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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로chaaro Jul 08. 2019

갑님의 스타일에 관하여서

직장 안의 내로남불(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1. 나는 한껏 화가 나 있었다.

나는 디자인 업체가 만들어온 브로슈어 시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번에는 왠지 구리게(!) 만들어 올 것 같은 강한 촉이 오더라니. 불안한 마음에 평소보다 신경 써서 작성했던 작업지시서도, 잘 부탁드린다는 거듭된 읍소도 소용이 없었나 보다. 디자인은..... 구렸다. 구렸다는 말이 가장 적당했다. 좀 더 고상한 언어로 바꿔 표현하고 싶었지만, 이보다 적당한 말이 없었다. 조금 건방지게 말하자면 내가 만들어도 이것보단 잘하겠다 싶었다.


2. 이 디자인은 적잖이 구리니 수정해 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교양 있는 사회인으로서 그럴 수는 없으니, 정중하게 수정을 요청했다. 그리고 수정본을 받았을 때, 나는 처음보다 더 화가 났다. (여담이지만, 회사에 다닌 이후로 몸속에 ‘화’가 정말 많아졌다) 아무튼. 업체가 “수정본이랍시고”(여담이지만 회사에 다닌 이후로 매사 빈정대게 되었다) 가져온 것을 보니 더 화가 났다. 장담컨대 수정하는 데에 절대 5분 이상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3. 나는 결국 일러스트레이터를 켰다.

그리고는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수정하기 시작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꼼꼼하게 수정했다. 이 정도면 (내 기준에) 구리지 않다고, 꽤 봐줄 만한 퀄리티의 브로슈어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밤 12시가 꼬박 지나 있었다.



4. 그리고 다음 날.

나는 회사의 동료들에게 저 호랑말코 같은 업체가 브로슈어를 구리게 만들어와서, 내가 새벽까지 고생을 했노라고 한탄을 하였다. 수정을 요청했더니만, 복사하기 붙여 넣기로 그림 다섯 점을 갈아 끼우고, 배경색 하나 달랑 바꿔 왔다는 뒷말도 잊지 않았다.


5. 그런데 말입니다.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업체가 처음 만들어준 시안도
괜찮은데요?




6. 나는 순간 머리가 멍..... 해졌다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망치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랄까.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 회사생활 짬밥을 최대한 발휘하여 애매한 웃음으로 간신히 썩은 표정을 덮다. 그래도 충격은 가시질 않았다. 저런 구린 디자인이랑 나의 "울트라 엘레강스 럭셔리한" 디자인이랑 차이가 없다니. 업체 시안보다 내가 수정한 시안이 더 고오급스럽고 예쁘다는 것은 “취향”이 아니라 “팩트”라고 생각했었는데!




7. 그때 문득,

그동안 내가 “을”로서 강요당해왔던 “갑님의 스타일” 알아맞히기 스무고개(!)가 생각이 났다. “갑”님들은 본인의 스타일이 “정답”이라고 생한다. 자동적으로 “을”의 스타일은 “오답”, 즉 틀린 답이 된다. 즉, “갑님의 스타일”이 노란색이라면 빨강, 파랑, 회색 등등은 전부 “틀려먹은” 것이 된다. 나의 경우에는 (같은 의미라도) 갑님이 즐겨 쓰는 단어와 표현을 알아맞히느라고 수정의 수정을 거듭하곤 했었다. 속으로는 갑님의 센스없음 이라든가, 촌스러움 등을 욕하면서 말이다.


8. 결정타는 팀장님이 날렸다.



차아로씨, 그 브로슈어 색깔이 좀 그렇다.  
왜 그런 색을 쓴 거야?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 디자인은 “고오급스럽고 예쁜”것이 아니라 “그냥 내 스타일”이구나. 업체 디자인은 “구린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이었구나.


그동안 나는 “을”로서 “갑님의 스타일”에 맞추고자 수정의 수정의 수정의 수정.....x100을 거듭하였다. 그런데  아주 잠시 “갑” 이 되었다고 “갑님(=나)의 스타일”을 강요한 셈이다. 인간이 이렇다. 입장 바꿔 생각하는 게 이렇게 어렵다.



그리고 갑은 자기가 하는 일이 갑질인 줄 모른다.



현재 “을”인 나에게 “갑”인 팀장님이 재차 물었다.


차아로씨? 대체 왜 이런 색을 썼냐고!





갑님(팀장님의 스타일)을 모르는 미천한 나는 국제적인 기업을 팔아 이렇게 변명했다.


팬톤에서 지정한 올해의 색깔이 “리빙 코랄” 이랍니다.
그래서 리빙 코랄을 써 봤습니다.




9.  그날의 깨달음

보고를 마치고, 리빙 코랄이 정말 이런 색이냐고 의심하는 팀장님 방을 나왔다. 나는 그날  깨달음을 얻는 느낌이었다. 갑님의 스타일을 강요당한 디자인 업체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그리고 까딱 잘못하다가는 나도 갑질 하는 인간이 될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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