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
산등성에 위치한 토스카나 산장을 뒤로하고 아침 일찍 빨간 지붕의 도시, 피렌체로 출발했다.
6박 8일 만에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를 모두 섭렵하고 돌아가야 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맞춰진 여행상품은 매일같이 꼭두새벽에 출발한다. 6월 초부터 이어진 빡빡한 일정에다 방학과 동시에 시작된 엄빠와의 여행은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눈이 찝찝한 듯하다가 좀 쉬면 괜찮다가를 반복하더니 여행 시작 며칠 전부터 다래끼가 슬슬 올라왔다. 엄마한테 부탁해서 한국에서 가져온 약을 다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래끼는 커지고 있었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찍은 가족사진 속에 나는 예쁜 빨간 지붕들을 배경으로 하고 한쪽 눈두덩이 부어올라 빙구같다.
아르노강 뒤로 펼쳐진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붉은 지붕의 연속이다. 그 가운데 돔모양의 가장 큰 지붕이 바로 피렌체 대성당이다. 강 왼편으로는 다리가 하나 보이는데 그 외관이 특이하다. 다리 위에 지어진 저 집모양이 장식인지 궁금해하고 있을 때, 가이드님이 저기 좀 보세요 하며 설명을 한다. 베키오 다리는 다리 위에 상점이 있어서 저렇게 밖에서 보면 다리 위에 건물이 지어진 모습이라고. 실제 저 집 모양은 상점들이 영업하는 가게란다.
우리는 구시가지 좁다란 길을 한 줄로 피렌체 대성당을 향해 걸어갔다. 성당은 멀리서 봤을 때는 돔모양의 붉은 지붕이 눈에 띄었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색색의 대리석으로 외관이 상당히 화려했다. 붉은 돔 지붕과 화려한 벽면 대리석 장식은 어딘가 묘하게 조화롭지 않았다. 여러 성당들이 그러하겠지만 이곳도 건축가가 몇이나 바뀌고 공사가 여러 번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렌체에선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큰 성당이고 가까이서 보면 햇볕에 대리석이 타일처럼 반짝인다.
가이드가 성당 앞에서 사진이 가장 잘 나오는 포즈라며 우리 다섯을 줄을 세우고 성당을 바라보게 했다. 인스타 감성의 포즈가 우리 삼대에게 어울릴 리가 없지만 착한 모범생처럼 사진을 찍었다. 성당 앞에서 잠깐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성당에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니 아마 시간 안에 관람할 수 없을 것이다.
눈에 난 다래끼로 괴로웠던 나는 아이들이랑 자유시간에 쉬기로 했다. 유럽여행 중에 성당은 매우 중요한 관광지지만 우리 아이들은 이미 성당과 미술관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하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우리는 앉아서 젤라또나 한번 더 먹기로 했다.
하지만 독실한 천주교신자인 엄마는 아빠를 이끌고 어느 문으로든 잠깐 들어갔다 나오겠다며 성당으로 갔다. 유럽의 대부분이 처음인 엄마는 성당만 보면 열정적이었다. 엄마의 이번 여행 테마는 유럽 성당 순례인 것이다.
매번 성당을 마주할 때마다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반짝이는 눈으로 가이드님께 질문을 던졌다. 저 모은 손은 지금 기도 중인가 싶게 신실하고, 고개는 살짝 기울어져 있다. 엄마를 바라보던 찰나 성모마리아상과 고개 각도와 흡사 일치해 혼자 속으로 웃은 적도 있다. 사진은 어찌나 여러 장을 찍으시는지. 사진을 찍은 후엔 항상 눈을 가늘게 뜨고 카톡을 열어 찍은 사진들을 어딘가에 공유한다. 아마 성당 형님들 단톡방에 올리는 듯.
하지만 엄마는 너무 신자의 입장에서 접근한 나머지 항상 가이드가 모를만한 질문을 했다. 가이드가 모른다며 죄송하다고 한번 알아보겠다고 하면 공손하게 감사합니다라고 하고 알게 되면 꼭 알려달라고 했다. 물론 가이드가 설명해 준 성당 관련 이야기들은 이미 핸드폰에 열심히 필기 중이다.
