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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Feb 14. 2022

비포 선셋 (2004)

- 잊혀지지 않는 추억에 대하여

감독 : 리처드 링클레이터

출연 : 에단 호크, 줄리 델피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74위에 랭크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셋>을 보았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본 영화인데(혼자서), 그때도 너무 좋았었다. 사실 <비포 선라이즈>를 너무 좋아하는 친구가 있는데, 나는 그 옛날에도 여행지에서 만난 운명적인 사랑 따위는 굉장히 폄하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 친구가 그렇게 그 영화 얘기를 하는데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가, 나중에서야 보고는 '아름다운 영화였군.' 하면서 스스로 입을 닥쳤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는 선라이즈의 후속작이 개봉된다기에 지체하지 않고 극장에 달려가서 이 영화를 보았던 것이다. 


영화 초반에 제시(에단 호크)가 자신의 책에 대해 얘기하면서 떠올리는 그들의 추억이 말하는 도중 살짝살짝 삽입된다. 그때의 에단 호크는 정말 빛나는 미모를 가지고 있었구나.. 하면서 동시에 유명 배우도 세월은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에 애잔함도 느껴진다. 각설하고 80분 러닝 타임의 짧은 영화이지만 두 배우의 호연과 아름다운 연출에 완전히 몰입해서 보게 되는 영화. 스필버그가 오열했다는 장예모의 <5일의 마중>을 보고도 '난 왜 눈물이 안 나지?' 했는데, 얘는 보다가 끝에 가서는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는. 그만큼 제시와 셀린(줄리 델피)이라는 두 남녀의 감정에 잘 이입이 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는 그 애틋함이 스크린 안에서도 형형하게 표현되는 영화이다. 



남자는 9년 전 만났던 그 소녀를, 그녀와 함께 했던 하룻밤을 잊지 못해 글을 쓴다. 그녀와 자신의 이야기를. 그것이 그가 잊혀지지 않은 추억을 가슴에 간직하고서 현실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나의 책을 그녀가 읽어주지 않을까, 이 책을 계기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그녀가 없는 자신의 세상에서 그럼에도 긍정을 놓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낸 것이다. 

반면 여자는 9년 전 만났던 그 소년을 만나러 갈 수 없었던 그 당시 자신의 상황(할머니의 장례식이 겹쳤다)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해 잘 살고 있는 그 남자 때문에 벗어지지 않는 우울감을 안고 살아간다. 환경단체에서 열심히 일하고 데이트도 하고, 음악을 만들면서 나름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무언가로 채워 넣고 있기는 하지만 누군가를 완전히 사랑할 수도 없고 마음 깊은 곳에 깔려 있는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그런데 그가 자신이 살고 있는 이곳 파리로 잊혀지지 않는 우리의 추억을 소재로 삼아 쓴 소설을 홍보하기 위해 날아온 것이다.


그녀를 너무나도 만나고 싶었지만, 정말로 그녀가 자신을 보기 위해 서점(홍보 장소)에 나타나자 남자는 너무 놀랐고, 그리고 그다음에는 한 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감정이 그에게 몰려온다. 자기가 살고 있는 뉴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2시간 후면 출발하지만 그래서 그녀와 인사만 하고 헤어질 수는 없다. 

영화는 서점에서 나와 카페로 가는 길, 카페, 카페에서 나와 올라탄 유람선, 유람선에서 내려 그녀를 집으로 바래다주는 길, 그리고 그녀의 노래 한 곡을 듣기 위해 잠깐 들른 그녀의 집에서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둘로 꽉 채워져 있다. 9년이라는 세월이 말 그대로 무색하다. 끊임없이 이야깃거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만큼 그때의 추억이 너에게도 소중한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9년 전 그들은 어떤 연인들보다도 강렬하게 사랑에 빠져들었고, 함께할 시간을 연장하고, 연락처를 주고받는 대신 6개월 후에도 여전히 서로를 잊지 못한다면 비엔나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있어 가지 못했던 셀린은 그에게 묻는다. 


"비엔나에 갔었어?"


가지 않았다는 그의 대답에 셀린은 다행이라며 안도하지만, 이내 다시 묻는다. 


"왜 안 갔어?"


그리고 머뭇거리는 그를 보며 그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6개월 후, 그들이 약속했던 그 장소, 비엔나에 왔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 역시 가지 못했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그제서야 그들은 '그때의 추억이 너에게도 소중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고 위안을 받는다. 만나기 싫어서가 아니었고, 만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면서도 너무 아쉽다. 왜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너를 보지 못한 9년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를 이야기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얘기하고, 그 사실 사이에 내 생각과 감정을 끼워 넣는다. 셀린은 지금 사귀는 남자가 있고, 그를 사랑하지만 제시 너를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한 적은 없었다는 것, 제시는 대학 다니며 여자를 사귀었고, 그러다가 아이가 생겨서 가정을 이뤘지만 지금은 남들보다도 못한 사이이며 오직 아이 때문에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결론이었다. 




왈츠 한 곡 들어봐요

그냥 문득 떠오른 노래

왈츠 한 곡 들어봐요

하룻밤 사랑의 노래

그날 그댄 나만의 남자였죠

꿈같은 사랑을 내게 줬죠

하지만 이제

그댄 멀리 떠나갔네

아득한 그대만의 섬으로

그대에겐 하룻밤 추억이겠죠

하지만 내겐

소중한 당신

남들이 뭐라든

그날의 사랑은 내 전부랍니다

다시 한번 돌아가고 싶어

그날 밤의 연인이 되고 싶어

어리석은 꿈일지라도

내겐 너무 소중한 당신

그런 사랑 처음이었죠

단 하룻밤의 사랑, 나의 제시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어

난 언제나 행복해요

그날의 영원한 추억 때문에...

다른 사람 품에 안겨있어도

죽는 날까지 내 맘엔 그대뿐

왈츠 한 곡 들어봐요

우울한 마음에 떠오른 노래

왈츠 한 곡 들어봐요

하룻밤 사랑에 관한 노래...




여전히 나는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운명적인 사랑, 하룻밤 사랑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없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랑도 자신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축이 될 수 있다는 것, 잊혀지지 않는 사람, 잊혀지지 않는 사랑, 잊혀지지 않는 추억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랑을 가볍게만 볼 것이 아니구나. 하고 이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제시와 셀린의 그 애틋하고 아릿한 감정이 스크린을 뚫고 나와서 냉랭한 내 가슴마저 울렸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해가 지기 전까지.


그 시간 안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네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분명하게 말하는 것.


지금의 너의 삶을, 일상을 망가뜨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가지지 않고.

그저 널 향한 내 마음만 오롯이 전하는 것.


해가 진 뒤의 시간들을 상상하며 미리 마음 아파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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