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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타누키 차차 Feb 19. 2018

2. 계획이 없는 게 계획입니다만

인생? 뭐 없겠지만 있을 수도 있으니까.


 눈이 떠져서 눈을 뜨는 하루를 시작한다. 알람 없이 맞이하는 아침, 이 아닌 벌써 오후 3시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인간은 도대체 하루에 몇 시간을 잘 수 있는 것인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나 더욱 믿을 수 없는 사실, 내가 12시간을 넘게 자고도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팔, 다리의 주인이라는 것. 침대에서 두어 시간을 더 뒹굴거리다 이러다 이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쩌냐 싶어 억지로 일어났다. 오후 6시, 식빵 두 개 사이로 치즈 하나 햄 하나를 다정하게 포개 넣은 토스트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상쾌한 첫 끼를 시작한다. 백수가 된 지 24일째, 이제는 일상이 된 하루의 시작이다.


 직장인이었을 때 내가 그리던 백수생활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평일에는 한남동 맛 집에서 느지막이 브런치를 즐기고 있을 줄 알았다. 서점에서 여유롭게 신간도 읽고 영화도 조조로 보고 막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의 리얼 백수의 나는 욕창이 걸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다. 이 좁은 원룸에서조차 어떻게 하면 동선을 최소화하며 움직일까 궁리하다가 겨우겨우 몸을 일으킬 뿐이었다. 나는 아니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게으르고 의지가 없는 동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건데?”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던 순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은 물었다. 직장 상사, 동료, 학교 선배님 후배님,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새삼 놀라웠다. 정말 걱정스러워서 그러는 건가, 아님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나 단순한 호기심인가, 그것도 아님 그래 어디 어떻게 살 건지 들어는 보자 식의 못된 심보인 건가? 아무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오만가지 생각이 들면서 나는 세상에 나를 아는 모두에게 앞으로 백수로서의 나의 계획과 포부 따위를 가능한 한 야심 차게 말해야지 이 퇴사가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그냥 하고 싶은 것들을 해보고 싶다는 아사 모사한 말로 내 대답을 대신했다. 사실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왜냐하면 정말 아무런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실적이고 이성적으로 내 퇴사 후의 계획을 세울 정신머리와 에너지가 있었다면 나는 분명 퇴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힘으로 아마 조금이라도 더 하루하루를 버텨가며 월급을 기다리고 성과급을 기다리고 승진을 기다리는 평범하 회사원 사람이 되려 애썼을 것이다. 정말이다.


 당장 오늘 눈이 떠지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수준인데 계획은 무슨 계획이람…. 그리고 이제 나이 서른쯤 되어보니 인생은 결코 내 계획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내 계획대로 였다면 나는 SKY 중 하나의 대학을 졸업해 유학을 가서 유창한 영어실력과 탁월한 현지 적응 능력을 발휘하며 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한국은 명절에나 이따금 들리는 성공한 유학파 인재여야 했다. 계획 대로였다면 말이다.


 인생은 목적지를 정해두고 달려가는 일직선의 고속도로가 아니었다. 목적지를 정해놔도 어차피 펼쳐진 건 꼬부랑 길이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목적지를 변경해야 할 명분들이 주어졌다. 대학교는 수시를 통해서 겨우 인 서울에 성공했고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기다렸다는 듯 부모님의 사업이 망했다. 그래도 외국물이 먹고 싶어 아르바이트로 모은 푼돈으로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다. 그마저도 향수병이 걸려 1년을 다 못 채우고 10개월 만에 돌아왔다. 한국에선 이름 없는 스타트업과 작은 광고대행사를 전전하면 정말 억지로 억지로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이루었다. 고등학교를 제외하고 10년 동안 내가 계획해서 된 일은 카피라이터라고 쓰인 명함을 갖는 일 하나뿐이었다.

    
지치기도 지쳤지만, 더 늦기 전에 나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되는 기회. 그동안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느라 수고했으니 아무 계획 없이 한 번 살아보라고, 그냥 그렇게 내 방식대로 나를 격려해주고 싶었던 거 같다. 질릴 때까지 놀아도 보고 나이가 들어 실패가 더 두려워지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일들 마음껏 하면서 한 번 살아보라고. 내가 1년 정도 농땡이 친다고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 게 아니듯 내 인생도 크게 잘못되는 건 아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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