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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타누키 차차 Feb 23. 2018

4. 퇴사의 민낯

인생? 뭐 없겠지만 있을 수도 있으니까


 퇴사 후 가장 큰 변화는 아무 데도 나가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일주일 정도는 우습게 집에만 있는다. 오갈 데 없는 인생이란 게 이런 것일까. 한낮에도 기온은 영하 15도. 날씨에게 서운한 느낌마저 들었다. 싱크대 물은 얼어붙었고 화장실 물도 찬물만 겨우 나올 뿐이었다. 며칠간 지속되는 한파로 곳곳이 겨울왕국이 되었고 그 바람에 어딘가를 나가야 한다는 의지는 철저히 제로 상태가 되어버렸다. 


 날이 풀리는가 싶으면 이번엔 미세먼지가 심각하니 외출을 삼가란다. 언제부터 날씨가 주의해야 하는 대상이 되어버린 건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바깥세상에서 주의해야 되는 건 사람 하나로 족한데 말이다.


 필요한 생필품들은 쓰윽하고 가져다준다는 마트를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문 앞에 놓고 가주세요라고 써놔도 친절히 벨을 누르고, 전화까지 해주시는 기사님들에게는 죄송했지만, 멀뚱멀뚱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매번 없는 척을 해댔다. 배달기사님이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물건들을 들여놨다. 아무 데도 나가고 싶지 않은 만큼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고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생은 그렇지 않은 인생보다 확실히 행복했다. 


 나가지 않음은 자연스레 씻지 않음으로 연결됐다. 나에게서 '씻는다'는 것은 본래의 목적인 청결을 위함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 같은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얼굴 씻고, 이빨 닦고, 샤워하고, 머리카락을 샴푸로 감고, 린스로 헹구고, 헤어 에센스 바르고, 다시 그 미역줄기 같은 것들을 10여 분 말리고, 얼굴과 몸통에 로션 바르고, 얼굴엔 다시 크림 바르고, 굳이 하얗게 화장한 얼굴에 다시 발그레 색조를 입히고, 옷 입고 다시 옷에 어울리는 가방을 고르고, 양말을 고르고 양말과 같은 톤으로 신발도 고르고, 드디어 문을 열고 나간다 싶었는데 배가 살살 아파와 조금 망설이며 한두 걸음 내려가다 안 되겠다 싶어 기어이 집에 들어와 변을 보고 손을 씻고 다시 문을 열고 나가는, 외출이란 실로 대단한 행위였다는 것을 그 모든 것들을 생략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다음 단계로,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게 되었다. 나가지 않기로 했으니 굳이 날씨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업무적으로 찾는 사람도 없으니 핸드폰도 대부분 무음이거나 어디에 놔두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메일함은 비우지 않는 쓰레기통이 된 지 오래였다. 출구만 남기고 입구는 사라진 인터넷 계좌는 마음 아파 확인을 할 수 없었다. 거울을 봐야 하는 이유도 사라졌다. 퇴사 전엔 조그마한 뾰루지도 손으로 만지고 키워 기어코 짜고야 마는, 거울 없이는 못 사는 여자였다면 지금은 그야말로 거울도 안 보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일상이 한 달을 넘어가고 있다. 금방 질릴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익숙해지니 이보다 무료하고 그래서 즐거운 나날이 있을까 싶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이 무료함이 견디기 버거운 적이 많았다. 아주 가끔 무방비 상태로 이른 퇴근을 맞이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건 마치 쌩얼로 이태원 거리를 걷다가 꽤 괜찮은 남자에게 헌팅을 당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한마디로 매우 당황스러웠다. 생각지도 않게 일이 일찍 끝나 너무 즐거운데 도통 뭐를 해야 할지 몰라 곤란했었다. 다 들 일하는 중일 테고, 갑자기 약속을 잡을 사람도 마땅히 떠오르질 않는데 혼자 전시회다 뭐다 그런 호사를 누릴 에너지는 없고, 아직 해가 떠 있는데 집으로 가기엔 아쉽고, 그러나 목적지가 없는 발걸음은 이미 익숙한 집으로 향하고 있고……. 결국 집으로 오는 길에 실연당한 여자처럼 엉엉 울어버린 적이 있다. 뭐를 해야 할지,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싶은지 내 마음 하나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수의 삶은 훨씬 반듯하다. 오늘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하루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어나자마자 책을 읽고 싶으면 그렇게 하도록 해 주고 조금 더 자고 싶으면 또 그것을 허락해준다. 아침 점심 저녁은 해와 달의 움직임이 아니라 나의 움직임을 통해 정해진다. 철저히 내 중심적인 삶을 살아보는 것이다. 그동안 ‘남’에게 맞춰져 있던 기준점을 다시 ‘나’에게 맞추는 시간이다.   


 오랜만에 친구
들과 약속이 있던 날, 최근의 생활 방식 그대로 나 편할 대로의 준비만 하고 털레털레 나갔더랬다. 추우니까 히트텍에 가장 따듯한 옷을 골라 입고 감지 않은 머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화장은 개나 줬다. 그런 꼴을 하고 사람들은 만나는 건 초등학교 이후론 없었을 것 같다. 거지꼴이라 놀려도 화내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며 만난 친구들에게서 들은 말들은 내 예상을 빗나갔다. “너 요즘 퇴사하더니 얼굴이 좋아졌다, 화장 안 했다고? 혹시 피부과 다녀? 얼굴이 폈네 폈어.” 기묘한 칭찬이 이어졌다. 기분이 좋다가도 이게 뭘까 싶었다. 화려하게 빛나고 싶진 않아도 누구한테 꿀리기는 싫어 외출 준비 시간만 한 시간 반이 걸리곤 했었는데 15분도 투자하지 않은 지금의 내 모습이 더 좋아 보인다니 왠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퇴사자를 대하는 친구들의 상냥함이었을 수도 있었겠다만, 나는 깨달았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나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머리를 어떤 방향으로 말리고 입술은 무슨 색으로 발랐는지 그런 것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내 마음이 편안하고 만족스러울 때 나를 만나는 사람과도 그것을 느낄 수 있음을. 그러므로 내 마음이 편할 수 있다면 조금은 신경 끄고 살아도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읽어보지 않아서 내용도 잘 모르지만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이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사회에서 먹고 자고 싸고 하는 게 아닌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들도 상당 부분 드러나게 되어 있는 구조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나 역시 같은 방식으로 상처를 받곤 했다. 그런 일들이 사회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다 보니 화장은 얼굴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필요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감추고 싶은 마음에 적당히 분칠을 해가며 누군가의 마음을 속이고 또 내 마음까지 속이는 일상들의 반복. 그 속에서 싫은 사람에게도 곱게 비비크림을 바르고 방긋 웃는, 희생당한 마음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몸도 마음도 화장기 하나 없는 이 백수라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해졌다.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나만을 생각하고 돌볼 수 있는 시간, 나는 지금 민낯의 얼굴만큼 꾸밈없는 민낯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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