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와 여우, 예언자와 설교자(2)

by 생각하며 놀자

2. 예언자와 설교자


“Prophets and Priests”는 에릭 프롬(Erich Fromm)이 쓴 에세이의 제목이다. 성경의 문맥 안에서 번역하면 예언자와 제사장 또는 선지자와 사제 등이 될 것이나 나는 프롬이 말하는 의미의 유연성을 위해 예언자와 설교자로 사용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문맥에 따라 혼용해도 무방하다. I. 벌린이 고슴도치와 여우로 사람을 구분했듯이 에릭 프롬은 예언자와 설교자로 대비해서 사람들을 구분하고 있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을 드러내기 위해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언자는 권력을 탐하지 않으며 오히려 권력에 대해 비판하고 경고하는 사람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위해 투옥, 추방, 사형도 불사했던 사람들이다. 생각을 말하고 그대로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이며, 겸손과 정의가 사랑이나 이성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친 사람이다.


이런 선지자, 예언자들은 인류 역사상 드문드문 나타나서 자신의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 또는 신의 인간에 대한 경고를 대신 전하고 죽어가기도 했다. 시대가 사람을 만들 듯이 예언자는 시대의 요구에 책임감을 가지고 응답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시대의 정신을 제대로 포착하여 이를 선포하는 사람이 선지자이다. 구약 성경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종종 등장하는 예언자들이 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에릭 프롬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 아모스의 말,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아모스, 3장 8절)를 인용하면서 ‘어떤 사람이 예언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 예언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이 그렇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 역시 모범적인 예언자 상(像)이라 할 수 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 자신의 뒤에 오는 구원자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말하는 겸손한 자, 권력자의 불의에 대해 비판하고 목숨까지 잃은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제사장, 사제, 설교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예언자들이 선포한 말이나 사상을 이용만 할 뿐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그들이다. 또 이들은 예언자의 말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기에 그 말의 생명력을 잃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제나 설교자가 종교의 세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 문화, 사회, 언론, 철학 등의 영역과 가정, 학교, 시민 사회, 기업, 정부 등 대부분의 조직체 안에도 설교자는 존재한다. 많이 배운 사람들, 지도자들, 교사들, 권력을 쥔 사람들, 현실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앎과 삶이 일치하지 않아도 괴로워하지 않고 뻔뻔한 사람들 그리고 불의나 양심에 어긋나는 명령에 대해 ‘아니오(no)’라고 말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모두 크고 작은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설교자들이다.


예언자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혁명가 중에서 더 쉽게 발견되며, 설교자는 보수적인 집단에서 찾기 쉽다. 선지자나 예언자는 과거나 현재보다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볼 줄 알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재를 팔아서 미래를 사라고 외치는 사람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과거를 팔아 현재의 이익, 그것도 자신의 이익을 사라고 유혹하는 사람들이다. 길거리에서, 시위 현장에서, 온라인 방송에서 그리고 유튜브 영상 속에서 우리는 매일 그런 설교자들을 수없이 만나게 된다.


예언자도 설교자도 아닌 우리는 누구이며, 이들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듣는 청중이다. 예언자의 목소리는 듣기 어렵고 때로는 쓴 약과 같아서 듣기 거북할 때가 많다. “그(예언자)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는다.”(이사야서 42:2) 그러나 설교자의 목청은 크고 소란스러워 가까이서 들린다. 설교자의 소리는 2,500년 전 그리스 아테네의 광장(agora)을 오염시킨 알키비아데스의 선동 소리와 같고, 2,000년 전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에서 한 예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도록 저주한 제사장의 목소리와 같다. 그 죽임당한 젊은 선지자는 거짓 예언자들이 출현해서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더라도 믿지 말라고 우리에게 충고했다. 그런 다음 듣는 귀가 있어 제대로 듣는 청중들에게 ‘그러니 깨어 있으라’고 말하였다.


청중들은 예언자이거나 설교자이거나 간에 누구의 말도 듣거나, 또는 듣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 왕권 시대나 독재 시대에 살았던 청중들도 제한적이었기는 해도 그런 권리와 자유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미디어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과잉으로 들려오는 소리는 선택과 거부의 역량을 뛰어넘고 있다. 무차별적으로 제공되는 설교자들의 말과 글은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조차 없을 만큼 혼동을 일으키고 있는 경우가 많다. 거짓 선지자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디어 문해력이 약할수록 예언자의 경고에는 귀를 닫고 거짓 설교자의 감언이설에는 환호하기 쉽다.

예언자와 설교자를 구별하기 위해서 깨어 있으라는 말은 오늘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로 살아 있다. 특히 나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아주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인, 정당, 종교를 선택할 때 각성(覺醒)된 눈과 귀를 가지고 예언자인지 아니면 설교자인지 식별해 내야만 한다. 이 식별력은 마치 고슴도치가 알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그것과 같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남의 거짓에 속거나, 자기를 잃어버리거나, 타인으로부터 정신적 또는 물질적 손해를 입지 않을 수 있다. 거짓 예언자, 감언이설 설교자들이 넘쳐 나는 세상에서 자기방어를 위한 비책(祕策)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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