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음이 시작된 순간

by 솔내

'내려놓기'에 대해 체득한 적이 있다.

몸을 다쳐 몇 해 동안 거의 누워 지내야 했던 시절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시간을 견디며 지내다 어느 순간 깊은 무상함과 허무함에 빠져들었다.

그때 텔레비전에서 한 해외 방송사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우주의 탄생과 지구의 형성, 그리고 현재 인류에 이르기까지 200억 년의 우주 역사와 40억 년의 지구 역사를 보여주였다. 그 속에는 끊임없는 생명의 탄생과 소멸이 반복되었다.


그 모든 시간을 통틀어 무수한 생명들이 태어나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자각하니, 마치 나 자신이 백사장의 모래알 하나처럼 작게 느껴졌다. 나름 사회 정의를 위해 노력하다가 다쳐 누워 있으면서도, 이전까지는 ‘나는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자각이 있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를 본 후, ‘내 존재 하나가 이렇게 있다가 사라진 들 누가 알 것이며, 세상과 우주에 흔적도 남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나를 잠식했다.


그 무상함은 몸의 고통보다도 깊었다. 블랙홀 같은 마음의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듯한 시간이 한 달 정도 이어졌다. 끝날지 않을 듯이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어느 날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한 번에 그 수렁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이것은 몸이 아프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마음일 뿐이다’라는 깨달음이 일어나며, 마음에서 무언가 ‘턱’ 하고 내려놓아지는 듯했다. 몸이 나을지에 대한 걱정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하며 함께 덜어졌다.


그렇게 내려놓아지자, 몸은 여전히 불편했지만 마음은 한결 여유가 생겼다. 그런 변화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나를 다치게 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도 차츰 녹기 시작했다.

사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몰랐다. 그냥 변화를 따라갔을 뿐이었다. 이때의 ‘내려놓기’의 체험은 후에 내가 명상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음이란 무엇일까?’ ‘행복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도 크게 바뀌었다. 지금도 그때 다친 후유증은 남아 있지만,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내 인생이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수련을 하면서 그때의 경험이 흔치 않은 경험임을 알게 되었다. 다른 공부에서 막상 내려놓으려고 하니 쉽지 않았다. 단기간에 드라마틱한 변화는 기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참 노력한 뒤에야 나를 붙들던 애착과 고정관념들이 조금씩 녹아있음을 보았다.

과거의 경험은 과정을 몰랐기에 느낀 반전이었다. 반전의 이면에는 깊은 수렁 같은 한 달여의 시간, 나름 고심한 일 년의 시간이 깔려있었다. 단번에 내려놓은 것 같은 마음도 하루하루의 노력이 쌓여 만든 결과였다.


우리는 자신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든 것을 예측할 수는 없다.

때로는 예상보다 일이 잘 풀릴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럴 때 '내려놓기'는 삶을 유연하게 살아가게 해 주는 유용한 힘이 된다.

중요한 것은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변화를 기다려 주는 마음이 아닐까.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