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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로chaaro Oct 27. 2022

짝꿍을 더 먹을걸

혀를 물들이는 날카로운 식용색소의 맛

1. 

박학다식한 친구가 바나나를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부지런히 바나나를 먹어야 해.
바나나는 멸종 위기 종이야.
가까운 미래에는 바나나를 아예 먹지 못할 수도 있어. 


그 친구는 바나나가 왜 멸종 위기에 처했는지를 유전적 다양성의 중요성과 함께 설명해 주었다. 제법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그날도 잡다한 지식을 쌓은 보람찬 하루였다. 



2.

그런데 그 이후로 바나나를 더 이상 먹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은근하지만 끈질기게 신경이 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바나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바나나는 신 맛이 없어서 나처럼 위장이 약한 사람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하물며 값도 싸고 접근성도 좋다. 슈퍼는 물론이요 편의점이나 카페에서도 구할 수 있고, 심지어 바나나 자판기에서도 살 수 있었다. 항상 내 곁에 있을 줄 알았던 바나나가 영영 사라질 수도 있다니! 내가 좋아하는 스타벅스의 ‘망고바나나블렌디드’도 더 이상 못 먹는 건가? 없어지기 전에 부지런히 사 먹어야겠다고 비장하게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하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바나나가 벌써 멸종된 것도 아닌데 왜 또 오버하고 있지. 


그냥 흥미로운 얘기구나 하고 흘려듣고 잊어버리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생각의 꼬리가 길게 늘어질까? 아마도 더 이상 먹지 못하게 된 음식에 대한 미련과, 그 음식을 충분히 즐겼어야 했다는 후회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가 보다. 



3.

더 이상 먹지 못하게 된 음식 중에 가장 아쉬운 것은 <짝꿍>이라는 사탕이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 사탕이라고 했지만, 사탕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작은, 은단만 한 크기의 달달한 알갱이이다. 담뱃갑만 한 상자가 둘로 나뉘어 있고, 한쪽은 포도 맛이 나는 보라색 알갱이가, 다른 한쪽은 딸기 맛이 나는 빨간색 알갱이가 들어있다. 


나는 이  <짝꿍>이 그렇게 좋았다. 둘로 나뉜 독특한 패키지도 그렇고 너무 달지도, 너무 시지도 않고 적당히 달콤 새콤한 것도 좋았다. 작은 알갱이를 오독오독 씹어 먹는 것도 좋았고, 먹을 때마다 상자를 손에 놓고 탁탁 칠 때 나는 찰락 찰락 소리도 좋았다. 특히 포도맛을 먹고 나면 식용색소 때문에 혀가 보라색으로 변하는데 그게 또 불량식품을 먹은 것 같은 묘한 쾌감을 주었다. 심심하지 않게 포도맛과 딸기맛을 번갈아 가며 먹다가, 마지막을 반드시 딸기맛으로 끝내고는 했다. 그러면 보라색으로 물든 혀가 다시 빨갛게 원상 복구되는데, 이 별것 아닌 사실이 나만의 짝꿍을 먹는 노하우인양 뿌듯했다. (나중에 혀가 물들지 않는 천연색소로 바뀐 후에는 이 재미가 덜해졌지만.) 


그런데 이 짝꿍이 단종되었다. 아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전 남자 친구가 짝꿍을 파는 가게를 찾느라 슈퍼를 일곱 군데나 돌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을 때에도 어렴풋이 예상은 했다. 이때 전 남자 친구의 수고에 감동하기보다는 짝꿍을 더 이상 먹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어야 했는데. 결국 원 없이 먹어보지도 않은 채 나의 친애하는 짝꿍은 사라져 버렸다. (짝꿍의 원조격이라는 미국판 짝꿍도 먹어보았지만, 당연하게도 맛이 달랐다.) 



4. 

라면도 더 열심히 먹었어야 했다. 다른 음식은 없어져도 라면은 변함없는 맛을 내며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항상 그 자리에 있기는 했지만, 맛이 변했다.


내가 좋아하는 국물 라면은 매우면서도 화학조미료 특유 불량하게 알싸한 맛이 매력적인 제품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감칠맛이 떨어지더니 불량스러운 맛도 아니고 건강한 맛도 아닌 어중간한 국물로 변했다. 국물라면의 맛이 변한 것도 탐탁잖지만, 제일 아쉬운 것은 짜장라면이다. 내가 좋아했던 짜장라면은 그 특유의 매력 덕분에 짜장면과 견주어도 결코 밀리지 않았었는데, 풍미가 예전만 못하고 밍밍해졌다. 예전에는 휘뚜루마뚜루 조리해도 그렇게 맛있더니 이제는 조리법을 숙지해서 과학 실험하듯이 정성을 들여도 그 맛이 나지를 않는다. 감칠맛은 당연히 떨어졌다. 개인적으로 감칠맛이 떨어지는 것은 거의 모든 라면의 추세인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항간에 떠도는 대로 MSG를 더 이상 첨가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예전에 그 감칠맛 풍부하고 지금의 라면보다 훨씬 더 불량스러운 맛이 났던 라면. 지금은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으니 그리울 뿐이다. 



5.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한 번이라도 더 먹었어야 했다. 이 맛있는 음식을 언젠가는 못 먹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치열하게 먹었어야 했다. 귀찮다고 대충 때운 한 끼 한 끼 들이 후회스럽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항상 내 곁에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버렸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바나나가 설마 멸종하겠어?'라는 안일한 생각부터 버려야겠다. 일단 바나나부터 부지런히 먹어야지. 





+후회 그 후...

지금은 불닭볶음면을 열심히 먹고 있다. 인체에 해롭다는 증거도 없는 MSG가 건강의 적인 것처럼 누명을 쓰고 라면계에서 퇴출된 것처럼, 불닭볶음면에 들어간 캡사이신도 언제 또 누명을 쓰게 될지 모른다. 게다가 내 위장이 언제까지 불닭볶음면을 버텨줄지도 미지수이니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불닭볶음면을 부지런히 먹어야 한다. 오랜만에 영란거리에 있는 떡볶이집도 가야겠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 자리에 있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음식점이야말로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수인 <아침햇살>을 주문했다. 아침햇살은 대체제도 전혀 없는 음료수인데 너무 안일했다. 같은 후회를 하지 않도록 치열하게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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