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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로chaaro Oct 27. 2022

웰시코기 다리처럼 하찮은 후회들

프롤로그

1.

그날도 스마트폰으로 시시껄렁한 유머 글을 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다리 사이에 베개를 끼고는 엄지손가락만 바쁘게 움직였다. 사실 딱히 흥미로운 것도 없었다. 그저 다음 페이지로, 또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뿐이었다. 나는 생각 없이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링크를 클릭하고 있었다.

 

그때 시시껄렁한 글 중에서도 특히 시시껄렁한 글이 나를 사로잡았다. 제목이 뭐였더라? '회귀할 때를 대비하여 외워둬야 하는 것들'이었던가? 아무튼.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과거로 돌아가 있더라.'라는 기적 같은 상황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도 있으니 미리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글이었다. 즉, 당첨금이 특히 컸던 244회 로또 번호나 급등했던 주식 종목 몇 개 정도는 평상시에도 미리 외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로 회귀하는 드라마나 웹 소설이 한창 유행하던 참이었는데,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역시 정글 같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가 녹록지 않은가 보다. 로또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가 배신당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미쳐가고 있다. 하긴 나라고 별반 다를까. 나 역시 그 글을 읽자마자 외우기 쉬운 것들 -2009년에는 비트코인을 사야 한다던가, 2020년에는 신풍제약 주식을 사야 한다는 것 따위-을 얼른 외웠으니 말이다. 사실 나도 그 '로또가 마지막 보루였던 사람들' 중에 한 명이다.



2.

나는 과거로 돌아가면 꼭 비트코인을 살 것이다. 상한가를 여러 번 친 신풍제약이나 동성화학 같은 주식도 살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조물주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건물주가 될 것이다. 그래서 풍문으로만 듣던 '경제적 자유'라는 것을 만끽할 것이다.


만약 더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러니까 주식도 할 수 없고 비트코인도 나오기 전인 고등학생 즈음으로 돌아간다면 다른 전공을 선택할 것이다. 어떤 분야가 유망한 지, 어느 학과가 취업이 잘 되는지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내가 공부하고 싶은 학과를 선택할 것이다. 어차피 돈은 졸업하고 주식과 부동산, 코인으로 충분히 벌 수 있으니 근로소득 정도는 포기해도 상관없다. 흥미로운 분야를 공부하고, 그것을 업으로 삼아 전 세계를 자유롭게 여행하며 다니며 디지털 노마드로 살 것이다. 경제적 자유를 이미 누리고 있는 상태에서 취미처럼 일을 할 것이다.


나는 뉴욕 맨해튼 고층건물에서 도시 야경을 감상하며 일을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느 따뜻한 나라의 휴양지 별장에서 쉬엄쉬엄 일을 할 수도 있다. 일을 하다 머리를 식혀야 할 때는 별장에 딸린 수영장에 갈 것이다. 어쩌면 그 별장은 침실에서 수영장까지 미끄럼틀로 연결되어 있는 이색 별장일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든지 옷을 훌훌 벗고 침실에 붙어있는 미끄럼틀을 탈 것이다. 그 미끄럼틀은 풀장까지 곧장 연결되어 있어서 나는 언제든지 수영장에 풍덩 빠질 수 있을 것이다.



3.

아이고. 허무한 상상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현실의 나는 건물주가 아니고, 우리 집에서 내가 풍덩 뛰어들 수 있는 곳은 수영장이 아니라 내 방 침대 위 널브러진 이불속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런 같잖은 망상을 해 보았자 결국 기분만 잡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빨리 현실로 복귀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본디 쿨하지 못한 성격이어서 그런지, 가끔은 이렇게 망상과 후회를 번갈아 오가며 나 자신을 괴롭힌다.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제법 많았는데. 그중 단 하나도 잡지 못한 나 자신이 미련하게 느껴져서, 후회를 멈출 수가 없다. 백 번 양보해서 비트코인이나 주식은 과감하게 사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몇 년 전 기회가 왔을 때 집을 사지 않은 것은 특히나 후회가 된다. 대출을 많이 받는 게 무서워 집을 사지 않았었는데, 겁쟁이의 대가는 무주택자이다.



