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렇게 다를 게 있을까요 우리 인생?
일어날 시간이 아닌 데 눈이 떠졌다. 집 안의 공기가 조금 무거운 느낌이었다. 이마에 제법 땀도 맺혀있다. 얼른 전기장판을 껐다. 다시 누워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씻기로 한다. 여느 때와 같이 샤워를 하고 드라이기를 꺼내 머리를 말렸다. 위잉 소리를 내며 부는 바람이 어째 예전 같지 않았다. 머리카락뿐 아니라 차갑게 식은 몸까지 따뜻하게 데워주는 너였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답답하게 굴어댄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두피만 간신히 말리는 둥 마는 둥 하며 얼른 드라이기를 껐다. '덥다고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성큼성큼 발가벗은 몸으로 채 마르지 않아 축축한 머리끝을 탈탈 거리며 핸드폰으로 날씨를 본다. 오랜만에 꽤 놓은 두 자리 수의 온도를 본다. 17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어느새 봄이 와버렸다.
밖은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는데, 이 초라한 원룸에서부터 봄이 옴을 온몸으로 느꼈다. 대단한 기운이다. 오늘은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볼까 옷을 챙겨 입고 현관문을 나선다. 나가자마다 눈앞에서 팝콘이 열린 나무를 마주했다. '설마 이 나무 벚꽃이었던 게냐' 빌라 앞 이름 모를 나무의 정체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언덕으로 길이 난 산책로에는 벌써부터 개나리가 계란 노른자가 터져 흐른 것 마냥 흐트러져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는 없던 노랑과 분홍빛 색감들이 군데군데 칠해져 있었다. 하루아침에 이럴 수 있나 매년 당하면서도 매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사하고 처음 맞이하는 동네의 봄이 소박하지만 꽤나 근사해 마음에 들었다. 상큼한 것을 당기게 하는 풍경이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과일 가게에 들렀다. 개나리를 닮은 오렌지 한봉 다리를 샀다. 콧노래는 덤이었다. 손은 덜렁덜렁 코는 흥얼흥얼. 집으로 가는 길이 소풍 길 같았다.
오랜만에 끝까지 열어젖힌 베란다의 창문. 그 사이로 소파가 햇살을 머금는다. 믹서기에 방금 사온 오렌지를 꿀과 함께 넣었다. 갓 갈아낸 오렌지 주스로 공복을 채우며 좀 더 극적인 허기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벌러덩 소파에 누워 하는 일없이 휴대폰으로 실시간 검색어를 뒤적였다. 맨 위에 자리 잡은 특이한 이름의 여인. 미스 월드 비키니 우승자라나 뭐라나. 요새 핫한 셀럽이라나 뭐라나. 까무잡잡한 구릿빛 피부에 포카혼타스를 닮은 그녀의 비키니 사진이 우르르 떠올랐다. '와! 와! 이야' 나는 요염한 포즈로 절도 있게 커팅된 비키니를 입고 있는 그녀의 사진들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내가 남자라면 아니, 여자여도 그녀만 괜찮다면 한 번쯤 사귀어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기주장 강한 가슴과 엉덩이, 겸손하게 들어간 허리. 여자인 내가 이 정도인데 남자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검색창에 비키니를 쳐보았다. 휘황찬란한 형광색과 알록달록 귀여운 천 조각들 사이에서 마음에 드는 몇 세트를 골라 장바구니에 담았다. '지금부터 운동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바싹 맘먹은 4월과 탄력받은 5월을 지나 꾸준히인 6월을 보내고 나면 올여름에는 기어코 성공할 수 있으리라. 허황된 꿈을 꿔본다. 비수기부터 준비한 말도 안 되게 매끈하고 탄탄한 나의 바디에 찜해 놓았던 비키니가 걸쳐진다. 탄산수처럼 튀어 오르는 새하얀 바다, 이름 모를 그곳에서 손바닥만 한 비키니를 입고 해변을 거닐어도 본다. 낮에는 해변의 여인이었다가 밤에는 만인의 여인이 되는 상상. 기분이 개나리처럼 노래지고 벚꽃처럼 하늘거렸다.
