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음'은 '싫음'을 이길 수 없다.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왔다. 많다면 많은 아이들을 만나고 또 떠나보내 왔지만 오랜 기간 함께한 아이들이 떠날 때는 섭섭하고 마음이 안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떠나는 이유를 물어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나' 때문은 아니라고 한다.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아이들과의 관계라면 더 쉽게 알 수 있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노골적으로 물어본 적이 있다.
"너희들은 내가 왜 좋아?"
대답하기를, 내가 자기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것을 알겠다고 했다. 정말로 학업에 도움이 되기를, 성적이 향상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지도해주는 것이 좋다고 했다. 또 하나는 친근하게 대해주는 것, 나의 친화력이 좋다고. (필자는 진정으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에 사람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 역시 단점이 있겠으나 (분명히) 이런 장점들이 있어서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잘 지내왔다. 웬만해서는 한 번 만난 아이들은 나와 쭉 함께 공부를 한다.
그래도 아이들은 떠난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그래도 떠남의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싫음'이다. '좋음'이 있기에 '싫음' 또한 존재한다. 비교 대상이 있다는 것은 '싫음'에 속하는 그것이 더 '싫고,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의 선택은 이렇다. '선생님을 떠나는 것은 아쉽지만, 다른 어떤 것이 너무 싫어서 결국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선택과 결정의 문제에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가 제1의 기준이 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싫음' 또한 선택과 결정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아마도 거의 '좋음'은 '싫음'을 이길 수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싫음'이 '좋음'을 이기는 것이 때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고3 수학 문제를 풀면서 (가르치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었던 적이 있다. 진짜 너무너무 하기가 싫어서 한숨만 푹푹 나왔는데 그렇다고 내가 이걸 안 풀면 아이를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고, 그것은 나의 직무유기이기에 그러니까 나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싫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한숨을 푹푹 쉬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도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최소한 무책임한 사람은 되기 싫어서.
'더 싫은 것',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실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좋아해 왔던 것을 버릴 수 있는 힘이 있고, 익숙하고 편안한 곳을 떠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싫은 것을 참아내고 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우리의 인생이 '싫음'에 의해 떠밀리는 듯 보여도 어쨌든 그 힘에 의해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선택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