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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타누키 차차 Feb 21. 2018

3. 기회는 다르게 적힌다

인생? 뭐 없겠지만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 기회. 여태껏 세상에 바라기만 하고 누군가로부터 주어지길만 기다려야 했던 것. 이제 그것을 스스로 나에게 직접 선사해보려는 거다. 교묘하게 질소로 과대 포장해 나처럼 선량하지만 조금은 모자란 사람들이 덥석 집게 만들고 막상 안을 까보면 실망만을 안겨주던, 동물원에서 선심 쓰듯 던져진 고깃덩어리 같이 생명력을 잃어버린 타인으로부터의 기회들, 나는 더 이상 그들이 주는 기회라는 이름의 속임수에 놀아나고 싶지 않아졌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다. 처음 입사할 때 그 순간만큼은 말이다. 마지막으로 퇴사한 회사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니 우리는 정말로 기회라고 여겼다. 사실, 이번 퇴사는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르르 팀으로 들어갔다 다시 우르르 팀으로 나와버린, 회사에게 꽤나 타격이 큰 일을 저질러 버린 사람들이다.


 글을 쓰는 나와 그림을 만드는 아트, 이 모든 걸 책임지는 팀장. 이렇게 한 세트로 구성된 우리 셋은 팀장님의 인맥으로 세 명이서 동시에 회사를 이직한 케이스였다. 모두 함께 옮길 수 있는 회사가 있을까 내심 걱정하던 차에 팀으로 받아준다는 전 회사의 스카우트 제안은 진심으로 하늘이 주신 기회 같았다. 나중에야 깨달았다. 바로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어긋났던 것이었음을…….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금기 사항들을 도장 깨기 하듯 골라하는, 까라면 까의 원칙을 지키던 그 회사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우리의 그런 행동은 물론 순수하게 '몰라서'인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대부분은 바꿀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에서였던 것 같다.


 "이  브랜드는 원래 그래"

"이 기업은 원래 이렇게 해야 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하라면서 우리가 리뷰 시간에 들은 말들은 새로움 근처에도 가기 힘든 피드백이 많았다.


'원래부터 그런 것들이 정말 존재할까?'

'원래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닐까?'

 매 회의가 의문스러웠다.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기가 막히게 줄타기를 했어야 했는데 우리에겐 안타깝게도 그런 노련미가 없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피드백을 반영하며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 티를 내며 완수해 갔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우리 팀은 그 해 회사에서 유일하게 모 대기업 경쟁 피티를 2번이나 따냈다. 엄마는 티비를 틀 때마다 내가 만든 광고가 나온다며 좋아했지만 정작 나는 일을 할 때마다 보람 대신 회의가 밀려왔다. 하라는 대로 해서 인정받는 인생이 이렇게 무의미한 것이구나. 매일매일이 지옥 같았다.


 광고업이라는 게 야근은 우스운 일이고 주말 출근도 그렇게 야단 떨 일이 아니다. 새벽 6시에 들어와서 눈곱 낄 여유도 없이 오전에 다시 출근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야근수당이나 주말 수당 이런 게 있냐 하면 또 아니다. 대한민국에 그런 거 챙겨주며 일하는 회사가 얼마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내 인생에는 없었으니까. 사실 이런 것도 그냥 원래 그렇단다. 광고 회사는 다 그런 거란다. 비슷한 업종의 비슷한 연차의 동기들도 이런 게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 잘 알지만 그냥 받아들이고 버텨야 한다는 말 뿐이었다. 


 그 말이 맞는 걸까? 이렇게 내 뜻대로 되는 거 하나 없이 시키는 대로 말 잘 듣고 주는 일 마다하지 않고 해내면 잘 사는 게 맞는 걸까? 의미 없이 움직이고 있는 내 몸과 의심을 품은 마음이 서로 으르렁 거릴 때마다 ‘착’ 하고 회사에선 어떻게 알고 월급이란 마취 총을 싸줬다. 그렇게 푸른 들판의 사파리는 잊어버린 채 마취된 한 마리 짐승처럼 사육되어 우리 안에 갇혀 사는 인생의 반복이었다. 

 

 오늘이 행복하지 않은데 내일의 행복을 바란다는 것이, 미래를 꿈꾼다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질 때쯤이었다. 올해 초 수술한 암이 재발한 것 같다는 소견을 들었던 것이. 처음부터 초기에 발견되어서 생명에 지장이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니, 머리가 하얘졌다. 이럴 경우 산업재해 처리가 가능한지 진심으로 묻고 싶었지만 헛짓거리 같아 그만두었다.


 대학병원이란 곳은 참으로 이상한 게 갈 때마다 간단한 수술이다, 금방 끝난다 걱정 말라하면서 내역서에는 중증으로 찍어줬다. 그래서 나도 바보처럼 갈피를 못 잡고 기회라고 생각했던 그 회사에 휴식 없이 바로 이직을 해버린 것이다. 내 몸 하나 관리하지 못한 것을 누굴 탓하겠냐마는 괜스레 억울한 심정이었다. 대한민국이 직장인으로 살아가기에 암덩어리 한두 개 없는 게 더 이상한 환경임에는 틀림없지 않은가.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았고 나서야 고마워졌다. 암세포들아 너희가 내가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걸 애써 참아내려 하니까 부단히 노력해주어 이 비루한 몸뚱이를 통해 경고해주었구나. 더는 그렇게 살지 말라고.

 

 나는 그 길로 퇴사를 결정했고, 함께 들어온 나머지 두 명의 팀원들도 같은 회의감을 느끼며 퇴사를 결정했다. 그렇게 우리 셋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쪼르르 한 날 한시에 퇴사해버린 거다. 입사한 지 8개월 만의 일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도 회사가 우리에게 준 것은 ‘셋이서 성과를 낼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다. 내가 바랬던 것은 ‘셋이서 실패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다. 기회를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어긋나 버린 관계였다. 실패를 해야 성공하는 법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사회는, 비즈니스에서는 실패는 그냥 실패인 모양이다. 왜냐면 그것은 곧 적자니까.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직장생활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 희망 직업에 대통령을 적는 것처럼.  


 허나, 아직 믿고 있다. 인간은 실패하려고 태어나는 존재들이라고. 계속 부딪히고 이게 안되면 저걸 해보고 그러다 또 이걸 해보고. 그 경험치들이 쌓여 세상의 진리라든가 이치라든가 혹은 자신만의 신념이나 방식들이 세워지는 거라고.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 같지만, 최근 방영되는 '윤식당'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성공이란 실패의 과정들이 비빔밥처럼 조화롭게 쌓일 때, 이제 때가 됐다 싶어 얹어지는 계란 프라이 같은 것이라고. 무심한 듯 툭 하고 그 모든 조화 속에서 자리를 잡는 것. 그런 계란 프라이 같은 성공만이 의미가 있다고. 나는 여전히 살짝 데쳐진 시금치 같은 실패와 수십 번 들들 볶인 피망 같은 시도들과 며칠 동안 재워둔 불고기 같은 그르침이 더 고프다. 그래서 계란 프라이만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잘 비벼지지가 않았나 보다.


자, 그럼 지금부터 나의 언어로만 적히는 기회들을 만들어볼까? 

그런 의미로 오늘 저녁은 비빔밥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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