모든 거리의 감상이 더욱 희미해지기 전에 그 이야기를 종이 위에 남겨놓으려 한다.

여름의 문턱에서 겨울의 끝자락까지, 7개월간의 여행이었다. 207일간 아시아, 유럽, 남미 3개 대륙의 18개국 50여 개 도시를 지나왔다. 행복한 날도 있었고 우울한 날도 있었다. 친한 친구와 함께 즐거웠던 날도, 처음 보는 이들과 머리끝까지 흥에 겨웠던 날도, 그리고 홀로 외로움에 몸서리쳤던 날도 있었다. 7개월. 누군가에게는 길 수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짧을 수도 있는, 그리고 누군가는 ‘세계여행’이라 부르는 나의 여행을 종이 위에 남겨놓으려 한다.


1991년생. 2월에 빠르게 태어나 1990년생들과 친구로 지낸다. 이상적인 부모님 밑에서 여동생과 함께 자유롭게 자랐다. 대학에서 실내건축을 전공했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부모님 차를 내차 인양 운전하다 문을 긁은 적이 있고, 가끔 스스로 거울을 보며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딘가로 떠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반복되는 일상에 나는 지쳐있지도 않았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종종 나를 특이하다고 했지만 어느 면으로 보나 누구보다 특별하거나 도드라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1년 동안 재수해서 대학에 입학하고, 몇 번의 연애를 하고, 또래보다 늦게 군대에 다녀왔다. 흔히 말하는 금수저도, 흙수저도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가족뿐이다. 딸을 더 사랑하시는 아버지는 항상 묵묵히 내가 하는 일을 지켜봐 주시고, 아들을 더사랑하는 엄마의 잔소리는 단 하루도 그치는 법이 없다.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은 항상 나보다 똑똑하고 성실한 편이었다. 언제나 투덜거리지만 리모컨처럼 말을 잘 듣는다. 혹은 들어준다. 이등병 시절에 보낸 편지를 제외하면 사랑한다는 말 한번 한적 없는 가족이지만(물론 지금도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특별한 가족에서, 나는 자랐다. 결국 나를 배낭여행으로 이끈 것은 (미리 말하자면 나는 ‘세계여행’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나라를 다녀보는 것을 흔히 세계여행이라 하지만, 한 번의 여행에 담기에 ‘세계’는 너무나도 넓다는 생각이 이유였다) 세상에 대한 크고 단단한 유리알과 같은 호기심이었다. 각기 다른 세상의 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사는지, 무엇을 먹는지, 또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궁금했다. 그들의 거리를 두 발로 걷고, 세상의 신기한 것들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 내 나름의 방법으로 그것들을 기록하고 싶었다.


여행을 기록하는 내 나름의 방법은 역시 그림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151마리의 포켓몬스터를 연습장에 모두 그렸던 것 말고는 딱히 그림과 접점이 있는 인생은 아니었지만, 실내건축디자인이라는 전공은 다분히 그림과 관련이 깊었다. 머릿속의 것들을 계속해서 그림으로 보여주고, 제도와 투시도에 관한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림, 드로잉, 스케치와 같은 단어들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휴학 후 실무 경험을 위해, 또 여행 경비를 모으기 위해 찾아갔던 건축설계 사무소에서 건축가 구승민 소장님을 만났다. 반년이 조금 넘게 소장님 밑에서 일하면서 선을 긋는 방법부터 시작해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우고 연습할 수 있었다. 퇴근 후 카페에서, 휴일에 광화문에서 한 장씩 한 장씩 나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여행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은 점차 ‘여행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로 바뀌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기 전날 나의 허술한 여행 준비물 목록에는 스케치북과 연필, 그리고 플러스펜이 있었다.


이 종이 위의 글과 그림이 나의 여행을 솔직하게 기록하길 바란다. 여행 중에 나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여행을 통해 나의 모든 것이 어떻게 변했는지, 또 여행 이후의 삶이 얼마나 풍성해졌는지 담아내길 바란다. 재미있는 소설처럼, 어느 여행자의 그림일기처럼, 때로는 친한 친구가 들려주는 여행 이야기처럼 누군가에게 읽히길 바란다.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어떤 이의 이야기를 읽고 누군가 긴 여행을 떠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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