4.

그나저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지 궁금하다. 비트코인으로 돈을 벌었는지, 아니면 이런 영양가 없는 후회 따위는 하지 않을 정도로 담대 무쌍한 사람인지 말이다. 


5.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게 마음이 호방한 인간이 못 된다. 그래서 '~할걸'이라는 후회를 끊임없이 한다. 이런 것을 '반추적 사고'라고 부른다고 한단다.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을 계속 떠올리며 곱씹는 모양새가 소나 양 같은 반추동물이 삼켰던 음식을 다시 토해내 되새김질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러한 반추적 사고는 안 하는 편이 낫다. 이미 지나간 과거 때문에 현재 기분까지 망칠 필요가 없으며, 이렇게 쓸모없는 후회를 할 시간에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후회를 끊임없이 곱씹는 나 같은 인간도 있는 법이다.


6.

어쩌면 후회란 내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동반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질량 보존의 법칙'이나 '또라이 총량 보존의' 법칙처럼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에게는 '후회 총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것이 적용되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할걸'이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달고 살 팔자 인지도 모른다.



7.

그래서 좀 허무맹랑한 생각을 해 보았다. 어차피 후회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좀 작은 후회들로 바꿔 보면 어떨까? 아 그때 "삼성전자 주식을 샀어야 했는데."라는 굵직한 후회가 끼어들 틈이 없도록 자잘한 후회들로 머릿속을 꽉 채워 버리는 거다. "어제 밤늦게 불닭볶음면을 먹지 말걸." 하는 정도의 만만한 후회가 적당하겠다. 아니면 "고등학교 때 GOD 팬클럽에 들걸." 정도의 작디작은 후회. 뭐랄까. 마치 웰시코기 다리처럼 짧아서 하찮고, 어찌 보면 좀 귀엽기도 한 후회 말이다. 생각하면 가슴이 쓰린 큰 후회가 떠올라 속상한 기분이 들려고 하면, 재빨리 작은 후회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멘탈은 약하고 귀는 습자지처럼 얇아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나 같이 하찮은 사람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작디작은 후회 말이다. 


8.

후회를 후회로 덮는다니 이 무슨 궤변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궤변이다. 게다가 현실 도피이다.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뼈저린 후회를 바탕으로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이다. 추후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후회할 일 자체가 없어진다. 이를테면 거시적인 경제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죄로 벼락거지가 되었으니, 열심히 경제를 공부하여 부자가 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 과거로 돌아가서 비트코인을 살 수도 없고, 집값은 이미 높으니까. 그런 고로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 도피이다. 


다행히도 내 인생에 후회들은 차고 넘친다. '취직도 안 되는 이런 전공을 선택하지 말걸'이라는 무거운 후회는 그대로 흘려보내고, '그때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정성 쏟지 말걸'이라는 후회 쪽으로 방향을 틀련다. 그에 따른 온갖 잡생각들이 떠오르면 더 좋다. 어차피 이 후회와 잡생각들의 목적은 큰 후회를 잊기 위함이니까. 


사랑의 슬픔은 또 다른 사랑으로 잊는다고 했다. 같은 원리로 후회의 슬픔은 또 다른 후회로 잊으려는 것이다. 



9.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지 또다시 궁금하다. 현실을 외면하는 한심한 정신 상태에 혀를 끌끌 차고 있는지, 아니면 아주 조금은 그럴듯해 보이는 나의 궤변에 호기심이 동하였는지 말이다. 만약 후자라면 당신도 나와 함께 과거의 하찮은 후회나 한 번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떠실는지. 


일단은 내 후회부터 좀 풀어놓으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이다. 대단한 후회가 아니라 웰시코기 다리처럼 아주 하찮은 후회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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