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엄마 말 좀 듣지.
오늘도 새벽부터 몸을 일으켜 풀지도 못한 짐을 다시 챙겨 버스에 올랐다. 밀라노에서 인터라켄까지 버스로 4시간 이동이다. 이탈리아 코모를 지나 스위스로 넘어가니 신기하게도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가 스위스를 떠올리면 기대하는 엽서나 달력의 푸른 초원에 작은 집들이 차창밖에 보인다.
산을 지나고 호수, 호수를 지나고 마을, 마을지나 또 호수, 만년설이 녹은 호수여서 그런가. 초록빛이 도는 맑고 고요한 호수를 배경으로 들려오는 파바로티의 타임 투 세이 굿바이는 내가 지금 앉아있는 곳이 우등고속버스임을 잊게 만든다. 긴 시간 버스 여행에 지루할 여행객들을 위한 가이드님의 세심한 플레이리스트.
인터라켄에 가까워질수록 산세는 높아지고 깎아지른 듯 급격하게 높아지는 산 사이에 짧은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던 물줄기가 경사를 따라 내려오지 못하고 폭포처럼 산골짜기 사이에서 떨어진다.
드디어 인터라켄이다. 그런데 숙박시설이 위치한 아래의 풍경이 어디서 본듯하다. 강원도 콘도 단지 같은데. 그래, 강원도가 한국의 인터라켄이지~
점심 식사로 준비된 퐁듀를 먹으며 엄마가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
"니는 그래서 고산병약 안 먹을 거가?"
"안 먹어도 된다."
"그래? 그럼 우리 손녀도 안 먹을 건가?"
"할머니, 나도 안 먹어도 돼. 약 먹기 싫어."
엄마는 한국에서 여행준비를 철저히 해왔다. 부탁한 다래끼약부터 고산병약까지. 약국에서 여행에 필요한 약을 단단히 챙겨 오신 것이다. 누가 조금만 소화가 안 된다고 하면 여기 내가 챙겨 온 한방 소화제인데 효과가 좋으니 먹어보라 했고 아침에는 항상 우리에게 고함량 비타민을 건넸다. 혹여나 누가 아플세라 엄마는 어디서 끙 소리만 나도 종류별로 약이 든 비닐백을 내어 놓았다.
그런 엄마가 여행 초반 다래끼 약을 줄 때부터 이야기했다.
"이건 고산병 약인데, 우리 스위스 가서 높은데 올라가면 먹어야 된다더라."
"아이 우리 괜찮아~"
"할머니, 우리 오스트리아에서도 높은데 올라갔는데 다 괜찮았어~"
우리 셋은 한사코 할머니의 권유를 거부했다.
젊은 우리는 고산병 따위는 무섭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걱정되면 드세요~
우리는 멀미약도 먹지 않는다구요~
인터라켄 탑승 전 엄마와 아빠는 고산병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면서 다시 한번 권했다.
"너네도 먹어라."
"아,, 엄마 그만 좀 먹으라고 해. 우리 안 먹어도 된다고. 몇 번을 말하는 거야."
엄마의 끊임없는 권유에 결국엔 짜증을 내고 말았다.
다 자식 생각하는 마음인데... 하지만 엄마, 나도 이제 40이야. 나는 내가 알아서 할게.
인터라켄에서 기차를 타고 가다가 융프라우 철도로 환승한 후 드디어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했다. 기차를 타고 오르는 내내 보는 풍경은 웅장했다. 깊은 골짜기는 우리가 얼마나 높이 올라가고 있는지 알려주었고 간간히 기차 밖으로 보이는 집들엔 저기 사는 사람은 어떻게 여기 살게 되었을까. 눈이라도 오면 꼼짝 못 하겠구나.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챙겨 온 경량패딩을 꺼내 입고 밖으로 나갔다. 구름이 껴서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융프라우 사진을 찍는 건 불가능했지만 우리는 융프라우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엄마 아빠는 내가 유럽에 오기 전부터 스위스 여행을 꼭 가보고 싶어 하셨다. 작년에 친구들과 가려고 계획하셨던 스위스를 올해 딸네랑 가겠다고 계획을 바꾸셨고 드디어 스위스에 온 거다. 엄빠의 위시리스트를 달성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사진에 엄빠는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내가 한건 없지만 엄빠가 가고 싶은 곳에 결국 함께 왔다는 것이 뿌듯했다. 괜스레 고산병약 안 먹겠다고 짜증 낸 게 미안했다.
