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렇게 다를 게 있을까요 우리 인생?
연인 사이에만 이별이 필요한 건 아니야 의 뒷이야기입니다.
일주일이 순식간에 흘러 C양을 만나기로 한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왕십리역 12시. 거리가 멀지는 않으나 시간대가 걸렸다. 12시까지 가려면 최소 11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낮밤이 바뀐 나에겐 꼭두새벽이나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일찍 일어나기 싫어 이리 중대한 약속을 무르고 싶은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결전의 날. 햇빛이 정중앙에 떠 있는 시간에 밖을 나섰다. 아주 오랜만에. 완연한 봄이구나 싶어 괜히 기분이 들뜨고 생글생글 웃음이 번졌다. 뭐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친구 사이이기는 하나 분명 이별을 고하러 가는 길이었다. 묵직하게 숨통을 조여오던 그녀에 대한 수년간의 고민들이 바스락거리는 햇살 아래 나약하게 증발했다. 10년 간의 고민보다 당장 오늘 날씨에 좌지우지되는 존재라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몸서리를 치다 보니 어느새 약속 장소였다.
먼저 와 있던 그녀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별 고민 없이 눈앞에 보이는 타이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메뉴 역시 고민 없이 점심 세트 A를 시켰다. 종업원이 다가와 팟타이에 들어갈 야채를 손수 골라 달라길래 알아서 해달라 했다. 내가 얘랑 여기 뭐 맛집 탐방하러 온 것도 아니고 오늘 보고 다시는 안 볼 사이가 될 확률이 현저히 높은 이 와중에 음식에 들어갈 야채를 고른다는 게 웬 말인가. 종업원이 이것저것 물어볼 때마다 나는 앵무새처럼 대답했다.
"알아서 해주세요 알아서."
사람과의 관계도 ‘알아서 해주세요 알아서’ 주문이 가능하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음식을 기다리는 중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몇 차례 전화가 왔다. 그녀는 자꾸 괜찮다고 오빠한테 그런 거 안 해줘도 된다고, 어떻게 매번 생일을 그렇게 챙기냐며 다소 신경질적인 투로 전화를 끊었다. 그 대화로 유추해보건대 그녀의 남편 생일이 머지않았고 그에 따른 계획들이 오고 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이때다. 내 생일 잊은 거에 대해 살짝 서운한 뉘앙스를 풍기면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오빠 생일인가 보네?"
"다음 주인데 엄마가 자꾸 생일 선물로 뭘 보낸다고 하잖아."
"야, 너 근데 내 생일 이번 주인 건 아냐?"
분명 당황하겠지 싶었다.
"어, 그래서 만나자고 한 건데? 오빠한테 카드 받아왔어. 너 맛있는 거 사주래더라."
이게 무슨 말인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은 오히려 내 쪽에서 하고야 말았다. 나는 괜한 민망함과 신경질이 사그라들지 않은 그녀의 말투에 기가 죽어 쭈글이가 되어서는 그랬던 거냐며 어설프게 너털웃음을 짓다가 이래가지곤 이별이고 나발이고 생일상이나 얻어먹다 가겠구나 싶어 조금 용기를 냈다. 네가 딸아이 어린이집 보내게 되어서 그냥 바람 쐬고 싶은 마음에 전화한 줄 알았다고.
"어린이집 보내기 시작한 게 언제 적인데. 3개월도 더 됐어. 결혼하고 애 키우는 데 정신없어서 너 생일도 제대로 못 챙겨주고 미안해서 보자고 했지."
그러니까 오늘의 만남은 그녀가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한 자리였던 것.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기분이었다. 아닌데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는데. 내가 생각했던 그림들은 이게 아니었는데... 페이스가 흔들리기 시작하던 와중에 하나 둘 나오는 음식들은 또 어찌나 맛나던지. 스테이크에 연어샐러드에 팟타야가 입속에서 혀를 타고 놀다가 목구멍으로 꿀떡꿀떡 알아서들 헤엄쳐갔다. 나중에 찾아보니 별생각 없이 들어간 그 레스토랑은 꽤나 유명한 맛집이었다. 그래,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데 일단 밥은 맛있게 먹고 이따 차나 한 잔 하면서 천천히 정리하면 되지 뭘. 교활하게 음식을 흡입하던 입은 기어코 뇌를 속이는데 성공했고 나는 생일잔치를 하는 어린아이 마냥 신나게 잔치상을 즐겼다.
