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뭐 없겠지만 있을 수도 있으니까
'회사 때려치우면 뭐 먹고살지?'
이것은 비단 퇴직을 고려하는 사람들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을 생각이다. 어느새 취준생만큼이나 많은 수의 퇴준생들이 직장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나와 같이 준비 단계 없이 바로 퇴직을 맞이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취업만큼 퇴직도 원한다면 언제든 스스로 준비하고 계획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평생직장'과 '정년퇴임'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실제로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살펴보아도 그러하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장 먼저 취업에 성공해 부러움을 사던 친구 한 명은 퇴사 후 취미로 바리스타 자격증 1급을 따더니 자신이 자격증을 딴 그 학원에서 강사를 하기 시작했다. 워낙 커피를 좋아해 유명하다는 카페는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였던 그 친구는 그렇게 1년 정도 마음껏 커피 향을 맡더니 현재 작은 카페에서 매니저 일을 하고 있다. 그 친구의 원래 분야는 건설업이었다.
작년에도 한 친구 녀석이 갑자기 8년 동안 청춘 바쳐 일하던 회사를 그만뒀다. 나에겐 이름도 생소한 방사선비파괴 관련 일을 하던 그녀는 한동안 여행을 미친 듯이 다니더니 작년 말부터 1년짜리 코스의 애견미용 기술을 배우러 다닌다. 어렸을 때부터 동물이 좋아 수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 정도의 공부머리가 되지 않아 포기했던 꿈을 현실적으로 다시 고려해 선택한 분야라 말했다.
지역 축제는 왜 촌스럽고 어르신들만의 잔치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사회적 기업에서 지역을 되살리는 프로젝트를 하던 또 다른 친구는 여대 근처에 테이블 5개짜리 밥집을 차렸다. 밥집을 차리기 전에는 잠깐 빈티지 구제샵을 운영하기도 했던 그 친구는 이 두 번의 소소한 사업을 진행하면서 부모님이 해주신 전셋집만큼의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주된 손님이라며 밥값을 올리지 않기 위해 매번 새벽 시장에 나가 싱싱하지만 저렴한 재료들을 구입해 한 상을 차려낸다. 그 가게는 어떤 때는 카페로, 어떤 때는 책방으로, 어떤 때는 워크숍의 장소로 변신하며 지역 청년들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혀 다른 업종의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직장생활에 최선을 다하며 소진되어 갔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다는 점이다. 무작정 좋아하던 일을 직업으로 선택해보고, 잊었던 어릴 적 꿈에 도전해보고,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세상의 모습을 소소하고 미흡하지만 직접 그려나가는 퇴직자들.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다시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요즘 광고 회사 다니는 사람들마다 일할 사람 없냐고 난리도 아니다. 대리 말년 차나 차부장급의 중간층이 너무 없대. 맨날 나한테 알아봐 달라고 하는데, 딱 너네 연차인데, 너네 친구들 다 어디 간 거냐."
함께 퇴직 후, 잠깐씩 다른 이들의 일을 도우며 프리랜서를 하고 있는 팀장님이 하소연하듯 말했다.
"우리만 해도 봐요. 여기서 이러고 있잖아요. 다들 어디서 우리처럼 이러고 있겠죠 뭐."
나는 이러한 현상이 통쾌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 회사 저 회사 미팅 갈 때마다 팀장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요새 젊은 애들은 근성이 없댄다. 정말 그런 거냐?"
자신도 우리와 같이 8개월 만에 회사를 때려치운 당사자이면서도 정말 요즘 아이들의 생각이 궁금하다는 듯 팀장님이 다시 물었다.
"근성이 없는 게 아니라 더 현명해진 거겠죠. 참으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또 다른 퇴사자, 스타워즈를 좋아하는 아트님이 말했다.
'왜 버티지 못하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대체 왜 버텨야 하는가.'
우리 세대에게는 버텨야 할 이유가 없다. 어른들이 요구하는 근성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피치 못할 경우 결혼도 아이도 과감히 포기하는 쪽을 선택하는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하나뿐인 내 인생을 희생할 생각이 없다. 국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민을 가는 것을 선택한다. 욜로든 골로든 어차피 쓸 돈이니 나한테나 쓴다. 교육의 수준은 높아졌고 자의식은 강해졌다. 나에게 옳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판단할 줄 알며 그것의 부정을 묵인하지 않는다. 그런 우리들에게 우리 때는 안 그랬다며 무조건 버티라는 식의 기성세대의 외침은 참으로 허망하기 그지없다.
어디 그뿐인가. 미디어는 넓어졌고 정보의 공유는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취미로만 여기던 덕질 자체를 업으로 삼을 수 있는 일들도 많아졌다. 얼마 전에 보았던 온라인 기사에서 최근 초등학생들의 희망 직업 1위가 뷰티 크리에이터라는 사실을 접하고 나는 크게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인 적이 있다. 그들은 그 어린 나이부터 누군가에게 종속되는 삶 대신 스스로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크리에이터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 꿈을 꾸는 아이들이 실로 대단하게 느껴지면서 처음 세대차이라는 걸 몸소 느꼈다. 나는 왜 여태껏 그런 생각을, 도전을 해보지 않았던 것일까. 이미 나도 수년간의 직장생활로 기성화 되어가고 있던 것은 아닐까 내심 부끄러워졌다.
요즘 우스갯말 중에 우리나라 3대 기획사는 SM과 YG 그리고 은이 기획이라는 말이 있다. 데뷔 20년 차, 마흔이 넘은 개그우먼 송은이는 방송사 개편 시즌마다 출연하는 프로그램의 존폐를 걱정하지 않고 원하는 이야기로 마음껏 시도해보기 위해 유연성 강한 팟캐스트와 온라인 방송을 선택했다. 그리고 꾸준히 자신이 원하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어 나간 끝에 현재의 송은이 사단을 이끌며 공중파를 장악했다.
개인이 콘텐츠가 될 수 있는 시대, 그리고 그것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 바야흐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도 어쩌면 배부르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나라는 인간은 원래 무엇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나. 그리고 현실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여 나중에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다시 직장생활을 해야 되는 순간이 찾아와도 최선을 다해 하고 싶은 것들을 시도해 보았기에 후회 없었다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