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아로chaaro Oct 27. 2022

문화센터처럼 학교를 다닐걸

아니면 어학원이나 헬스클럽처럼 다닐걸

1.

나는 강의 듣는 것을 좋아한다. TV에서 유명 강사들이 나오는 강연 프로그램도 즐겨 보고 유튜브에서도 괜찮아 보이는 강좌가 추천 피드에 뜨면 챙겨보는 편이다. 얼마 전에는 지역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무료 글쓰기 강좌를 듣기도 했다. 특히 요즈음은 일일강좌가 잘 되어 있어서 어지간한 지식은 -얕은 지식일지언정- 하루 만에도 쌓을 수 있다. 나는 이태원 어느 펍에서 ‘맥주 제조 클래스’ 일일 강좌를 듣고 그럴듯한 수제 맥주 한 병을 손에 넣기도 했다. 



2.

코로나의 여파로 오프라인에서 강의를 듣는 것이 어려워지자 이제는 인터넷 강좌들이 속속히 열리고 있다. 예전에는 인터넷 강의들이 대부분 무료였지만, 이제는 적지 않은 금액을 지불하고 듣는 유료 강의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이런 인터넷 강좌들이 우후죽순 생기는 것을 보면, 강의를 듣고 무언가를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것 같다.  


나도 유료 인터넷 강의를 하나 결제해서 듣고 있다. 한 달에 일정 금액을 내면 그 사이트에 있는 모든 강의를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 구독 형식의 서비스이다. 어떤 강의가 있나 살펴보니 정말 별의별 강좌가 다 있었다. 스트레칭, 다이어트 같은 운동 관련 강좌는 물론이고, 그림이나 수공예 같은 미술 관련 강좌도 다양했다. 각국의 요리 같은 강의는 기본으로 있었고,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인문학이나 심리학과 관련된 강의도 있었다. 의외로 악필 교정이나 다리 찢기(다리 일자 벌리기), 음치탈출 같이 소소하지만 인생의 숙원을 공략한 강좌도 인기가 많았다. 



3. 

어찌나 강좌가 다양하던지, 밥벌이만 해결이 된다면 하루 종일 이 사이트의 강의만 들으면서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스트레칭 강의를 들으며 운동을 하고, 요리 강의에서 배운 음식을 해 먹는다. 심심하면 관심 있는 심리학이나 인문학 강의를 듣거나, 그림 그리기 수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코로나 시대에 노래방에 가기 싫다면 음치탈출 강의나 보컬 트레이닝 강의를 들으며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고, 그 노래의 반주를 위한 악기도 배울 수 있다. 나처럼 강의를 듣고 따라 해 보는 것을 좋아하며, 얕은 지식을 쌓아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매일매일 이렇게 살아도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4.

그때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렇게 하루 종일 다양한 강의를 들었던 적이 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거 그냥 고등학교 수업 아닌가? 


고등학교 체육 수업에서는 스트레칭은 물론이요 각종 스포츠를 배울 수 있다. 미술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내가 유료 결제해서 듣고 있는 드로잉 강의 같은 것은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다 해 본 것이다. 음악시간은 어떤가? 어른이 되고는 콘서트에 가지 않으면 할 수 없었던 떼창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전문적인 보컬 트레이닝을 받을 수는 없지만 문화센터 노래교실과 수준의 강의는 충분히 들을 수 있다. 지적 허세는 사회, 문화, 역사, 과학 등 다방면에 걸쳐서 충분히 채울 수 있다. (사실 원치 않아도 과하게 채워줘서 문제다.) 성인이 되어 영어 수업을 들으려면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고등학교는 기본으로 가르쳐 준다. 운동을 좀 하려면 운동복에 운동 장비까지 장만해야 하는데, 고등학교에는 이 모든 것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 생각을 조금만 바꿔 보면 고등학교 생활이란 다방면의 취미 생활을 고루 경험하게 해 주는 장소인 것이다. 백화점 문화센터 자유이용권을 지급받은 셈이랄까. 



5.

대학교 때는 또 어떤가. 고등학교 때 보다 훨씬 더 좋은 강사진에 더 좋은 커리큘럼을 보유한 교양 강좌들이 즐비해 있다. 아마 사교육에서도 그 정도 강사진을 꾸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 박사 학위 이상의 검증된 교수진이, 생활체육, 외국어를 비롯한 교양 강좌를 담당해 준다. 