커피는 내가 산다 하자 아니라며 생일 선물 대신이니까 오늘은 자기가 다 쏜다 하는 그녀를 한사코 말려가며 겨우겨우 커피값을 계산했다.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 하는 그녀를 보자 더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이별이 보통 어떻게 시작되었더라. 옛 남자친구들과 헤어질 때 무슨 말로 시작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밥 먹을 때와 마찬가지로 딱히 궁금하지 않은 서로의 근황들이 이어졌다. 엄마의 고단함과 백수의 한가로움이 아내의 일상과 창업자의 이상들이. 일부러 안 맞추려 노력하는 알까기처럼 극명하게 다른 흑백의 두 돌이 의지 없이 툭툭 테이블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대화였다. 아아 모르겠다, 더 이상은 한계다. 식사 때부터 이어져온 극심한 내적 갈등이 참다 참다 나도 모르게 터져 인트로고 예고편이고 없이 결론부터 나와버렸다.
"나 사실 너 그만 만나고 싶었다. 꽤 오래전부터."
항상 이해되지 않았다. 연인한테 차이고 와서는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고 오늘은 그럴만한 분위기도 아니었을뿐더러 그동안 만나 오면서 이별에 대한 전조도 없었다며 동그래진 눈동자로 하염없이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찾아내려 애쓰는 친구들. 그런데 오늘은 그 동그란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비겁해지면 되는 거였구나. 그러니까 너는 잘못이 없다 다 내가 그릇이 작아서 그런 거다 많이 미안하다 몇 마디 남기고 일어서면 그렇게나 이해할 수 없었던 이별 스토리가 펼쳐지는 것이었다.
C양은 이번에야말로 심히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며. 생일 축하해주려고 가볍게 밥이나 먹을까 싶어 나온 건데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에게 나는 꽤 오랫동안 담아두어 눅눅해질 대로 눅눅해진 철 지난 이야기들을 꺼내놓았다. 지난 글에서 썼던 거의 대부분의 생각들을 전했다.
"너도 느꼈겠지만 너무 다르잖아. 집안 환경도 생각하는 것도 살아가는 것도. 널 만나고 나면 내 삶에 대한 확신이 불안으로 바뀌더라. 이렇게 살아도 되나 계속 돌아보게 되고. 부족할 거 없이 귀하게 자란 널 보면서, 여자의 젊음이 결혼으로 끝나야 된다 생각하는 널 보면서, 집은 아파트에서 살아야 하고, 차는 외제차를 끌고 다녀야 한다는 널 보면서......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에서 자라 남편에다 이제는 자식까지 다 가진 널 보면서 그 어떤 거 하나 가진 거 없는 나는, 그리고 딱히 그런 걸 가지려 노력도 않고 사는 나는 너무 하찮은 존재가 되더라. 한 번도 니 앞에선 나다워 본 적이 없는 거 같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되더라......"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녀의 눈이 일렁거렸다. 상처받았을까. 화가 났을까. 미안하다는 쪽일까. 다시는 보지 말자는 쪽일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거 같은 그녀의 표정을 애써 외면하며 최후의 변론을 마친 나는 판결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갖은 추측들로 결말을 저울질할 뿐이었다.
"나도 그랬어. 나도 벅찰 때가 많았어. 너네 만나는 동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도 그랬다라니. 아니, 이보세요 너가 왜.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가면을 쓰고 만나던 내 입장에서는 너의 감정을 상하게 했던 껀덕지가 없기도 없기로서니와, 너가 아닌 너네라 함은 그러니까 나 한 명이 아니라 함께 어울리던 우리 동기들을 지칭하는 게 아니던가.
"대학교 때는 그래도 재미있었어. 나와는 다른 너네들 생각 듣는 게 신선했고 나한테 필요한 부분들이 여겼으니까. 근데 있잖아 나는 가볍게 술 마시면서 시시콜콜한 얘기 하면서 노는 게 좋더라. 난 단순하잖아. 다 커서도 엄마 품에만 있었으니까 우리 부모님처럼 보수적이란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그게 맘이 편해. 그냥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니까. 엄마 아빠 세대처럼 빨리 결혼해서 가정 꾸리고 애 낳고 돈 모아서 집 사고 평수 늘려가고 나는 그렇게 사는 게 편한 사람인데, 너네만 만나면 그 진취적인 생각들이, 철학적이 사고들이 날 너무 힘들게 하더라. 나에겐 왜 저런 마음들이 생기지 않을까 자책하게 되고 말야."
함께 어울렸던 동기들의 삶은 다분히 언더그라운드적인 색이 짙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이도 5명 중 이제 한 명 밖에 남지 않았다. 다들 결혼도 않고 지맘대로 살아야 하는 성향들이었다. 한 마디로 요약하건대 그녀는 이런 비주류의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대체 왜, 너 같은 주류가 어째서.