가이드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너무 빨리 걸어 다니시지도 마시고 찬찬히 둘러보시고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이 있으면 저한테 바로 이야기해 주세요. 부모님을 모시고 온 가족이나 어르신들이 친구들과 함께 여행 오신 팀이 많아서 그러겠거니 했다. 우리는 이곳저곳 다니며 융프라우 360도 뷰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둘째가 내 손을 잡아끈다.
"엄마 나 어지러워."
옆을 보니 둘째가 입술이 하얗고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아 고산병이구나.'
얼른 자리를 찾아 앉히려고 돌아봤지만 의자에 사람들이 다 차서 자리가 없었다.
그냥 바닥에 일단 앉자라고 하고 애를 지켜봤다.
그런데 조금 뒤 나도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살짝 어지럽고 머리가 점점 아파왔다.
그렇게 우리 둘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참을 앉아 있어야 했다.
그렇게 약을 먹으라고 권해도 괜찮다며 말 안 듣던 나는 청개구리가 된 느낌이었다.
엄마 아빠는 우리 둘을 두고 유럽의 지붕을 꼼꼼히 구경하셨다. 두 분의 멀쩡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머쓱했다. 고산병은 신기하게도 다시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점점 나아지더니 인터라켄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정신이 차려지자 엄마가 옆에와서 엄마말 안 듣고 버티더니 꼴좋다라고 할것만 같았다.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놀랐을 손녀걱정에 손녀 손을 다정히 잡고 위로해주고 있었다. 나는 미안하단 말도 못 하겠고 그렇다고 엄마 말 들을걸이란 소리도 못하겠고 모른 척 기차에 앉아서 창밖 사진만 연신 찍어댔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이거 남은 고산병 약인데 네가 가져가서 써라."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약을 받아 들었다.
"알겠어. 고마워."
그러니까 엄마 말 좀 듣지 하여튼 더럽게 말 안 들어요. 까불다가 결국 아팠잖아.라고 할 법한데
엄마는 그저 고산병 약을 나에게 넘겨주는 걸로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하셨다.
엄마가 한마디 했으면 나는 오히려 툴툴거리며
내가 그럴 줄 알았냐고 오스트리아에선 괜찮았다고. 엄마는 꼭 그러더라.라고 했을 텐데
손자 손녀 앞에서 자식의 위신을 살려주신 건지
아니면 머라고 하면 오히려 바득바득 툴툴거릴 딸을 아신건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엄마 앞에서
난 더 작아졌다.
마치 사춘기 딸이 죽어라 엄마 말 안 듣고
굳이 지맘대로 하다가
일이 잘 못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그래 그거 봐라 엄마 말 듣지 그랬니라며
내민 엄마 손을 잡고 도움을 받으면서도
자존심에 잘못했다 말도 못 하는.
40이 넘어도 이모양이라니.
내 자식을 키우면서도 이모양이라니.
아직도 사춘기냐고.
누가 융프라우에 간다고 하면 일러줘야지.
부모님이 고산병 약을 챙겨 오신다면 꼭 받아먹어라.
약 먹은 사람은 멀쩡하고 안 먹은 사람은 어지럽고 머리가 아플 수 있다.
만약에 아프면 그때부턴 거기가 융프라우 던 어디던 뭘 볼 수가 없다고.
지금도 집 약통을 열면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고산병 약이 눈에 들어온다.
그 고산병 약을 볼 때면 다짐한다. 청개구리가 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