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시골 중학생 무작정 서울 전학와서 못먹고 왕따 당했지만 그래도
가난도 소중한 경험이다
돈은 있으면 좋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타락할 수도 있고
가난도 마찬가지이다 돈이 없어서 힘들고 배고프면 돈 벌려고 열심히 하면 성장의 기회가 되기도 하고, 돈에 좌절하면 인생을 돈이 많을 때와 마찬가지로 타락하고 인생을 포기 할 수도 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대통령 아들이 고등학교를 입학하는 해부터 속칭 뺑뺑이 추첨제로 바뀌었고
고등학교별 경쟁 입학시험이 없어지면서
이왕이면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가겠다는 생각에 새로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3살 많은 형과 같이 중학교를 서울로 전학을 온 것이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믿음으로 촌놈이 완행 열차에 몸을 실고 창밖을 보니 모두 나를 부러워하고 축하 해 주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지금 생각하면 단칸방에서 형과 같이 자취를 하면서 밥도 하고 연탄불도 갈면서
중학교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고생이 많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형과 같이 남자들끼리 밥하고 자취를 한다는 것이 왜 그리 창피 하였던지...
학교 친구들이 우리 집에 한번 놀러 가보자고 할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남자라고 항상 당당하고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시골에서 6시간 이상 걸리는 완행 열차를 타시고 서울역에 도착 하시면
서울역에서 서대문까지 버스비가 아까우셔서 쌀을 손수 짊어지고 배달 해 오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온다. 하늘 나라에서는 편히 쉬고 계실는지...
그렇게 3년을 보내고 고등학교는 지방에는 아직 추첨제가 아니고 시험제가 계속 되고 있어서 지방 명문고를 가겠다는 생각에 다시 시험을 보고 지방 고등학교로 내려 가게 되었는데
나름대로 지방 명문인 D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운이 좋게도 서울공대에 합격했다.
지금이야 합격자 통보를 인터넷으로 직접 즉석에서 확인이 가능하지만, 내가 살던 지역은 전화도 없던 시골이라 직접 합격자 통보를 확인하고자 혼자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전학 올때 타고 왔던 완행 열차를 다시 타고,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대학교가 있는 관악까지 가서 교문 앞에 붙여 놓은 벽보를 보고 합격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지금도 그 당시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느낀 그 기쁨과 놀라움은 내 평생 결코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 3학년 때도 혼자 자취하고 하숙을 하면서 불면증과 몸이 쇠약 해져서 시골집에서 한 달 이상 요양하면서도 합격한 것이라 그 기쁨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당시는 과학강국을 꿈꾸고 산업화 시대에 기술자를 우대하는 시절이라 동경하던 서울공대의 입학은 더 큰 기쁨이었다. 혼자 나름대로 내가 한번 노벨상을 기대하기도 ......
요즘은 지방의대까지 다 보고 안 되면 서울공대에 간다고 하니 학생들의 의식과 사회 인식이 많이 변화한 것 같다. 힘들게 대학을 합격했으니 대학 와서는 미팅이나 하고 노는 줄 알았다.
물론 실제로 공부를 어지간히 제대로 안 하긴 했다. 미팅할 시간도 돈도 없었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책임 져야 했다. 그런데 공학 계열로 입학한 것이라 2학년 올라 가면서 학과 선택이라는
중요한 고비가 있었기 때문에 인기있는 좋은 학과에 가기 위해서는 대학교 1학년 때에는 다들 더 열심히 공부해야만 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학점을 거의 바닥으로 깔아서
전자공학과를 가겠다는 꿈은 일찌감치 포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지원자가 없어서 미달인 조선공학과를 전공으로 삼게 되었는데, 그러니 학과에서 공부를 제대로 했겠는가? 당시 공학 계열에서는 거의 바닥으로 과에 대한 열등감도 있었고 KAIST로 대학원이나 간다고 오히려 기계과 수업을 들으면서 전공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으로 대학을 보냈던 것 같다
서울 공대 조선공학과를 나오고 KAIST 기계과 대학원 시험은 도저히 실력이 안 될 것 같아서 포기하고
갑자기 취직해서 돈이나 벌어야 갰다는 생각이 들어서 병역특례로 조선공사에 입사를 하고자 전형을 마쳤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자격 요건인 대학교 졸업하면 거의 합격하는 기사 시험에 떨어지면서 그것마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어정쩡하게 어영부영 보낸 대학 생활의 결과였다
어쩔 수 없이 군대를 가야 하는데 다행히 OCS 해군장교 시험에는 합격이 되어서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군에서는 해군전력 증강 사업 일환으로 현대 중공업에서 건조중인 군함의 해군 감독관 근무와 해군 본부에서 신형 군함 건조 사업 부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해군 중위 제대후에는 당연히 조선관련 회사에 대리 경력직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촌놈이 서울에서 살겠다고 기아자동차에 신입사원으로 입사지원을 했다.
면접 때 왜 조선공학과를 나와서 자동차 회사에 지원 했느냐 는 질문에는
“수륙 양용 자동차를 만들고 싶다“라고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적당히 둘러댔는데,
사실은 서울 아가씨랑 연애도 하면서 서울 사람이 되겠다고 방향을 확 변경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너 없는 회사에서 나중에 사장이라도 한번 해 보겠다는 꿈을 갖고 입사했지만 기아자동차가 망할 줄은 몰랐다
회사가 망하니 많은 직장 동료가 자의 반 타의 반 회사를 떠났는데 이 와중에 나도 잘리면서 사회 생활의 쓴맛과 이 회사 저 회사 다니면서 어릴 땐 심심할 때 같이 놀아주고 숙제도 같이 하던 친구들과 비교하고 시기 질투도 생기면서 경쟁 상대로 변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잘되기를 바라고 축하한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안되기를 바라고 나 자신이 열등감이 생긴다. 우리가 속 마음을 그대로 들어내 산다면 우리의 추악한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 할 것이다, 물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인생도 아름답다
인생이 잘 안 풀리고 실패만 한다면 한번쯤 나의 재능과 좋아하는 것으로 남을 위하고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돌이켜 보니 실패의 원인과 성공의 이유도 알게 되었다. 나만 잘 사고 돈 벌면 된다고 할 때는 그 결말이 처참하다, 하늘도 사회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버린다, 만사가 풀리지 않는 것이다
크게 돈은 벌지 못했지만 일찍이 가난을 경험하면서 돈의 소중함과 힘을 알게 되었고 월급 말고도 주식이다 부동산이다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실패도 했지만 작은 성공도 있었고 경제적으로 큰 돈은 못 벌었지만 열심히 살고 있다. 어릴 때 꿈과 동심으로 돌아가 남을 대하고 사회일을 하니 그것이 바로 행복이었고 성공이었다. 어릴때 밥하고 연탄불 갈면서 창피했던 일들도 지금은 추억으로 남고 좋은 경험 이었던 것 같다. 항상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닥치지만 지나고 보면 나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될 수도 있으니 순간 순간을 알차고 가치있게 보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