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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타누키 차차 Mar 29. 2018

엉덩이부터 내미는 사람들

뭐 그렇게 다를 게 있을까요 우리 인생?


 문이 열리기 전에 결정해야 한다. 오른쪽으로 탈 것인지 왼쪽으로 탈 것인지. 매일 반복되는 출근 그리고 또 퇴근길. 지하철 플랫폼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돈다. 열차를 간발의 차로 놓쳐다 해도 나쁘지만은 않다. 어차피 나는 맨 앞 줄. 출근 시간이 타이트해진 대신, 앉아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오른쪽을 선택한 불행한 아침엔 튼튼한 두 다리로 지옥철을 견뎌내야 하는 사람이 되고, 왼쪽을 선택한 운 좋은 저녁엔 편안히 앉아서 지옥철을 방관하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일정한 규칙 없이 찾아오는 불운과 행운. 내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대중교통의 빈자리였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던 햇병아리 시절, 나는 빈자리에 대한 집착이 생겼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처음 겪는 직장생활이었지만 그런대로 잘 적응하며 다니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건 내 머리의 판단, 몸은 아니었나 보다. 인턴 6개월 차부터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이따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식은땀이 등 뒤에서부터 송골송골 맺히면서 얼굴이 서서히 창백해지는 게 하나하나 느껴졌다. 누가 내 주위의 공기만 진공청소기로 다 빨아들인 마냥 숨쉬기가 벅찼고 마지막엔 구토까지 올라왔다. 어안이 벙벙해서 '이게 뭐지, 내 몸속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어리둥절해하고만 있었다. 지금에나 공황장애나 불안장애 같은 정신적 질환이 많이 알려졌지 그때는 이런 단어조차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별거 아니겠지, 잠깐 멀미 같은 건가 싶어 애써 참아내며 간신히 회사가 있는 역까지 도착했다. 회사엔 늦으면 안 되니까. 참 무지하고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등 뒤에 좀비라도 쫓아오는 사람처럼 채 정차하지도 않은 열차 문을 두들기며 발버둥 쳤다. 한 시라도 빨리 그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제일 먼저 하차해 눈에 보이는 쓰레기통으로 직진, 입안 가득 머금고 있던 구토를 한 아름 뱉어냈다. 그리곤 걸을 힘도 없어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해 계단 뒤에 있는 세모꼴의 빈 공간에 최대한 몸을 숨겼다. '아~이제 좀 살 거 같다' 왜 노숙자들이 이런 곳을 고르는지 단번에 이해되었다.



 하필 우리 회사가 있는 역은 고속터미널, 마침 시각은 막바지 출근 타임. 수많은 인파가 장난감처럼 우르르 내렸다가 또 우르르 올라가길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덤덤한 무표정과 재촉하는 발걸음 사이에 토하고 주저 않은 여자. 먹고살기 바쁜 우리네 하루엔 그런 여자를 신경 쓸 여유란 없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술 취한 취객 정도의 풍경이었으리라. 구석에 자리 잡은 탓인지 CCTV에도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 생애 그리 애타게 역무원을 기다려본 적이 없다. 나는 그렇게 방치되어 있다가 조금씩 돌아오는 정신을 붙들어 잡고 절뚝거리며 출근을 했다. 이미 한 시간이나 늦어버린 출근을.


 불운과 행운처럼, 이 증상에도 일정한 규칙이 없었다. 차라리 매일같이 발생하면 병원이라도 가볼 텐데, 그런 게 아니라서 수많은 인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내 몸을 방치했다.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먹고살기 바쁜 한낱 직장인일 뿐이었다.


