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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Dec 24. 2021

Return (2003)

- 아버지를 밟고 서서 어른이 되어 간다 

감독 :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출연 : 블라디미르 가린, 이반 도브론라보프, 콘스탄틴 라브로넨코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80위에 랭크된 러시아의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의 영화 <리턴>을 보았다. 즈비아긴체프 감독의 영화로는 47위에 랭크된 <리바이어던>을 먼저 보았고 이 영화를 봤으니까 이제 두 편을 본 것이다. 최신작 <러브리스>도 평이 좋던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영화도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잘 만드는 사람인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영화 후반부까지는 과연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감을 못 잡았다. <리바이어던>과 연결 지어 생각하니까 '아버지'가 상징하는 바가 '권력'이구나 싶은 거다. 그러다가 후에 아버지가 죽는 장면 이후에는 '어? 뭐지?' 하게 되었다. 이후에 형 안드레이가 변하는 모습을 보고 이건 '성장'을 다루는 것 같은데 했지만 이 영화를 먼저 본 분들의 평점과 짧은 평론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숨길 수는 없을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나서 떠오른 단어는 <황량함의 미학>이라는 말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우울한 색채를 띤다. 잿빛 건물들, 초록색깔의 식물들은 있지만 알록달록한 꽃은 없다. 연둣빛이 아닌 짙은 청록색의 숲, 검은빛을 띠는 바다,  인가가 드문 비포장도로 등 황량함을 느끼게 하는 배경들만 줄곧 나온다. (아버지가 타고 온 자동차만이 빨간색이다) 또 영화 초반 아이들의 엄마가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 영화에서는 아버지와 두 아들 외에는 거의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셋의 관계도 화기애애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굉장히 퍼석거리고 황량한, 그런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차남 이반(이반 도르본라보프)은 동네 친구들과 형 안드레이(블라디미르 가린)가 모두 다이빙에 성공하고 자기 혼자 남자 놀림당할 것이 두려워 전망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는데 그때 엄마가 올라와서 아이를 달랜다. '다음에 하면 된다.' '엄마도 아무 말하지 않을 거다.' 하면서. 그러나 엄마의 말과는 달리 친구들은 이반을 겁쟁이라고 놀린다. 형인 안드레이까지 놀림에 가담하자 치고받으면서 집까지 뛰어오는데, 집에는 12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고 있다. 오래된 사진을 꺼내보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인 것을 믿는다. 아버지(콘스탄틴 라브로넨코)는 아무렇지도 않게 식탁 상석에 앉아 가장 인양 거들먹거린다. 그리고 너희 둘과 내일 여행을 떠날 거라고 말한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을 계획하고 기분 좋게 출발한 여행은 안드레이, 이반 두 아이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특히 차남 이반은 거의 출발하자마자 집에 돌아가고 싶어질 정도로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게 된다. 

12년 만에 나타나서는 '아빠'라고 부르라고 강요하고, 식사할 곳을 찾으라고 안드레이를 보낸다. (처음 와보는 낯선 곳인데) 배고프지 않다는 이반을 끌고 가 억지로 식당에 앉히고, 끝까지 다 먹으라고 한다. 아버지는 안드레이에게 지갑을 주고 종업원을 불러 계산하라고 시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지갑을 꺼내 이반에게 돈을 보여주다가 그 동네 양아치들에게 얻어 맞고 지갑을 뺏기는데, 아빠가 차를 타고 따라가서는 지갑도 찾고 범인도 끌고 온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너희도 당한 만큼 갚아주라.' 고 한다. 물론 아이들은 그냥 보내주라고 한다. 약해 빠졌다고 뭐라고는 해도 아빠는 배고파 지갑을 훔쳤다는 그 아이에게 돈을 들려서 곱게 보낸다. 계속 불평만 늘어놓는 이반을 길 한가운데 내려놓고 떠나기도 하고, 여기도 물고기가 잘 잡힌다고 다른 데 가지 말자는 말도 무시하고, 사람이 없는 무인도로 안드레이와 이반을 데리고 가지만 아이들은 강제로 끌려가면서도 지금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한다. 