엄마의 성당사랑은 이후에도 이어지는데 아무리 작은 성당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았다. 심지어는 고흐가 살던 마을에 있던 시골 성당에서도 엄마는 진지했다.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성당이 바로 여기구나. 너무 해가 뜨거우니 성당에나 들어가자라고 생각하는 우리와 달랐다.
엄마는 사뿐한 발걸음으로 조심스럽게 성당에 들어섰고,
항상 유심히 성당 안을 한 바퀴 돌아봤고,
자리에 앉아 그윽한 눈빛으로 성당에 계신 예수상과 성모상을 바라봤으며
마지막엔 눈을 감고 기도했다.
어색했다. 대학생 시절, 예전의 나는 방학하면 으래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방학 때 만나는 엄마는 한 학기 동안 딸을 기다리며 그사이 들었거나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한 보따리 모아뒀다가 풀어놓는다. 그리웠던 엄마밥을 한 그릇 먹고 나면 엄마는 옆에 앉아서 사과를 깎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느긋하게 이야기를 듣다가 웃긴 부분에서 둘이서 똑같은 웃음소리로 깔깔거리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 정말 우리 엄마 진짜 웃겨. 그렇게 내가 속상한 일이라도 있을라치면 그 까짓쯤은 모두 웃기는 농담으로 승화시켜 버려서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 난다는 말을 걱정시키게 만드는 사람이었는데.
'엄마 왜 이렇게 진지해... 성지순례 온 거냐고,,ㅎ'
"피렌체 즐거우셨나요. 이제 저희는 밀라노로 갑니다. 일정 중에 가장 버스를 오래 타시는 구간이고요. 4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정표에 적혀있는 거 다들 보셨죠? 밀라노는 잠깐 들르는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주 간단하게' '신속하게' 여행사에서 이렇게 적어둘 정도면 얼마나 잠깐일지 다들 예상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자, 그럼 가는 동안 지루하실 거 같아서 저희가 첫날 갔던 로마 다들 기억나시죠? 로마의 휴일 영화 틀어드릴 테니 보실 분들 보시고 쉬시고 싶으신 분들은 또 편하게 쉬시면서 가실께요. 그럼 출발해 보겠습니다."
과연 가이드님 말대로 밀라노는 스쳐 지나갔다. 밀라노 대성당 근처에서 007 작전하듯 버스에서 우르르 바로 밀라노 대성당으로 걸어갔다. 짧게 주어진 시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해 질 무렵 하루를 끝내고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때문이었을까. 어스름한 저녁, 낮동안 뜨거웠던 해는 졌지만 훈훈한 열기는 가득 남은 광장에 들어서 바라본 밀라노 대성당 정면은 압도적이었다. 뽀얀 상아색에 하늘을 향해 길쭉하게 올라선 뾰족한 첨탑들이 위용을 뽐내며 있었다. 나도 모르게 연신 성당의 모습을 담으려고 사진을 찍었다. 빨리 가족 모두 세워놓고 사진을 찍고 싶은데 엄마는 또 성당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두 손을 모으고 뒤를 돌아볼 생각이 없다. 들어갈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게 못내 아쉬워 보였다.
아. 갑자기 머릿속에 퍼뜩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언젠가 엄마네 안방에 걸려있던 달력. 성당에서 제작해서 매년 나눠주는 벽에 거는 큰 달력.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고 삐쭉삐쭉한 밀라노 대성당의 사진이 생각났다. 우리 엄마 감동했구나. 그때 그 달력에 나온 곳에 내가 서 있다니라며. 감격에 빠진 엄마는 두고 아이들과 아빠를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어줬다.
지금도 사진첩을 열어 넘기다 밀라노 대성당이 나오면 감탄사가 나온다. 삼십 분 머문 거 치고는 사진 하나 찍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135개나 되는 첨탑 때문일까. 웅장한 밀라노 대성당은 그렇게 강렬한 인상과 찰나의 만남을 남겼다.
그렇게 대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고 성당 오른쪽에 위치한 대형 유리지붕이 멋진 쇼핑센터로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관광버스에 다시 올라탔다. 엄마가 사랑하는 성당들. 우리 엄마의 유럽 성당 투어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