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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로chaaro Oct 27. 2022

UGG부츠를 살걸

뒤에 큼지막하게 'UGG'라고 적힌 것으로.

1.

어그부츠가 본격적으로 유행을 하게 된 것은 2004년도였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는 지금 보면 꽤나 오글거리는 제목의 드라마에서 배우 임수정 씨가 신고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워낙 투박하고 튀는 디자인 때문에 에스키모라든지, 사냥꾼이냐며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어그부츠 유행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고 익숙해지자 그들도 입을 다물었다. 계속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호감이 생긴다는 '에펠탑 효과'가 진짜인가 보다.


게다가 어그부츠는 실용적이기까지 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어그부츠만 신으면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다. 다리에 스치는 칼바람은 부츠의 긴 목이 막아주었고,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두툼한 밑창이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2.

대부분의 인기 있는 물건이 그렇듯이 어그부츠도 인기가 많아지자 비슷한 디자인의 부츠가 쏟아져 나왔다. 여러 브랜드에서 어그부츠와 비슷한 디자인의 부츠를 내놓았다. 재질이나 색깔은 다양해졌고, 때로는 부츠에 리본 같은 장식이 달려 나오기도 했다. 여러 가지로 변주된 어그부츠가 여러 브랜드에서 나왔지만 결국은 모두 뭉뚱그려져 '어그부츠'라고 불렸다.


구태여 원조를 따지자면 어그부츠의 원조는 <어그 오스트레일리아(UGG Australia)>라는 브랜드이다. 이 오리지널 어그부츠는 좋은 털로 만들어서 맨발로 신었을 때-과연 우리나라 겨울에 맨 발로 부츠를 신을 일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촉감도 좋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이 오리지널 어그부츠는 부츠 뒷면에 큼지막하게 'UGG'라고 쓰여 있어서 오리지널 특유의 간지('멋'이 맞는 표현이다)가 있었다. 그리고 그 간지의 대가는 비싼 가격이었다. 



3.

그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다. 좀 자세히 말하자면 '오리지널 어그부츠를 사고 싶은 대학생'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오리지널 어그부츠를 사고 싶지만, 가격이 비싸서 망설이는 대학생'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리지널 어그부츠는 다른 것에 비해 더 비쌌다. 2~30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살 수는 있었지만, 부츠 하나에 투자하기에는 고민이 되는 가격이었다. 내구성이라도 좋다면 오래 신을 작정으로 살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밑창 내구성이 약한 것이 단점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오리지널 어그부츠의 밑창에 코팅을 하는 방식으로 내구성을 높이기도 하였지만, 또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따뜻하다, 양털의 질이 좋다, 디자인이 잘 빠졌다며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는 있지만 오리지널 어그부츠를 사려는 이유 자체가 간지(다시 말하지만 '멋'이 맞는 표현이다.)인데, 밑창에 코팅까지 하는 행동은 그 간지에 스크래치를 내는 행동인 것 같았다. 게다가 눈이라도 오는 날에 신으면 가죽이 물을 먹어 딱딱해져 망가진다고 했다. 어떻게든 나 자신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설득이 되지 않았다. 



4.

결국 나는 <어그 오스트레일리아>의 오리지널 어그부츠 대신에 더 저렴한 어그부츠를 샀다. 스타벅스 커피 한 잔만 잘못 마셔도 된장녀라며 조리돌림 당하던 시기였던 것도 나의 결정에 한몫했다. 물론 오리지널 어그부츠를 신은 동기들을 보면 조금 (사실은 많이) 부럽기도 하였다. 하지만 디자인도, 품질도 크게 차이 나지 않았지만 가격은 훨씬 더 저렴하니 현명한 선택임이 분명했다. 현명한 선택임이 분명한데 어째서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미련이 남을까. 



5.

그 당시 나는 오리지널 어그부츠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잠시 유예한 것이었다. 어차피 겨울은 매년 돌아오고, 한국 겨울의 추위는 매년 혹독 할 테니 어그부츠는 나중에도 얼마든지 사서 신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취직해서 30만 원쯤은 우습게 쓸 수 있을 때까지 미루자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오리지널 어그부츠를 신었을 때 행복감도 유예가 될 줄 알았다. 말하자면 행복을 '키핑' 해 놓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그부츠는 유예가 되지만 그에 따른 행복감은 유예되지 않았다. 이제는 얼마든지 오리지널 어그부츠를 구매할 수 있지만, 구매한다고 해도 대학생 때 같은 행복감은 느낄 수 없다. 시간이 흐르자 어그부츠의 인기는 예전만 못해졌고, 부츠 뒤편에 UGG 로고도 더 이상 간지가 아니게 되었다. 게다가 그동안 나이도 차곡차곡 먹었다. 30만 원짜리 부츠는 2004년도 대학생에게는 제법 괜찮은 아이템이었을지 몰라도 지금 내 나이에는 그냥 특별할 것 없는 부츠다. 사실 이제는 어그부츠가 예전처럼 어울리지도 않는다. 순전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신는 방한용 신발이 되었으니, 더더욱 오리지널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졌다. 


당시 대학생 과외 아르바이트 시세가 한 달에 3~40만 원이었으니 2~30만 원 하는 어그부츠는 내 형편에 비싼 게 맞았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한 달만 아르바이트를 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냥 살 걸. 사서 행복하게 신을걸. 아직도 길을 걷다가 어그부츠 뒤에 UGG 로고를 보면 대학생 때 오리지널 어그부츠를 사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후회 그 후...

어그부츠를 통해서 지름('구매'가 맞는 표현이다)에도 때가 있고, 그에 따른 행복감은 유예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30대에 샤넬백을 샀다. 40대가 돼서 샤넬백을 사면 30대 때 산 것만큼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형편에 맞는 소비인가 혹은 현명한 소비인가는 따지지 않았다. 그저 40대가 되어서 '30대 때 샤넬백을 살걸'이라며 똑같은 후회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허영심 덩어리라고, 명품 상술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 당시 타인의 소비에 된장녀라며 비난했던 그 어떤 사람도 비난받은 사람의 행복감을 보전해주지 못했으니까. 나는 샤넬백을 사서 충분히 행복하고, 적어도 40대의 나는 샤넬백을 사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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