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 속에서 사고가 열린 시간

by 솔내

대학 시절, 몸을 크게 다쳐 2년 가까이 치료를 했다. 목과 허리를 다친 탓에 치료받으러 다니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누워서 보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지속적인 두통과, 눈에 모래가 들어간 듯한 불편함이었다. 책이나 미디어 매체를 1분 이상 보기 어려웠다, 머리에 조이는 통증 때문에 생각을 이어가기도 쉽지 않았다.


허리 통증은 거동마저 불편하게 만들었다. 조심조심 걸어야 했고, 앉으려고 일어나다가 허리를 '뜨끔'할 때는 사나흘은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그럴 때는 ‘조금 더 조심하지’ 하며 자책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심한다고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작은 변화에도 민감했다.


어깨와 팔의 저림으로 작은 소반을 드는 것도 힘겨울 때는

‘젊은 나이에 이러고 있다니…’ 한탄스럽기도 했다.

‘책이라도 보고 공상이라도 하면 시간이 이렇게 지루하진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쓰지 않으면 수면의 리듬이 깨어진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10시에 누워 새벽 2시에 잠드는 날이 잦아졌다, 그 긴 시간을 함께 할 사람도 매체도 없었다.

친구를 만나기도 어렵고 시간을 보낼 거리가 없으니 생으로 시간을 견디는 느낌이었다.


텔레비전을 켜놓긴 했지만 화면을 보기 어려워 주로 라디오처럼 소리만 들었다. 그나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거리였다. 이 시기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힘겨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돌아보니 그 와중에 얻은 것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새로운 사고력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생각을 지속할 시간이 짧다 보니, 그 안에 밀도 있게 사고하려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상을 위주로 하다가 연관된 사실들을 떠올렸다.

이후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조금씩 연결하려는 시도가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입체적인 사고 구조가 잡히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그저 불편한 시간의 대안처럼 느껴졌지만, 나중에 글을 쓰거나 강의를 기획할 때 한꺼번에 전체 구도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기억력이나 집중력의 문제를 넘어, 생각을 조합하고,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통합적 사고로 발전하였다.

그 경험을 돌이켜 보면, ‘궁즉통(窮卽通)’—‘궁하면 통한다’는 말처럼, 불편함 속에서 길러진 사고방식이 내게는 또 다른 문을 열어준 셈이었다. 이후 책을 집필하거나 강의를 구성할 때, 처음과 끝을 한눈에 설계하고 구조화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시절 ‘나눠 생각하고, 다시 통합해내려 했던 습관’에서 비롯된 듯 하다.

삶에는 때때로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 순간들을 지나며, ‘절망스럽고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보내느냐’에 따라 이후 삶이 달라지는 것을 체득하는 시간이었다.


※ 이 글은 매거진 〈일상과 명상〉에 실렸던 글을 흐름상 필요하여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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