어쩌면 범인은 봄일지 모른다. 포카혼타스의 그녀가 아니라. 여름이라면 당장 비키니를 입거나 포기해야겠지만 봄이기에 아직은 비키니를 꿈꿀 수 있었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운동 한 번 시작하면 난리 난다. 비키니 따위 못 입는 게 아니야, 안 입는 거였지.' 이상한 용기가 하루아침에 피어난 봄꽃들 마냥 근거 없이 솟아오른다. 짠 물이 몸에 닿는 것이 싫어 바다보다 산을 좋아하고, 우리 집 4층 계단을 오르는 것도 숨이 찰 정도로 운동부족인 나인데도 어째서인지 이번 여름에는 비키니를 입고 바다 한가운데를 헤엄치고 있을 것 같았다. 봄의 생명력이 마음에도 꿈틀 거린 게 틀림없었다.
봄날의 비키니라니. 꽤나 낭만적인걸, 생각했다. 하나는 봄에 태어난 단어고 하나는 여름에 태어난 단어였다. 하나는 우리의 말이고 하나는 바다 건너의 말이다. 전혀 만날 일 없던 단어, 결코 어울릴지 않을 것 같은 단어들이 한 문장으로 이어지자 나는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 이런 게 요즘 내가 꿈꾸는 삶이었다.
퇴사를 하고 나서 부쩍 삶에 대한 고민이 짙어진 찰나였다. 이상과 현실을, 예술과 상업을, 일과 놀이를, 생존과 죽음을, 결코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반대의 단어들을 나란히 나열할 수 있는 삶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이렇게 봄이 불어온 것이다. 열 평 남짓의 원룸, 그리고 그보다 더 작은 내 마음속에. 거대하고 추상적이고 모순덩어리의 고민들이 봄날에 꿈꾸는 비키니처럼 단순해졌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오늘이었다.
매일매일이 봄날 일수는 없겠지만 매일매일 봄과 같은 마음이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겨울과 타협하지 않고 새 생명들을 꽃피우고자 하는 그 마음으로, 여름에 맞서지 아니하고 다시 기다릴 줄 아는 그 마음으로, 그렇게 봄과 같이 살아간다면 내게도 나만의 색감을 흩뿌릴 날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모두가 이런 마음이기에 다들 봄이라는 계절에 설레고 웃음을 피우고 뭐라도 시작해보려는 것이었구나 깨닫는다.
하긴, 이런 날씨에 이런 마음이 어디 나 하나뿐이겠는가. 봄날만큼은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 된다. 그렇기에 봄날이 점점 짧아져 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슬픔이 되기도 한다. 분명 봄인데 겨울처럼 쌀쌀해진 어느 날, 분명 봄인데 여름처럼 뜨거워진 어느 날, 그런 날은 마치 봄이 겨울과 타협하고 여름에 맞서려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진다. 세상이 봄을 닮으면 좋겠다 바랐는데 봄이 각박한 세상을 닮아가는 것 같아 안쓰럽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유독 꽃들이 순서 없이 피어난 것 같다. 벚꽃과 개나리가 동시에 피다니... 한꺼번에 짜잔 하고 나타나 생각 없이 반가워만 하고 있었는데 이 또한 빨리빨리를 외치는 세상 탓 인듯싶어 미안해졌다. '조금은 천천히 살아가도 좋으련만...'
나는 너무 오랫동안 말려있어 동그랗게 굳어 버린 요가 매트를 살살 달래 가며 펴냈다. 그 위에서 화석처럼 굳어버린 팔과 다리를 조금씩 움직이며 찬찬히 숨을 골랐다. 천천히 시작하자, 천천히. 욕심부리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잠들어 있던 근육들이 기지개를 켜는 듯 개운해졌다. 고개를 젖히자 창문 너머의 햇살이 따뜻하게 얼굴에 내려앉았다.
그래서였나 보다. 봄이 자꾸만 찾아오는 건. 이룰 수 없던 것들을 조금씩 천천히 이뤄보라고. 근육들이 새싹처럼 꿈틀거렸고 나는 그것을 하나하나 느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