빗속 진흙땅에 바퀴가 빠졌을 때 비옷을 입고 나뭇가지를 구해다가 바퀴 아래 넣고, 차도 밀어 보고 운전도 해본다. 나룻배에 모터를 달아 망망대해를 지나 섬으로 들어가는 풍광이 황홀하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아버지가 사실은 조금 멋있다. 텐트를 치고, 자연에서 먹을 것을 구해 끼니를 해결하고, 높은 전망대에 올라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바다 끝을 보기도 하고, 빗속에서 노를 젓고 바닷물에 설거지도 해본다. 물고기가 잘 잡힐 때,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올 때의 짧은 순간을 빼면 모든 것이 불만인 이반은 급기야 칼을 숨겨 여차하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으름장도 놓지만 그 반항심이, 먹을 것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 그들을 바다로 나가게 한다. 안드레이와 이반은 그렇게 나룻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물고기를 잡으러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1시간 안에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말을 그들은 무시한다. 3시 30분이 약속한 시간이었는데 7시가 되어서야 돌아갔으니 아버지 속이 얼마나 탔을까. 걱정한 만큼 화가 난 아버지는 장남 안드레이를 때린다. 분노를 못 참아서 행하는 폭력이 아니라 훈계에 가깝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냐. (걱정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형을 때리는 것을 본 이반은 칼을 꺼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덤비다가 숲 속 안쪽으로 도망친다. 어제는 무서워서 올라가지 못했던 전망대를, 분노를 에너지 삼아 끝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오지 못하게 문을 닫아버리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여기서 뛰어내릴 거야.' '나도 할 수 있어.'

겁이 난 아빠는 통로가 아닌 바깥 낡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데, 아이에게 거의 다다른 순간 나무가 부서져 추락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죽는다. 



"내 아들 반야!"


아이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으면서 외친 아버지의 마지막 말.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차남 이반과 아버지의 반목을 주로 다루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 달라지는 것은 이반이 아니라 안드레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안드레이는 울지 않는다. 이반은 운다) 배로 모셔가기 위해 도구를 만든다. 짐을 챙겨 나룻배에 싣고 아버지가 고쳐뒀던 모터를 달고 아버지가 자기를 데리고 들어올 때에 했던 것처럼 그렇게 동생 이반과 아버지의 시체를 싣고 육지로 나간다. 시체를 옮기느라 지쳐서 힘들다는 이반을 다독이고,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이반을 다그치거나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까 불안해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 생각하고 그대로 따라 하면서 이반을 책임진다. 자기가 한 짓이 있고, 형 아니면 의지할 데가 없는 이반도 순순히 형의 말을 따른다. 

아버지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에 무사히 도착한 둘은 아버지의 시체가 놓인 나룻배를 그냥 두고 짐부터 옮기기로 한다. 다 옮겨놓고 이제 아버지를 모셔오려는데 아버지를 태운 나룻배는 이미 바다 저 편으로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는 배와 함께 물속에 가라앉는다.

안드레이는 양말이 다 젖었다는 이반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조용히 말한 후 운전을 해서 그곳을 벗어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겁게 짓누르듯이 관객을 끌고 가지만 잔혹함과 무거움을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낸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영화에는 반드시 '영상미'라고 할만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또 안드레이가 거의 대부분 목에 걸고 있는 카메라와 망원경이 영화를 표현하는 재료로 잘 쓰였다. 이반과 안드레이가 망원경을 통해 바라보는 풍광을 카메라가 두 번 그렇게 표현하는데 시종 묵직하게 가다가 망원경 안에서 흔들리고 여기저기 움직이고 거리감이 좁혀지면서 뭔가 '기분 전환'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엔딩을 카메라로 찍은 사진(흑백)들을 이어서 보여주는데 아주 잘 만든 엔딩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아버지는 사라지고 없지만, 아버지는 있었다. 

나의 손을 잡고, 나를 안아주고, 날 보고 웃던 아버지. 우리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며 꺼내보던 아버지. 

가보지 않은 곳으로 데려가 해보지 않은 일들을 시키며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던 아버지.

12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와 7일간 함께 하고 다시 헤어졌다. 

그러나 엄마 품에 안겨서 놀림받기 싫다고 응석 부리던, 조금만 맘에 안 들어도 반항하고 화내는 이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동생을 같이 놀리며, 밥 먹을 곳을 찾으러 갔다가 혼자 3시간이나 동네 구경을 하던. 동생 이반에게 이리저리 휘둘려 아버지를 4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안드레이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역시 안드레이와 이반의 마음속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람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영화가 '하나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가 떠올랐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도 자연스레 따라올 수밖에 없다. 


성장이란 무엇인가.

먼저는 익숙함을 벗어나야 한다. 내가 살던 집과 동네를 떠나, 가보지 않은 낯선 곳에 발을 디뎌야 한다.

힘들어야 한다. 쉽고 편하게 성장하는 길이란 없다. 해보지 않은 것을 해봐야 하고,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고 보기 싫은 것도 봐야 하고 그 모든 것을 인내해야 한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으면 빠르다. 이렇게 하는 거라고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 순간이 왔을 때 도망치면 안 된다. 내가 책임져야 할 때, 내가 선택해야 할 때가 오면 책임지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달라진 나는 내가 있던 곳을 좀 더 낫게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성장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속한 곳의 변화를 위해 기꺼이 성장하기로 결심하는 우리 모두를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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