 그래도 몇 가지 나름의 대응책이 생겼다. 하나, 증상이 일어남과 동시에 바로 열차에서 내릴 것. 어디든 사람 없는 곳에서 한동안 앉아 크게 호흡을 하면 증상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빨리 대처하면 대처할수록 회복 속도도 빨라졌다. 짧게는 20분, 길게는 1시간 정도 걸렸다. 둘, 무조건 빈자리를 사수할 것. 앉아서 가는 날에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 번은 서서 가다 증상이 발생해 힘들어하는 나를 알아챈 고마운 어르신 한 분이 자리를 양보해주셨다. 머리를 뒤로 기댄 채 앉아 천천히 호흡을 해나가니 구토까지 가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평생 멈추지 않고 내달릴 것 같은 출퇴근 길의 지옥철, 같은 돈을 내고 누구는 서서 가고 누구는 앉아서 가고, 가뜩이나 괜히 부당한 기분이었는데 이런 이상한, 알 수 없는 증상과도 싸워야 했다. 노약 좌석에 앉은 할머니한테라도 양보해달라 말하고픈 심정이라니. 어느새 나에게 대중교통의 빈자리는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가 아닌 무조건, 어떻게든 쟁취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편히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고 싶어서. 빈자리가 보이면 엉덩이부터 내미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3년 정도, 그 고생을 한 뒤에야 증상은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어느덧 사회생활에 적응한 모양이었다. 허나 끝나지 않은 게 있었다. 바로 빈자리에 대한 나의 과도한 집착. 내 나름의 명분과 이유가 있어 해왔던 일이 그대로 습관이 돼버린 것이다. 명분과 이유가 사라져도 반복했던 행위는 관성처럼 남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엔 분명 살아남기 위함이었는데 이제는 그냥 편하니까, 그 편한 맛을 아니까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봄이 막 시작하려는 겨울의 끝자락, 나는 파란 청바지를 입고 플랫폼에 서 있었다. 늘 그래 왔듯 문이 열리기 전에 빠르게 열차 안의 상황을 살폈다. 오른쪽 중간에 하나 남은 빈자리.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앞뒤 살피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습관처럼 엉덩이부터 쭈욱 들이밀었는데 아뿔싸, 이미 어떤 아주머니 착석 완료. 내 엉덩이보다 빨랐던 다른 엉덩이가 있었다. 먼저 자리 잡은 아주머니의 얼굴과 한 발 늦은 내 엉덩이가 흥겹게 정면충돌을 하고야 말았다. 그것도 때맞춰 출발하는 열차의 흔들림 때문에 한 번이 아니라 쿵쿵쿵 두어 번. 내 엉덩이는 연신 아주머니의 얼굴을 찍어댔다. 월미도도 아닌데 디스코처럼 팡팡팡.


 불쾌함으로 가득 찬 그녀의 얼굴은 시뻘게져서 오만상이 되었고, 나는 창피함이 홍수처럼 몰려와 시퍼레진 얼굴로 그냥 진상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몇 번을 꾸벅거렸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내 엉덩이도 아주머니의 눈, 코, 입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터였다. 아침 시간대라 사람이 많기도 많았고, 하나같이 젊은 학생이나 내 또래의 직장인들이라 더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열차는 사람들로 꽉 차 있어 딱히 비집고 다른 칸으로 옮길 수도 없었다. 그저 사건 발생 지점에서 얼마 못 벗어난 자리에 서서 밀려오는 수치심을 두 눈 질끈 감고 외면하는 수밖에. 정말이지 이왕 시퍼레진 얼굴,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입고 나온 청바지가 되고 싶었다.


 엉덩이 팡팡팡 사건은 나를 부끄러운 방관자에서 다시 꿋꿋한 참여자로 만들어주었다. 빈자리가 보여도 사람이 많으면, 누군가 앉겠지 체념하고 서서 가는 것을 선택했다. 이상한 질병으로 시작되고 찬란한 사건으로 끝나버린 빈자리 집착증이었다.


 '이놈의 엉덩이 따위 다신 어디 내미나 봐라' 묵묵히 서서 가기를 실천하는 날들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라? 이것 봐라? 좀 의외였다. 생각보다 자리가 금방 비는 게 아닌가. 항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종종, 바로 앞사람이 비워준 따끈따끈한 내 몫의 자리들이 생겨났다. '뭐야 조금만 기다리면 됐잖아? 다들 이 역에서 많이 내리네.' 중간중간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구간들이 있었다. 헛헛한 웃음이 났다.     


뭐 그리 욕심냈을까. 뭐 그리 악착같았을까.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내 자리도 아니었으면서.


 살다 보면 참, 엉덩이부터 내밀고픈 순간들을 많이 마주하게 된다. 학생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사회에서 내 힘으로 버티고 또 살아가게 되면서부터 지옥철의 빈자리 같은 유혹들이 나를 흔들어 댄다. 조금은 편히 가고 싶어서, 남 잘 되는 꼴은  배 아프니까, 일말의 손해라도 보고 싶지 않아서.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인 양 착각하고 집착하고 또 집착하는 일들. 부질없는 욕심으로 끝나버릴 일들. 그런 일들은 나중에라도 깨닫고 나면 수치심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마치 남의 얼굴을 내 엉덩이로 찍어내는 것처럼.  


 내 것 아닌 거에 집착 말고 너무 편한 길만 가려 애쓰지도 말고 이 두 다리로 꿋꿋이 내 갈 길 가야겠다 싶었다. 아프다는 핑계로 힘들다는 핑계로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육체의 근성과 생각의 근력을 잘 다져놓으면서. 그러다 보면 분명 지금처럼, 언젠가는 내 차례가 돌아올 테니까. 우리가 타고 있는 이 지옥철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 속에서도.            


오늘 출퇴근길에 이 글 보신 분들에게 빈자리의 행운이 함께 하길, 아니면 하체의 굳건함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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