"오늘도 그랬어. 너 퇴사하고 하고 싶은 것들 하면서 사는 얘기 듣는데, 그걸 말하는 네가 너무 행복해 보이는 거지. 내가 결혼을 너무 일찍 했나. 애를 너무 빨리 낳았나. 이제야 재취업 걱정하고 있는데 너는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웠다고 하니까 돈 못 벌어도 행복하다고 하니까 생각이 많아지더라. 나는 이미 노선을 정했는데 이 길로 가야 되는데 아이가 있는데 되돌릴 수 없는데......"
절대로, 단언컨대 그녀가 나를 보며 이런 마음이 들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찌질한 놈, 철이 덜 든 놈, 사회 부적응자, 뭐 이런 생각 안 하면 다행이다 싶었지. 자기도 우리와 만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동안 연락이 뜸했다고. 결혼이나 아이 돌잔치는 나름 큰 행사라 다른 사람한테 전해 들으면 기분 상할까 직접 연락했던 것이라고. 오늘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은 그럼에도 종종 생각나는 친구들이고 자신도 쉽게 지울 수 없는 관계라 판단해 힘들게 연락한 것이라고.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그랬다."는 그녀의 말을.
세상에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타자이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완벽한 타자가 있다. 나에겐 그녀가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는 이런 완벽한 타자로부터 완전한 자신을 알아간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와는 정반대의 상대로부터 깨달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교라는 과오를 저지르고 의심이라는 고문을 통해 스스로를 신문한다. 너는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냐고.
그녀가 어린이집에 있는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이 가까워졌으므로 우리는 서둘러 감정을 추스르고 카페를 나와 다시 각자의 노선으로 발 길을 돌렸다. 나는 그녀가 잘 가라는 인사와 남긴 한 마디가 머릿속에 맴돌아 버스를 타려다 말고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백수라 남는 게 시간이요 쓸만한 게 체력이었다.
"고마워. 오늘 널 만나길 정말 잘한 거 같아.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해본 게. 온전히 내 일 때문에 감정을 써본 게."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엄마가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그것들을 거치면서 너는 너대로 우리 때문에 참 힘들었겠구나. 왕십리에서 금호로 걸어오는 내내 내가 알지 못했던 그녀의 하루들을 상상해보았다. 커다랗게 줄지어진 가로수 나무들이 봄바람에 부채춤을 추어댔고 나는 축축해진 겨드랑이 팍을 식히려 잠시 겉옷을 벗고 서서 나부끼는 춤사위를 감상했다.
바람이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서로를 흔들어 대는 바람 같은 것이었다. 너는 나의 빛나는 것을 바랐고 나는 너의 소중한 것을 바랐던 것이었다. 어째서 인간은 누군가의 소유를 소유하려 들고 누군가의 꿈을 꿈꾸려 하는 걸까. 어째서 자신의 자리에 오롯이 만족할 수는 없는 걸까. 하기야 그렇기에 또 기어이 앞으로 나아가고 발전하는 것이 우리일 테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런 성장조차도 버거울 때가 있다. 둘 중 누구라도 단단하게 버텨낼 여력이 있었더라면 더 휘청거리는 쪽을 붙잡아 주었을 텐데, 20대의 우리는 너무 어리고 또한 여렸다.
한 시간쯤 걷다 보니 어느새 눈에 익은 길들이 보였다. 집에는 잘 들어갔냐 생일 챙겨줘서 고맙다 몇 글자 적어 보내니 이 녀석이 한다는 말이 한 시간을 걸어 겨우 식히고 온 마음에 또다시 불을 지핀다.
"아니야. 생일 선물은 내가 받은 기분인걸. 오늘 고마웠어."
많은 오해들이 실타래 굴러가듯 한꺼번에 풀려갔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렇다 한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란 걸. 하나의 계기가 될 수는 있으나 이것이 그래서 친구들은 서로를 위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따위의 동화 같은 이야기로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이곳은 현실이고 각자의 삶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에게 처한 상황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내가 걷고 또 걸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서로를 이해하면 할수록 더 마음 아팠던 이유가. 어쩌면 그녀도 지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오늘 일을 떠올리며 또다시 나에게 대답할 것만 같다.
'나도 그랬어.'
비록 호기로웠던 결심과 달리 친구와의 이별에는 실패했지만, 나는 어쩐지 이별보다 더 아름다운 이별을 한 기분이다. 집으로 가는 길을 놔두고 애써 먼 길을 한 바퀴 더 돌아왔다. 따귀를 때리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서. 그녀에게도 지금 같은 바람이 불고 있다면 그 곁에 꽃나무 한그루 서 있길 바라본다. 부디 그녀가 기분 좋은 걸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