6. 

이상의 내 주장에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내가 지금 유료로 구독하고 있는 강좌는 평가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오직 취미로 즐길 수 있는 반면,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수업은 나의 성과가 점수로 매겨지기 때문에 즐기며 수강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게다가 고등학교 수업은 내가 듣고 싶지 않은 강의도 강제로 앉아 장시간 수강해야 하니 즐기기가 더 어렵다. 대학교 수업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전공이 아니라 교양 수업이라고 하더라도 학점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들다. 



7.

그래도 문화센터 취미강좌와 비슷한 수업이 충분히 많았었는데, 이런 식으로 발상을 전환했다면 조금은 더 즐겁게 수업을 듣지 않았을까. 최소한 고등학교 예체능 수업은 훨씬 더 즐기면서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더 즐기고 조금 덜 치열하게 수업을 들어서 예체능 점수가 조금 떨어졌다손 치더라도 대입에 큰 영향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8.

대학교 때에도 조금은 더 모험을 해 볼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다녔던 대학교에는 제2외국어 교양 강좌가 많았다. 어느 학과든지 자유롭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도 평소에 배우고 싶었던 스페인어 기초 수업을 들을까 했었다. 그때 프랑스어 수업을 들었던 선배가 나를 만류했다. 그 선배가 말하기를 나 같이 멋모르고 그 수업을 들으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C나 D학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이름만 '기초' 수업이지 외국어 능력자들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본인이 멋모르고 불어 기초 수업을 들었는데 프랑스에서 몇 년이나 살다 와서 불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하는 학생들이 A 학점을 받고, 외국어고등학교에서 이미 불어를 배우고 온 학생이 B를 받는 지경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 같이 멋모르고 수강신청을 한 순진한 학생들은 C나 D 학점을 받는다고 했다. 결국 나는 선배의 말을 듣고 수강을 포기했었다. 


이렇게 포기한 수업은 비단 스페인어뿐만이 아니다. 운동신경이 없었던 나는 요가, 골프 등 생활체육 수업도 학점이 못 나올 것이 뻔하다는 이유로 전부 포기했었다. 


기껏해야 교양 3학점 빵꾸(펑크가 맞는 표현이다.) 날 뿐이었는데, 왜 그렇게 학점에 연연했을까. 사회에 나오면 그 정도 실력자에게 외국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다시는 없을 텐데. 영어든 스페인어든 마음만 조금 다르게 먹으면 충분히 즐겁게 들을 수 있었는데, 학점이나 점수에 연연해서 그 즐거움을 다 놓쳐버린 것이 안타깝다. 



9.

결국은 원효대사가 깨달은 것을 나도 깨달은 셈이다. 모르고 먹었을 때는 감로수였던 물이, 해골에 담겨있다는 것을 안 순간에 오수가 된 것처럼, 모든 것이 마음먹기 달렸다는 것을 직접 느꼈다고나 할까.


학창 시절에 받던 단체기합-예전에는 학생에게 이런 신체적 고통을 주는 행위가 만연했다.- 중에 ‘투명의자’라는 것이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이건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스쿼트’였다. 같은 행동에 ‘단체기합’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벗어나고 싶은 고통이, ‘스쿼트’라는 이름을 붙이면 트레이너에게 배울만한 운동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학창 시절 들었던 수업에 ‘내신 성적에 반영되는 수업’이라는 이름표 대신에 ‘즐거운 취미 강좌’ 같은 이름표를 달아줄 걸 그랬다. 





+ 후회 그 후... 

'지금은 하기 싫은 일'이 '나중에는 하고 싶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나는 하기 싫은 일에 좋은 이름표를 붙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차가 없어 뚜벅이로 먼 거리를 걸어가야 할 때에는 ‘일부러 하는 산책’이나 ‘동네 구경’이라는 이름표를, 비싼 배달료 때문에 배달음식을 포기하고 요리를 해야 할 때에는 ‘한식 요리 강좌 수강생’이나 ‘자취요리 유튜버’라는 이름표를 붙이며 극복하고 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다. 현실 도피든 정신 승리든 구렸던 내 기분만 좀 나아지면 성공이다! 


이전 04화 UGG부츠를 살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